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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와 안개의 집 - House of Sand and Fog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살아있는 자들의 상처, 그 비밀들
딸의 화려한 결혼식장에서 베라니 대령(벤킹슬리)은 여유로운 중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하지만 그는 낮에는 막노동을, 밤에는 편의점에서 일하며, 가족들 모르게, 고국 이란에서 보장받았던 윤택한 삶을 지켜나가려고 애쓰는 인물이다. 군인으로서 명령을 내리기만 했던 그에게, 미국에서의 삶은 힘든 노동을 감수하면서, 살아갈 것을 명령한다. 즉, 그는 고국에서 비밀경찰로 일하다가, -어떤 연유에서인지- 추방 당한 상처와 미국에서 비참한 노동을 하며 가족들을 보살펴야 하는 비밀을 간직한 인물이다. 반면 그의 부인 나디(소레아그다시루)는 과거 추방당할 때의 충격을 고스란히 갖고 있는 인물로,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하고, 집에만 머물며 남편의 일방적 보호 속 자신의 병을 견뎌내야 하는 비밀을 갖고 있다. 다음으로, 해변집의 원래 소유주인 캐시(제니퍼 코넬리) 역시 힘들게 가정부 일을 하며 생활하고, 수년간 알콜 중독과 이혼의 상처를 비밀로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우연처럼 나타난 보안관 레스터(론 엘다드)는 오래된 결혼생활에서도 외로움을 품고 매일을 살아가는 비밀을 안고 있다.
2. 상처는 어디에서 생겼나
캐시의 상처는 계약금의 4배를 요구하며 집을 내놓기를 거부하는 베라니 때문인가. 반대로 베라니의 상처는 온전하게 집을 산 그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본래의 자기 집을 내놓으라는 캐시의 막무가내 때문인가.
작품에서 인물들의 상처는 근본적으로 상대방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캐시와 베라니는 모두 나름의 상처를 지니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 영화는 전통적 내러티브에서처럼 어느 한 명이 선인(善人,주동인물)이고, 다른 한 명이 악인(惡人, 반동인물)으로 설정되어 있지도 않고, 그들 사이에 근원적 적대감도 없다. 오히려, 그들은 영화 <주먹이 운다>의 주인공들처럼 각자의 사연들을 지니고 있고, 서로의 소박한 꿈을 위해 링 위에서 대면하는 존재들일 뿐이다.
결국, 이들의 상처, 즉 갈등의 원인은 그들 삶이 어떻게 굴러가는지에는 관심도 없는 세무서 당국의 실수로 비롯된 것이다. 처음, 집으로 계속 찾아오는 캐시에게 베라니는 그녀를 강하게 내쫓지만, 그것은 자신들의 가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행동이였다. 하지만, 갈등의 골이 이미 깊어진 후, 그녀가 차 안에서 자살기도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는 그녀를 집으로 데려와 ‘상처 받은 새’로 여기면서 보호한다. 또한 그녀 역시, 뒤늦게 베라니를 발견하고는 그를 살리기 위해 진심으로 애를 쓴다. 또한 이 외에도, 발을 다친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감싸는 그의 부인 나디의 모습이나 아들의 죽음으로 고통을 느끼는 베라니를 보며, 충격과 자책에 휩싸이는 레스터의 모습은, 그들 모두가 서로에의 상처의 원인도 아니고, 그것을 원하지도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고된 일상으로, 가족들의 삶을 지켜 나가는 베라니의 모습은, 30년 동안 고되게 살다가 집 하나를 남기고 돌아가신 캐시의 아버지에 다름 아니며, 캐시는 감싸주고 보호해줘야 할 연약한 그의 또 다른 딸이다.
3. 살아간다는 건, 그 답을 대하는 불편함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소설가 황석영은 <오래된 정원>에서 얘기한다. 어렸을 적, 자신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소풍날이 아니라, 소풍 전날의 설레임이였음을……. 실제 소풍을 가던 날은 별 다를 게 없는 일상에 불과했음을……. 어쩌면 우리의 삶 자체는 그 안을 그대로 들여다보면 볼수록,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상처 투성이이고, 모욕과 고된 일상을 참아내야 하는 날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관객들은 인물들의 상처 안은 삶의 모습에 불편함을 느끼고 마주하고 싶지 않을 정도다.
그래도, 그들은 매순간 살아 있었다. 쇠락해진 내가 아닌 또 다른 나의 가족, 지금이 아닌 미래에 대한 꿈이 그들에게는 살아감의 이유였다. 베라니는 힘든 현실에서도 그들 가족이 신의 축복을 받고 있다는 믿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고, 캐시는 한순간에 집을 잃지만, 갖은 모욕에도 자기 집을 되찾으려고 애를 쓰고, 또다른 사랑의 감정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실제 우리의 삶처럼 그들 역시, 그들의 믿음이 그들 삶의 현실로 주어지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우린 다시 한 번, 인물들을 넘어서서 존재하는 삶의 구조적 모순과 아픔을 직면하게 된다. 그들이 꿈꾸던 소박한 꿈은 결국 현실로 나타나지 않는다. 베라니는 자신의 분신이였던 아들의 죽음으로, 아내와 함께 죽음을 맞이하고, 레스텔은 수감되며, 캐시는 어떻게든 되찾으려 했던 그녀의 집을 결국,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 그것은 자연과 마주하고 있는 인간 삶의 이야기로, 해가 뜨고 지고, 바람이 불고, 파도가 일렁이는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더욱 아프고 예민하게 다가오는 우리의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