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집에 다녀왔다. 감상을 적어보려니 벌써부터 가슴이 아려온다. 

시골집은 나와 동생들이 나고 자란 곳이라 우리 가족들에겐 너무도 각별한 집이다.
더군다나 400여 년을 한 마을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 던 우리 가족에게 고향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특별한 곳이다. 고등학교때 부터 난 객지 생활을 했기에, 그 집과 관련된 내 추억은 16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유년을 보낸 그 집에 대한 기억은 내가 죽을때 까지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게 될 것 같다. 

집에 대한 얘기에 벌써 부터 가슴이 아려오는 것은, 그 집이 IMF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남의 집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경매로 넘어가지 않았어도 이미 그 집은 다른 사람들에게 세를 주고 있던 집이다. 아버지의 소유였든 아니든 그곳에는 남이 살고 있을 집이지만, 마음은 달랐다.

고향집에 대한 기억은 고구마 줄기를 캐 내듯 밤을 새워 얘기해도 모자랄 만큼 많다. 고향집은 두세번의 변천기를 갖는데, 내가 어렸을때 우리 집은 ㄷ 자 형이었다.

안방과 가운데방, 갓방이 있는 안채와 직각으로 목욕탕, 고방(곳간), 아랫방, 대청마루가 있는 별채, 그리고 다시 별채와 직각으로 커다란 대문(이른 아침 이 대문을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됐다. 물론 거지들이 이 곳 앞에 앉아서 밥을 구걸하기도 하던...)과 농기구를 넣어두던 창고와 닭장, 화장실이 있는 아랫채.  그 가운데로 마당이 자리했다.

여름이면, 평상에 누워 별을 보기도 하고, 그러다 잠들기도 하고,
서울에서 친척들이 오면 마당에 멍석을 깔고 밥을 먹기도 하던...
또 밤이면, 화장실 가기가 무서워 마당 구석에서 응가를 보기도 했는데, 개들이 따라다니며 응가를 어찌나 맛나게 주워 먹던지...
그리고 안채와 아랫채에 기다란 고무줄을 걸어두고, 고무줄 뛰기를 하다가 무릎으로 코를 찧어 코피가 나기도 했던 그 마당...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자면, 이 페이지가 끝이 날까 무서울 정도로 헤아릴 수 없는 추억이 서린 마당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의 우리 집은 ㅁ자로 바뀌게 됐다.
제사를 지내는 제각이 들어서고, 농사를 더 이상 짓지 않아 쓸모가 없어진 아랫채는 현대식 건물로 바뀌게 됐다.

고향집 가는 얘기를 하는데, 서론이 너무 길다. 
시댁은 산청. 내 고향집이 있는 섬진강가 하동까지는 1시간이면 족하는 거리였다.
결혼한지 6년이 다 돼 가건만, 명절이면 가 보고 싶어 마음이 곤두방망이질 치곤 했던 그곳을 왜 아직도 못갔을까.
아이들을 뒤에 태우고, 진주에서 하동으로 가는 남해고속도로를 가면서 다시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번에 시골집에 갈 수 있었던 건,
아이러니 하게도 시아버님이 너무 위독하시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병상을 지키는데, 아이들이 병원에서 오랜 시간 보내기 적절치 못하다는 이유로
밖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좋겠다는 더 없이 좋은 핑게로
난 아이들을 태우고 시골집에 가겠다는 허락을 받았다.

편리함, 그러나...

진주에서 30분 차로 달리자 하동ic가 나왔다. 그곳에서 5분. 드디어 고향 동네 가까이에 왔다. 그런데 이미 그 길은 예전에 그 길이 아니었다.
구불 구불 마을과 마을을 이어 나 있던 그 국도는 온데 간데 없고, 운치 없는 직선도로가 나 있었다. 고향마을까지 당도하는데 3분도 걸리지 않기는 했다. 더군다나 그 길에서는 고향마을이 보이지도 않았다. 역시 은빛 반짝이던 섬진강도 보이질 않았다. 벌써 부터 상심...

드디어 고향마을에 도착.

고모댁에 인사를 하고, 아이들을 남겨둔 채
카메라를 들고, 고향집을 어슬렁 어슬렁 찾아 나섰다. 
매일 오가던 등교길을 따라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데, 옆집 친구엄마 같이 생긴 여자가 길에 서서 누군가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맙소사 내 옆집 친구다.

"00야" 부르니,
"누구세요?" 그런다.

22년 만의 만남이다. 내 이름을 말하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 얼굴이 그렇게 바뀌었나? )

우리 집 지붕이 한눈에 보이는 길가에 서서 반갑다는 인사와
소식(우리 집 부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났다는...)들었다는 얘기. 
친구 엄마는 2년 전에 돌아가셨다는 얘기,
마을 친구들의 안부를 묻는 사이 울지 않으려고 다짐했던 내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멀리서 고향집을 카메라에 담았다. 그것도 앞에서 똑바로 찍지는 못하고(이상하게 똑바로 쳐다보는 것도 힘들었다.) 뒤에서 지붕만 한가득 나오게 찍고 머지 않은 날에 다시 오마 다짐하며 돌아왔다.  엄마 아빠의 결혼식수는 보기싫게 기둥이 잘려있었고, 봄을 알리던 목련 나무는 온데간데 없었다.  

고향집에서 돌아오며,
'편리함', '실용'의 가치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동안 어쩌면 내가 최고의 가치로 생각해 왔던 그 '실용'의 가치가
운치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가장 눈에 거슬렸던 것이,
나무와 풀 언덕이 있던 자리는 대부분 시멘트 콘크리트가 발라져 있었다는 것,
그리고 썰매를 타던 마을 한가운데 저수지는 흙으로 메워져 주차장으로 바뀌었고,
시골 마을을 두루 두루 이어가는 도로는 직선도로로 바뀌고,
마루에 서면 훤히 내다보이던 섬진강은 해안도로라는 이름으로 둑을 높이 쌓아 공사를 하고 있어서 섬진강이 보이지도 않더라는 등등....

아직도 그곳에 내가 살고 있었다면,
아마도 편리해 졌다고 좋아했을지 모르겠지만,
이방인이 돼 버린 나에게 고향마을은 운치없이 삭막한 곳으로 변해가는 것 처럼 보여 못내 아쉽고, 안타깝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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