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에 나온 Perks의 뜻을 모르겠어서 사전을 찾아보았다.


명사

(은행) 비금전적 혜택

보충설명 금전형식으로 수수료를 지불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대출에 따라 고객이 지불하는 명목 비용을 줄이기 위해 사용되는 형식을 지칭한다.


오, 이 제목이 내용에 훨씬 충족되는구나. :) 

(실상 주인공 찰리는 트라우마와 좀 튀지 못하는 외모만 빼면, 엄친아다! 결국 '비금전적 혜택'도 충분히 보고 말이지. 훗)

하지만 저렇듯 금융권에서 주로 쓰인다는 혜택을 구구절절 그대로 갖다 붙이는 직역 대신 간단하게 '월플라워'라고 해버린 한국어 판 제목도 썩 괜찮은 선택이지 싶다.

어차피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월플라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


얼마 전 대 유행을 했다던 티비 드라마 '1997 응답하라' 같은 류를 안 보는 편이다. 그렇고 그런 비슷한 류의 추억 팔기 자체가 별로이기도 하고 청춘이라면 응당, 뭐 이런 메시지와 클리셰가 잔뜩이라서 - 그런데 나는 그런 청춘인 적이 거의 없었기때문에 공감을 못해서 - 별로이기도 하며, 그 당시 유행하던 음악을 별로 듣지 않아 잘 모르는 데다 워낙에 기억력이 안 좋은 터라 거기 나오는 모든 문화적 배경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영화 월플라워를 보면서,

믹스 테이프에 대한 그넘의 '추억'이 떠오르고야 말았다.

나도 별 수 없이 걸려든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본격적으로 심야라디오를 들어가며 녹음 버튼을 눌러 손수 믹스테이프를 만든 것 같은데, 역시 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대신에, 나보다 훨씬 열성적으로 테이프를 만들었던 두 친구가 기억난다.


*

M은 아마도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와서 거의 확신하건대 M에게는 동성애 적인 감성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 M을 따르는 동기 여자아이들이 많았던 것도 그래서였을지 모르겠다. 우리는 별로 공통분모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국어선생님의 지목으로 같은 장소에서 지정된 주제로 글을 쓰게 되었다. 아마도 문예반 비슷한 특활 시간이었을 거다. 나는 지금 생각해도 M보다 훨씬 글을 못 쓰는데, M은 그때 내 글이 좋다고 하면서 내게 다가왔다. 우리는 문학이나 음악 이야기를 하면서 친해졌는데, M에게는 내가 모르는 성숙한 세계의 아우라가 있었어서 옆에 있으면 왠지 나는 턱없이 순진하고 맹한 느낌이 들곤 했다. 다른 애들이 좋아하는 M인데, 성숙한 M인데, 유독 나를 좋아해주는 게 은근히 기뻤겠지만, '왜' 나를 좋아하는진 졸업할 때까지, 아니 우리가 한참 나이가 들 때까지 알 수도 없었고 알려 들지도 않았다. 그렇게 단순했다. 하! '단순함', 그것이 M에게 나를 돋보이게 한 것들 중 하나라니, 아이러니지 뭔가.

말했듯이, M의 가정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그런 아우라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물론 가난하다고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언니가 있었던 M은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어린 나이에도 집안 일이나 최소한의 벌이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게, 어느날인가, 비밀스럽게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으니 말이다. 

M의 아르바이트는, 사실 정정당당하지 않은 아르바이트였다.

동네 레코드샵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는데, 중학생인 M에게 주인이 시킨 일이 일종의 꼼수를 동반하는 단순 노동이었던 것.

일은 간단해보였지만 손 재주는 약간 필요했다. 

샵에 들어오는 정품 테이프에 붙어 있는 비닐을 아주 섬세하게 떼어내고 복사 테이프를 원하는 수량만큼 만든 뒤에 다시 아주 섬세하게 붙이는 작업, 이것이 M이 거기서 매일 하는 일이었다.

당연히 주인은 테이프 하나 값으로 최소 몇 십개 테이프를 복사하여, 정품보다 약간 싼 값으로 테이프를 사려는 소비자에게 신나게 팔았겠고, 이 일은 M이 어디에 고발이라도 하지 않는 한, 설령 고발을 하더라도 소비자에게 큰 피해를 입히는 일도 아니니, 걸릴 일도 없는 조금쯤 귀여운 자구책으로 봐줄 만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린 마음에 놀랐던 것 같다. 중학교 2학년 소녀가, 믹스테이프를 제 손으로 집에서 만들어 듣고 선물할 만한 나이에, 그런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면서 음악을 듣고 있다니. 상상을 해봤지만, 그 심정이 어떨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저 어느날엔가, 언제나 우리집에만 놀러 오던 M이 처음으로 자기 집에 데리고 갔을 때 그집에 딱 하나 있던 좁고 네모난 방 한구석에 떨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둘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시간 이상 나란히 누워 있던 기억이, 몇 십년이 지난 지금까지 선명할 따름.


영화를 보니 M이 보고 싶어졌다. 벌써 수년 째 연락을 하지 못했다. 아이 둘을 일찍 낳아 기르느라 항상 바쁘던 M과 나의 생활 패턴이 다르다 보니, 별다른 애를 쓰지 않고 무심코 지내다가 바뀐 핸드폰 번호조차 알려주지 못한 채 잊고 살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M을 보고 싶지 않다. 그 선명한 오후를 잃고 싶지 않다. 

이런 마음으로 보면, 자꾸 눈물이 나려고 하는 영화가 <월플라워>라는 생각이 든다.


*


또 다른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남자아이다.

전학생이었고, 대학생 형이 있어선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유행가를 오자마자 멋지게 불러 제껴서 아이들의 인기를 모았다.

여차저차하여 이 친구는 대학 신입생 때까지 드문드문 보았다.

그에게 나는 <건축학개론>에 나오는 첫사랑 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생각한 이유는 역시, 믹스테이프 아니 구운 씨디 때문이다.

자주 믹스테이프를 주긴 했지만, 내가 음악을 몹시 좋아한다는 건 그애도 알지만, 서른이 훌쩍 넘어 우연히 만나기로 했을 때에도 준비를 했을 줄은 몰랐다.

회사 일이 꼬여서 만나기로 한 시각보다 두 시간이나 늦었고 그애는 흔한 핸드폰조차 없는데 길에서 기다리고 있어, 무척 미안해했던 그날,

헤어지기 직전에야 건네주던 씨디 열 장.

내가 좋아했던, 좋아할 만한, 자신이 좋아하니까 공유하고 싶은 음악들이 빼곡이 구워져 있었다.

고맙다,는 말이 너무 쉽게 느껴져서 고맙다고도 못했다.

이 친구 역시 지금은 연락하지 않지만, 한편 보고 싶고 한편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든다.


영화가 시작되고 첫 음악이 나오자마자 OST를 사기로 결정했다. 

그러니 내게는, 이 모든 추억 돋는 에피소드를 다 배제하더라도, 충분히 매혹적인 영화.

주문을 넣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무척 행복하다. 예나 지금이나 난 참 단순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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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5-24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네 읽어보세요 치니님. 책에서도 음악 얘기가 나와서 무척 좋아요. 저는 어떤 음악은 찾아듣기도 하고 그랬으니까요. 이 영화는 책도 영화도 모두 좋은 케이스인것 같아요. 아 좋아 ㅠㅠ 치니님은 그런데 저만큼 좋아하시진 않을것 같아요. 횡설수설하지만, 여튼 좋아요. 하핫

저도 사춘기시절 믹스테이프를 만들어 곧잘 선물하곤 했어요. 사실 이십대 중반까지도 그랬는데 하핫, 전 이걸 싫어할 사람이 없을거라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좋은 노래고(내 기준이었는데!!), 성의가 들어갔다는 이유만으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로부터 믹스시디를 받고 아, 이게 싫을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받은 믹스 시디의 음악들이 하나같이 제 취향이 아니어서 말이죠. 아마도 그 때부터 믹스선물을 뚝, 끊은것 같아요.

암튼 치니님이 이 영화를 보셨다니, 그리고 서재브리핑의 제목만 보고는 이 영화에 대한 얘기일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흣), 반가워요! 후훗.

치니 2013-05-24 11:01   좋아요 0 | URL
주문을 넣고 다시 리뷰나 페이퍼를 훑어보는데, 다락방 님 글만 연이어 두 개! ㅋㅋ 뒤늦게 땡스투 눌렀는데 그렇게 선후가 바뀌어도 적용되는가 몰겠어요.

책을 읽다가 정말 좋겠다 싶으면 음악을 찾아듣는 거, 저 그거 되게 좋아해요! 히히, 이것만으로도 책을 읽어 볼 이유는 충분! 그리고 왠지, 다락방 님이 저는 다락방 님 만큼은 좋아하지 않을 거 같다고 한 이유도 알 거 같아요. ㅎㅎ

저도요, 저도. 제가 곧잘 선물할 때는 캬 - 이런 지극정성 선물을 누가 싫어하겠어, 그랬는데 별로 안 좋아하는 음악 섞은 걸 받고 보니, 아닐 수도 있겠구나 뒤늦은 깨달음이 오더라고요.
요즘은 음원을 메일로 보내주는 방법으로 공유하곤 하지만, 아무래도 실물이 만져진다는 의미에서 (제목이랑 가수 이름 이쁘게 적고, 프린트 해서 커버지도 만들고 그랬죠 ㅎㅎ) 옛날 방식이 더 정성 가득해보이는 건 사실인 듯.

이 영화를 과감하게 선택하여 보게 한 분 중에 1위는 다락방 님, 2위는 김봉석 평론가. 두 분이 좋다는 영화는 실패한 적이 없는 거 같아요, 믿고보는 다락방의 영화 추천. 흐흐.

치니 2013-05-24 11:06   좋아요 0 | URL
아, 글고 에즈라 밀러에 대한 얘기 대 동감이요! 압도적인 배우에요. <케빈에 대하여>에서도 그랬고, 앞으로가 기대 됨!

Forgettable. 2013-05-2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랑살랑한 글이네요. 좋다..!

치니 2013-05-24 11:04   좋아요 0 | URL
살랑살랑...해요? 휴, 다행이네요. 저는 쓰고나서, 영화는 안 그랬는데 제가 너무 딱딱하게 쓴 거 같아서 머리를 긁적이고 있던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