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그포르스, 복지 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GPE 총서 1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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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결국 또 다시 '실천'의 문제다.


수많은 철학자들, 정치학자들, 사회학자들, 경제학자들이 너도 나도 현상을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여 사회에 경고음을 울리고 그 경고음이 맞나 안 맞나 확인해본 뒤 또 다른 진단과 이념을 내세우는 일련의 과정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말'만 하지 않고 내려진 진단에 따른 처방전을 쓰고 거기 나온 약을 스스로 먹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우선 약의 부작용에 대한 주변의 우려를 잠재울 만큼의 용기와 추진력을 지녀야 한다.

당장 썩은 환부를 도려내는 것이 우선이지, 도려낸 후에 혹시나 재발하거나 새로이 지니게 될 다른 병에 대한 준비를 하는 것이 우선은 아니라는 점을 환자에게 (혹은 환자 주변인에게까지) 인식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썩은 부위가 어딘지 정확히 알고 도려낼 집도 의사도 제대로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과정이 '왜' 필요한지, 그러니까 원래의 목적이 무엇인지 주지하면서 치료하지 않으면 치료 방향이 엉뚱해질 위험이 있으므로 최초의 '이상적인' 목적을 견지하되, 그 중간에 '새로운' 몰랐던 지병이 나타나거나 처방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해도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또 다른 처방까지 해내야 한다.

이렇게 정리해보니,

참 어렵다. 갈 길이 멀다. 위험천만하다. 또 집도하는 의사나 의사가 근무하는 병원의 시스템이나 아픈 환자들이 모두 합심하지 않으면 절대 약간이나마 성공이란 것을 기대할 수 없겠다.

쉬운 비유로, 운동회 때 발목을 여럿이 묶고 달리는데 그중 단 한 명이라도 서두르거나 늦으면 달리기가 엉망이 되는 경험, 그리하여 맨 처음 라인으로 돌아가 새로 시작해야 하는 경험과 비슷하다.


스웨덴이라는 나라, 그 나라가 오늘날 어느 정도 위와 같은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복지국가'에 대한 위상이 요즘처럼 자주 수면 위에 드러나기 훨씬 이전부터 수많은 정책적 실험과 그에 따른 진보를 이뤄냈다고 평가받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중심에 누가 있는지는 잘 몰랐다. 하루 아침에 어디서 뚝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니겠으나 역사적 배경이나 중심인물들의 활약상을 잘 알지 못했다. 사실은 그저 부러워하기만 했을 뿐, 제대로 연구한 학자나 학계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는 이제 그저 부러워하기만 할 상황에 있지 않다.

치료가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응급 치료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데 좌고 우고 중도고, 누구나 동의하고 누구나 떠든다.

그 가운데서 서민들이 신음한다. 당장 밥벌이의 고단함이 태산처럼 몰려드는 나날이라 이런 정책 저런 정책 고민하고 투표하고 기다릴 새가 없다.

오늘날 이 책이 주목받을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비그포르스라는 인물이 거둔 업적이,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의 근본주의적인 모순을 해결했다거나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인 정책을 성공시켜서 복지를 이뤄냈다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책의 제목 그대로 '잠정적'이나마 유토피아를 꿈 꾸는 일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일생에 걸쳐 웅변해주기 때문이다.

서민의 꿈, 유토피아, 현실적으로 단순하다 - 밥벌이 하는데 잘릴 염려가 없었으면 좋겠고, 적어도 한 십년 일하면 내 집은 마련할 수 있었으면 좋겠고, 돈 없어서 결혼 못하고 돈 없어서 애 못 낳는 세상이 아니기를 바란다. 당연한 바람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이게 유토피아를 꿈 꾸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우리가 바라는 것 역시 단순하다 - 위에 열거한 바람을 실현하는 길, 그러니까 그 유토피아로 가는 길이 잠정적이라 해도, 이를 실현할 구체적인 '정책'을 내놓는 정당이 나타나는 것. 좌든 우든, 경험이 많든 적든, 많이 배웠든 못 배웠든, 그런 구체성을 갖추고 자신의 입신양명에만 눈이 벌개진 사기꾼들 말고 정말로 그런 정책을 실현하려는 배포와 의지를 갖춘 인물이 그 정당에 속하는 것.


그래서 감히 바라건대, (책 하나가 모두를 구원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정치인들이 이 책을 많이 읽었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과연 그분들이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시간이나 있을지. 내 불신이 너무 뿌리깊어 기대하기는 힘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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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09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님 읽으셨군요!
저는 끝까지 못읽었어요. 소모적인 생각들과 감정때문에요.
여튼 이책에 대한 이야기를 친구와 했었는데, 그 친구가 그러더군요.
<뿌리깊은 나무>에 나오는 전기준(?)이랑 제가 똑같다구요.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멀뚱거리기만 했는데, 드라마를 보지 않아도 그 인물이 갖는 특징을 대충 알겠더라구요. 짐작이니까 다를 수도 있지만 말이죠.
저는 확실히 대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 불특정 다수를 불신하는 것 같아요. 그 불신의 뿌리가 너무 깊어서....뭔가 희망적인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아요 ㅜㅜ

치니 2012-01-09 12:25   좋아요 0 | URL
아, 정기준. ㅎㅎ 글쎄요, 굿바이 님이 그렇다고는...제가 굿바이 님과 깊은 대화를 오프에서 나눠 본 바 없으니 뭐라 말씀 드리기 힘들지만, 똑같다고 까지는 생각하기 어려운데요?
흠, 어려운 문제이고 생각할 문제가 많은데, 지금 분명한 것은 이념 논쟁이나 하면서 시간을 보낼 여유는 없다는 점인 듯해요. 특히 진보나 좌파를 주장하는 분들 중에서 현실 정치를 할 때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느라 사소하지만 시급한 대책 마련에는 어물쩡 넘어가고 마는 경우가 왕왕 있는 건 사실이지 말입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대중을 불신한다기보다는, 대중운동을 하지 않는 정치인을 더 불신하고요. 결국 늘 하는 말대로 시스템이 문제인데, 이 책에 나오는 말처럼 그림만 맨날 그리기 보다는 그림은 그림대로 두고 계속 수정하면서 나아가는 게, 필요하면 이념이 다른 쪽과도 일정 부분 연대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굿바이 2012-01-09 13:16   좋아요 0 | URL
전기준이 아니라 정기준이군요 ㅋㅋㅋ 이제 귀도 잘 안들려요 ㅜㅜ

우왕~ '대중운동을 하지 않는 정치인'이라는 문장에서 한참 생각했어요.
역시 저는 다듬어야 할 구석이 많은 것 같아요.
여튼 올해는 좀 더 살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간절히 담대하게 행동하는 정치인들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저도 열심히 응원할 예정이구요 ^____^


웽스북스 2012-01-09 16:21   좋아요 0 | URL
전작과의 고리까지 생각하면 정기준-미실, 세종-선덕 의 계보를 잇는다고 대충 보면 되요~ 언니는 미실에게 많이 동조했으니, 당연히 정기준을 보면 언니가 떠오를수도. ㅎㅎ (저도 언니를 떠올렸다는 얘기) 그런데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세종이 훨씬 매력적으로 그려져서... 역시 연기력이 갑인가... 뭐 이런 생각을 ㅋㅋ

치니 2012-01-09 16:22   좋아요 0 | URL
앗, 그럼 우리 굿바이 님은 미실?!!! 오오.
근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요원 연기도 좋았어요. 고현정의 과장된 눈썹 치올리기를 별로 안 좋아해서리. ㅋㅋ

굿바이 2012-01-09 17:00   좋아요 0 | URL
친절한 웬디양의 보충 설명 고마워요 ^_______^

치니님!!!! 저 혼나고 욕을 먹어도 너무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이건 완전히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인데요...
여기서 행패를 부리면서 외치면
"저는 대중이 싫어요!!!!!!"
(이렇게 외치니 속은 시원한데, 꼴통같아요. 엉엉~)

치니 2012-01-09 20:39   좋아요 0 | URL
와아 굿바이 님,
제가 임금님 귀 당나귀 귀라고 외쳐도 들어주는(그리고 그 비밀을 간직해줄 믿음직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무척 좋아요!
'대중'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전제하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렴풋이나마 왜 싫다고 하시는지 짐작은 갑니다. 어서 이 책을 읽고 글로 더 자세히 알려주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