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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네
유동훈 글.사진 / 낮은산 / 2010년 11월
평점 :
책을 읽을 때 나는 대체로 책 날개에 따로 표기된 저자 소개를 먼저 읽고, 저자가 쓴 머리말을 읽고 내용은 보지 않은 채 맨 뒤 후기나 역자 후기를 본다. 그래서 새로 맞이한 책에 대한 첫 느낌(이것이 사실 내용을 읽을 때 잠재적으로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다고 믿는데)은 보통 저자 소개글에서 나온다. 그런데 유동훈씨의 저자 소개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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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스러져 가는 동네와 그 동네 이웃들의 삶이 안타까워 사진을 찍어왔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동네 골목을 다니며 조심스레 사진을 찍는데 '찰칵'하며 골목에 울리는 셔터 소리를 좀 무서워 하는 편이다. 늘 골목 이웃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게 하는 '찰칵'소리는 이십 년이 지났어도 좀체 적응되지 않는다. 그건 동네와 이웃들의 삶을 사각의 틀 안에 담고 싶다는 것이 어쩌면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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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이걸 읽고 무조건 이 책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그 동네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일상의 훼방꾼이 되기도 하는(데 본인들은 그런 줄 모르는) 수많은 디카 족들이 유동훈씨처럼 그 소리를, 그 깔깔댐을, 그 발자욱 소리를, 그 들이댐을 '좀 무서워' 했으면 하고 바란 적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상대의 마음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에게 '작품'이 될 것 같으면 찍어버리는 건, 내게는 폭력의 일부로 보인 적이 많았다. 설사 그 대상이 말 못하는 버려진 아기 고양이일 지라도. 어쩌면 이래서 나는 예술가가 못 되는지도 모르지만. 그런데 이 사람, 무섭다고 했고 욕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래서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져서 사진 한 장, 글 한 편을 차례차례 넘기기 시작했다.
사진 속에는 남루하기 짝이 없는, 그래서 이 시대 휘황찬란한 디자인 뭐시기를 꿈꾸는 저 높은 분들이 보시기에 못마땅하기 짝이 없을, 가난한 동네의 스러져가는 건물과 지저분한 길과 그 인생이 막바지에 다른 거 같은 노인들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하얗게 빛내주는 찬란한 아이들이 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가 있다.
나는 한번도 이런 동네에 살아보지 않았고, 찢어지는 가난을 모른다. 그리고 여기 나오는 사람들처럼 구석구석 남의 집 사정을 잘 알고 길 아무데서나 모여 앉아 국수를 나눠 먹는 것 같은 친밀함도 내심 좋아하지 않는다. (오히려 귀찮아 한다) 그래도 나는 그들에게 섣부른 동정이나 연민으로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삼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글을 보니 나는 한참 더 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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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되면 이곳은 한동안 홍역을 앓는다. 방송국 헬기가 동네 하늘 위를 돌며 구경거리를 찍어 대고 무슨무슨 기업의 직원들은 '사회봉사'라며 기업 로고가 선명한 울긋불긋한 형광색 조끼를 입고 동네를 누빈다. 동네 골목을 막고 한 줄로 서서 연탄을 나르고, 한 집을 골라 전시용 페인트칠을 하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다. 어떤 이들은 이곳의 삶을 박제화해 박물관을 만들자는 정신없는 소리를 해 대기도 한다. '지금 여기'를 살고 있는 사람을, 그 삶을 구경거리로 만드는 것은 폭력이다.
웃음 띤 얼굴로 햇볕 아래 자연스레 사라지는 첫눈은 슬플지라도 의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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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정작 그사람이 '어떤' 도움을 원하는지, 아니 그보다도, 도움을 정말 원하기나 하는지 물어볼 생각도 하지 않는 우리들 중에 내가 있었던 적은 없는가. 가슴에 손을 대고 생각해보았다. 있었다. 물질적인 것만이 중요하진 않다고 하면서도, 정작 남루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언제 가장 재미지고 행복한지 별로 궁금해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미디어를 통해 다큐멘터리, 이웃에게 사랑을 따위를 보면서 음 나도 도와야 하는 걸까, 저울질만 했다. 욕하셔도 좋다. 나는 욕 먹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눈물이 자주 고이는 상태에서 본 사진들이, 자꾸 흐릿해지곤 했지만 내내 참 고왔다. 조심스러운 작가의 찰칵 소리마저도 부드럽게 필터링 된 것 같았다. 사진이라곤 쥐뿔도 아는 게 없지만, 이 세상의 많은 사진작가들이 이 분의 마음가짐을 갖고 사진을 찍는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