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눈치 챈 분도 있겠지만 그래도 굳이 밝히고 싶다, 저 제목은 알라딘 니나님의 서재에서 이 글을 읽고 지은 제목이라는 것을. 

나는 어릴 적부터 고통에 유난히 약했다. 어떻게 아느냐고?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계산법을 누구보다 빠르게 본능적으로 익힌 걸 보면 알 수 있다. 

삼남매 중 막내였던 나는, 오빠들에게는 엄격했지만 나에게만큼은 막내라는 프리미엄과 유일한 여자아이라는 수퍼프리미엄 덕분에 늘 이뻐라 하기만 하는 - 그래도 어렵고 어색하기는 하지만 - 아버지와, 아이들을 매로 다스리는 걸 전혀 달가와하지 않는 열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 같이 혼이 나야 할 때도 있는 법. 그런 순간 나는 다람쥐처럼 엄마의 빗자루 매 손길을 귀신같이 피해 도망을 쳐서, 나중에는 따라다니다가 웃음이 나버려 때리기를 포기했다고 하니, 아마 부모에게 한 번도 맞은 기억이 없다는 내 기억이 맞을 거다. 

그래서였을까. 이후에 내가 몰랐던 폭력들을 하나 하나 마주치게 될 때마다 나는 겉으로 의연하고 담대했다. 엄마 아빠에게도 티를 내지 않았고, 어느 선에서 잊어야 할 지를 재빠르게 계산해서 잠재의식까지도 그렇게 바꿔 버렸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윽고 어른이 되자, 물리적인 폭력이나 고통보다 더 무서운 것은, 나 자신의 마음/정신에서 우러나오는 고통이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이것들을 뇌 어딘가에 숨어 있을 비밀장소에 숨기고 손을 털고 담담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어리석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런 내게, 망각이라는 인간의 본능이 유용하게 작용하여 케세라 세라 즐기며 잘 살 수 있을 거라 부러 순진함을 가장하면서, 인생을 우습게 봤다. 

'시련의 의미'라고? 일생동안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 작가가 말했듯이, 시련을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는 것이 좋겠지만 시련이 왔을 때 그것을 또 다른 삶의 구체적인 의미로 승화 시킬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역시 작가가 여러 번 반복하고 있듯이, 그런 사람은 극.소.수. 나는 평생을 극소수가 아니라 대다수에 속하며 살아왔는데.  

삶이 나에게 의미를 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삶을 의미있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주된 요지라는 건 알겠다만, 내게 아직 삶은, 의미/무의미를 떠나서 온통 뿌옇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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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illyours 2010-08-30 15: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놓고 침대 밑에 모셔둔 지 일주일.
음. 왠지 용기가 필요한 책.

치니 2010-08-30 15:47   좋아요 0 | URL
음, 개인적으로는 프리모레비의 <주기율표>가 더 마음에 오래 남았어요, 수용소 경험에 대한 회고만 보자면요.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같은 경험을 해도 누군가는 90이 넘어서까지 희망을 전도하면서 살고, 누군가는 (그러니까 프리모레비는 ㅠ) 자살했을까, 그 궁금증이 결국 해소되지 않았어요.
제게는 읽고나서 용기를 얻는 쪽은 당연히 빅터 프랭클의 책인데 공감은 어쩌면 - 잘 모르는데도 불구하고 - 프리모 레비 쪽인 거 같기도 해요. 암튼 moon님, 용기 내셔도 될 듯. :)

다락방 2010-08-30 16:12   좋아요 0 | URL
프리모 레비와 굳이 비교를 하자면 저의 경우에는 치니님과 좀 다른데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는 '누군가의 이야기' 같았어요. 감정이입 되는 순간도 있고 멀찌감치 떨어져서 볼 수도 있는 어느 누군가의 이야기.
그런데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바로 '나의 이야기' 같았어요. 이건 모든 책이 그렇지만, 순전히 개인적인 것인데, 니나님의 서재에도 적었고 또 제가 홈피에 리뷰를 쓰기도 했었지만, 이 책을 읽고서야 비로소 저는 제가 이렇게 그냥 살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됐거든요. 끊임없이 나는 문제가 있어 나는 정신병일거야 라는 생각을 해오고 있다가 이 책에서 그걸 어떻게 알고 너처럼 걱정하는 사람이 있지만 괜찮은거야, 라고 말해주는 기분. 그랬어요.

치니 2010-08-30 16:25   좋아요 0 | URL
네네, 다락방님의 리뷰를 책 다 읽고서 다시 읽어보고, 왜 그렇게 좋아하셨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저라도 그랬겠다 싶어요. 저는 좀 다락방님이랑은 반대의 사람. 그러니까 말하자면, 끊임없이 나는 문제가 있어, 라고 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나는 문제가 없어, 라고 하는 거죠. 이게 바로 문제인 지도 모르는데! ^-^;

다락방 2010-08-30 16:34   좋아요 0 | URL
응..뭔지 알것 같아요.(격렬하게 끄덕끄덕)

다락방 2010-08-30 16: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레미파는 정말 ㅠㅠ 멋져요! 좋다고 하니까 막 사서 읽고 리뷰도 올라오고. 이런 멋진 여자사람들 ㅠㅠ

도레미파는 같은 책을 읽어요. 이 책은 웬디양님만 읽으면 백프로인데! 흑흑.

치니 2010-08-30 16:26   좋아요 0 | URL
ㅋㅋㅋ 이렇게 말씀하시니까 우리 막 조폭 같다, 짜릿해요. 한 명이 하면 쫙 다 해야 하고 막 이런 조직의 룰 같은 거를 느끼니까.

니나 2010-08-30 16:29   좋아요 0 | URL
도레미파라니, 아 난 천재같아요 ㅋㅋ (혼자 자뻑하고 돌아가는 ㅁㄴ양)

치니 2010-08-30 16:31   좋아요 0 | URL
안 그래도 천재라고 그러고 있는 참이에요, 나 혼자. ㅋㅋㅋ
게다가 천연덕스럽게 ㅁㄴ양이라고 쓰고 있는 거 봐요. 아유 참.

니나 2010-08-30 16:39   좋아요 0 | URL
암요. ㅋㅋ 천연덕스럽지 않고서야. ㅋㅋ 근데 천재라면서 나도 뿌옇기만 해용. 빠직!

2010-08-30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30 17: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미녀 2010-08-30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퇴근 30분전 대박삽질 ㅋㅋ

치니 2010-08-30 18:01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이제 퇴근이에요!!!

차좋아 2010-08-31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이군요 음... 사실 어제도 봤어요 히히 전 화제의서재 글 위주로 보거든요.
글을 읽어보니 프레모레비,<이것이 인간인가>가 떠오르느데 어젠 <주기율표>가 언급이 됐던것 같아요. 아 위 덧글에도 그렇고.
그러니까 <죽음의 수용소>는 수기가 아니라 소설인가보군요. (응? 난 왜 수기라 생각했지..)ㅎㅎ

치니 2010-08-31 13:30   좋아요 0 | URL
<이것이 인간인가>는 못 읽어봤어요. 제가 읽은 건 <주기율표> 뿐이라서 어제는 그 이야기만 한 거고요. ^-^;

이 책은 예상하신대로 수기에 가까워요. 그렇지만 완전히 수기라고 하기엔 맞지 않는 구석이 있고, 음, 치유의 에세이라고 해두어야 할까요. 자신의 경험담과 정신과의사로서의 조언이 모두 들어 있거든요.

chaire 2010-08-31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 이 책의 제목만 봐도, 왠지 참 싫다, 하는 기분이 들어요.
죽음의 수용소, 라는 말 자체가, 원래는 은유인데 은유처럼 안 느껴진달까요.
고통에 대한 어린 시절의 기억... 공감공감..^^

치니 2010-08-31 17:44   좋아요 0 | URL
제목은 아무래도 출판사에서 좀 더 확실한 표현을 위해 바꾼 거 같아요. 원제는 '삶의 의미를 찾아서'인가 그랬거든요. 너무 밋밋하고 눈에 띠지 않는 제목인지라...^-^;
chaire님도 어린시절에 그랬어요? 흐. 왠지 위안이 되네요.

chaire 2010-08-31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뇨. 저는 도망가지도 못할 정도로 무서워서 무방비 상태로 뒈지게 맞다가,
맞고 나서는 눈을 부라리며 복수를 다짐하는 꽈였어요.

하지만 마음 저 아래바닥에서는 어쨌든 맞는 고통, 타박상과 피에 대한 공포가 있었다는 데서 공감이 간달까... ㅋㅋ

치니 2010-08-31 18:02   좋아요 0 | URL
아...제가 잠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오해를 했군요.
그래도 저보다는 용감하셨던 모양입니다. 저는 무조건 내빼는 겁쟁이 체질.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