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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축복이 있기를, 로즈워터 씨
커트 보네거트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나는 지금 로즈워터군에 가 있다. 도시의 각박함에 시달릴대로 시달린 상태에서, 모든 기브앤테이크 식 인간관계에 넌덜머리가 난 상태에서, 인간이란 존재 자체에 환멸을 느끼면서, 내가 사는 세상에서 더 이상 희망 따위 읽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누구보다도 이런 생각을 하고도 살아 있는 나 자신이 가장 끔찍하게 싫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멀리 공중전화 부스를 보고 마치 이제 막 마음을 정했다는 듯이,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바쁘게 그 쪽으로 걷는다. 예상대로 부스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굵은 글씨로 전화기 아래 그의 전화번호와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친절한 글귀가 보인다.
나는 로즈워터 재단에 전화한다. 동전을 가득 올려놓고서.
아! 보네거트씨다. 아니 로즈워터씨인가. 아무튼 재치있고 상냥한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앙칼지게 동여맸던 마음 밧줄이 스르륵 풀린다. 역시, 예상대로이다.
'아, 보네거트씨, 아아 아니 로즈워터씨, 저는 .... 지구에 있는 한국, 한국에 있는 서울에서 지지리 궁상으로 살고 있는 치니입니다. 아아 보네거트, 아아아 아니 로즈워터씨. 죄송해요 자꾸 이름을...'
로즈워터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한다. 이름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니 걱정 말라고. 이름보다 중요한 것이 세상에는 아주 많다고. 그래, 내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고. 나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던 질문을 하려 하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너무 많아서 말할 수 없고, 또 어쩌면 아무리 생각해도 필요한 것 따위는 없어서 말하기 힘들다. 그러기를 한참, 로즈워터씨는 내게 언제라도 좋으니 생각이 나면 다시 전화하라고 한다.
나는, 내가 인간의 고귀함을 알게 되었을 때, 적어도 질문할 자격이 생겼을 때, 다시 전화하리라 마음 먹으며 그가 여전히 언제라도 전화를 받아줄 거라고 굳게 믿는 스스로가 조금 기특해서 그제야 살짝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