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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콜로지카 Ecologica - 정치적 생태주의, 붕괴 직전에 이른 자본주의의 출구를 찾아서
앙드레 고르 지음, 임희근.정혜용 옮김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언젠가부터 유토피아라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고 진부한 책장 한 귀퉁이에 처박혀 있는 사어(死語)처럼 받아들이게 된 사람은 비단 나 뿐일까, 라는 생각을 한다.
어릴 때부터 우리들의 일용할 양식과 교육을 위해, 나아가서는 더 좋은 직업을 구해 돈 잘 벌게 하기 위하여 뼈 빠지게 일한 부모님들을 보고 자란 우리 세대가, 남들보다 특별히 잘난 직업을 갖지는 않더라도 어딘가에 ‘고용’되어 ‘노동’하고 있으면서 제 입에 풀칠을 할 뿐 아니라 ‘나만의 특별한’ 상품을 내 것으로 하는 ‘소비’에서 희열을 느끼고 다시 그 욕망의 사슬에서 쳇바퀴 돌면서도 이 욕망이 우리 본연의 욕망과는 다른 ‘강요된’ 욕망이라는 사실을 망각하면서,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는 더욱 더 가열찬 경쟁의 필요성을 아무렇지 않게 들이대놓고 미친듯이 공부하고 일하게 하면서도 정작 그들에 대한 ‘정상적인 고용’ 자체가 불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놓은 이 상황을, 모두 ‘체계의 문제’로 돌려버리는 것이 왠지 꺼림직했던 사람 역시 나 외에도 많을 것.
자, 그런데 너무 자책하지 말아라. 아무리 따져보아도 네 탓 내 탓이라기보다는 이놈의 자본주의 탓이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그리고 머리를 맞대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조금만 이기심을 버리면, 자본주의의 퇴조에서 나아갈 출구가 조금은 덜 막연하게, 완전한 붕괴 위에 새로운 희망으로,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지도 모른다. 이것은 예의 유토피아를 목표로 하는 이상주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자. 이상주의가 이상적이기는 해도, 굳이 안 될 건 또 뭐람.
지금 자본주의를 욕하는 사람들 역시 인간이고 자본주의를 만들었던 사람들도 당연히 인간이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 모두가 말 그대로 공범이다. 이 인간들이 자신들이 보다 더 잘 살기 위해 또 다른 노력을 시도하지 못하리라는 법은 없다. 해봐야 어차피 안 될 거라고 예단하는 패배주의로 전락하거나 이런 책들이 주는 자극을 예민하게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나이브 하다고 냉소하는 사람들이 저자의 유토피아 계획에 반대하는 사람들보다 더 위험하다는 점을 뚜렷이 인식하기만 하면 말이다.
저자 앙드레 고르는 살아생전 특유의 통찰력과 예리함으로 자본주의의 부조리를 미리 꿰뚫고 대안을 가열차게 세웠지만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 도린을 따라 저 세상으로 갔다. 하지만 이 책 안에서 그와 생각을 같이 했던 사람들이 있고 분명히 어딘가에는 계승하고자 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가 2007년에 예언한 미국 금융위기로 인한 세계 경제의 거품 붕괴와 위기는 정확히 맞아 들었다. (책 속에서 한국과 일본의 산업주의에 대한 설명이 예를 들기 위해 반 페이지 가량 나오는데, 솔직히 장하준이 길게 쓴 ‘나쁜 사마리아인’의 예들이 굳이 필요했나 싶게 간단명료하면서도 핵심을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자본주의는 그 끝을 향해 달리고 아래는 절벽일 것이 예상된다. 뛰어내린다면 이왕이면 더 좋은 자리로 폭신하고 우아하게, 고르의 정치적 생태주의를 받아들여보는 것이 아주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나는 (어떤 이에게는) 무지몽매하게 좌파의 선동에 쥐락펴락되는 대중의 하나로 보일 지도 모른다.
그가 펼쳐보이는 이상적인 사회의 청사진은 일반적인 의미의 유토피아라고 하기엔 무척 구체적인 반면, 실현 가능하거나 예측 가능한 체제라고 하기에는 이상적일 뿐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꾸준한 노력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져야 가능할 것 같아 보인다. 그래도! 될 수만 있다면, 스스로 노동할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누군가의 지시로 일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한 뒤 자유롭게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며 모두에게 생계수당이 주어지는 사회, 그 사회에 살아보고 싶지 않은가? 라고 자문했을 때 예스!라고 답할 수 밖에 없다면 까짓 한 번 해볼 만 하지 않은가, 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준 이 책은, 흥분되거나 격앙된 어조 하나 없이 단정하게 논리적으로 씌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읽은 책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선동적’이다.
덧. '신자유주의'니, '세계화'니, '탈성장'이니, '정치적 생태주의'니, ...이런 단어들을 이런 저런 기사와 책들 속에서 아무리 읽어봐도 점점 더 혼란스럽기만 하더니만 이 얇은 책 한 권 읽고 나서 머릿 속이 깔끔하게 정리된 기분입니다. 이미 알찬 내용을 떠나서도 문장력 역시 최고인 앙드레고르와, 그것을 정갈하고 자연스럽게 번역해주신 두 분 번역가들의 진지한 자세와 노고 덕분이지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