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간 수컷은 필요 없어 ㅣ 지식여행자 5
요네하라 마리 지음, 김윤수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이미 몇 번 이 서재에도 언급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읽고나니 다시 한번 내가 애견인이 된 역사를 정리하고 싶어진다.
때는 지금으로부터 약 8-9년전. 아이는 당시 만7세. 우리는 영국의 조그만 마을에서 전화 모뎀으로 겨우겨우 페이지가 넘어가는 화면을 힘겹게 들여다보며 개 사진들을 구경했다. 아이는 외동이지만 동생을 낳아달라는 둥 떼를 쓰거나 자기 또래보다 나이가 어린 애들을 유난히 귀여워 하는 식의 외로움을 타지는 않았는데도, 유독 개만은 키우고 싶어했다(아니, 갖고 싶어했겠지). 우리는 그 곳이 영국이고, 그 집도 우리 집이 아니고 1년 후면 나는 한국으로 돌아오고 아이는 기숙사에 들어가니 개를 키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체념했지만, 언제고 심심하면 개 사진들을 보고 또 보면서 어떤 종류가 좋을 지를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짓을 취미생활처럼 오랫동안 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 아이는 한국으로 돌아왔고 또 다시 개를 언급했다. 아이는 별로 탐탁해하지 않는 제 아비를 설득하고 오랫동안 찜 해두었던 래브라도 리트리버 종을 찾아 여기저기 농장들을 써치 하면서 몇개월을 보내다, 어느날 대구로 가서 지금 키우는 '두리'를 데리고 왔다. 한 밤 중에 버스 짐 칸에서 4-5시간을 꼼짝도 못하고 낯설은 어둠 속에 두렵고 힘들었을, 겨우 3개월 된 아가 두리를 집 안 욕조에 내려놓고 아이는 궁금해 할 나에게 핸드폰으로 이런 사진을 보내주었다.
이 때부터였을까. 이 눈빛, 오무린 발, 축 늘어진 귀, 언제나 어디서나 내 목소리 내 모습만 느껴지면 미칠 듯이 달려오는 간절함, 아무리 밀쳐내도 어떻게든 우리가 자는 침대 위에 비비적 거리고 들어와 곁에 누워버리는 친밀함과 뻔뻔함, 간식을 줄 때 유난히 얌전해져서 앉아 소리를 하지 않아도 앉아서 기다리기도 하지만 그토록 먹고싶은 간식을 눈 앞에서 보여주다가 이내 걷어버려도 원망 하나 하지 않고 또 애교를 부리는 천진함, 그 큰 덩치로 치와와처럼 작은 개가 짖어도 무서워서 도망가던 소심함, 그리고 인내심.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주인에 대한 사랑. 이 모든 것들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느낌을 준 때가, 그러니까 정말로 인간 수컷이 주는 위로보다 이 작은 생명이 내 곁에 있기만 한 걸로도 더 큰 위로를 받는다는 걸 깨달은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마리 여사가 그렇게 이른 나이에 죽지 않았다면 인간 수컷도 꽤 좋은 면이 있다는 걸 알 기회가 있었을까. 글쎄, 조금 어려웠을 거 같다. 이 책에 나오는 마리여사의 고양이 사랑과 개 사랑을 보면, 이미 작가는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인간과 누리는 사랑보다 훨씬 크고 깊은 사랑을 흠뻑 취하고 간 것 같으니까, 나이가 들수록 더욱 더 아쉬울 일이 없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