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의 모 님 서재에서 며칠 전 (남들처럼) 나도 당할 뻔 하다가 '극적으로' 걸리지 않은 메신저 피싱 사기에 대한 수다를 떨다가, 혹시라도 아직 모르시는 알라디너도 있지 않을까 하는 오지랍 우려 때문에 알려드리고자, 혹은 토요일 오전 당직의 심심함을 달래고자, 몇 자 끄적여봅니다. :) 

S양과 저는 고교시절부터 아주 가까운 사이라, 며칠 연락이 안되거나 하면 걱정을 할 정도로 연락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좀 과장하면 서로 집 부엌에 무슨 무슨 과일이 있고 숟가락은 몇 개이고, 이런 자잘한 것들까지 아는 관계랄까요. 그래서, 웬만하면 쪽 팔려서 안할 것 같은 금전적인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도 꺼리낌 없이 해왔죠.  

이런 관계에 있는 S양이, 그날도 오전에 메신저로 몇 마디 나눈 차에, 오후가 되자 갑자기 급하게 돈 부칠 일이 생겼는데 그만 집에 usb도 두고 오고 회사에서 나갈 시간은 없고 하니, 저더러 대신 부쳐달라, 낼 바로 돌려주겠다 하는 것입니다? 

살갑게 'ㅇㅇ 야' 라고 이름도 먼저 불렀고, 웃음 이모티콘도 날리면서, 평상시 제가 아는 S양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어요. 로그인과 로그아웃을 반복하는 걸 보니, '음 역시 뭔가 되게 급한 일이 있구나' 싶었지 이것이 그녀의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해킹하느라 겹 로그인(즉, 진짜 S양도 로그인 되어있고 그분들도 로그인 되어 있으니 S양이 에이 메신저 왜 이래 하고 로그아웃 하지 않는 이상, 자꾸 왔다갔다 할 수 밖에 없었던)인 줄은 전혀 몰랐어요. 

그녀가 서두르니 저도 마음이 괜시리 덩달아 급해져서 '왜' , 그리고 '누구'에게 부치는 것이냐는 질문은 하지도 않았어요. 우리 사이에 그런 걸 일일히 따지고 부쳐주면, 너무 야박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런 건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 해 줄테니 그 때 들으면 되는 거죠. 

그리하여 일은 1분 안에 착착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저는 마침 usb가 있었고 그녀에게서 구좌번호와 이름을 받았고. 금액은 지금 '니 잔고에 있는 만큼 전부' 일단 부쳐달라고 하더군요. 모자라는 것은 자신이 채울테니 그것만이라도, '급하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어요. 부치려고 하다보니, 이거 제 이름으로 부칠 게 아니라 그녀의 이름으로 바꿔 부쳐야 하지 않나 싶어서, 재차 물어본 거죠. 혹시 돈을 받은 상대가 이름 때문에 못 받았다 하면 곤란해질 것 같아서 물은 것인데, 이 때부터 그녀는 '응 알았어' 라는 답 밖에 할 줄을 모르는, 평소와 달리 무척 천치 같은 태도입니다? (평소 S양은 언어의 마술사죠. 아무렇게나 말하는 법은 없습니다, 급하면 말이 더 정확해지는 사람이에요) 

그때서야, 언젠가 다른 블로그에서 읽은 피싱 이야기가 후다닥 떠오르고, 전화를 해봐야겠다 싶었어요. 전화를 안 받아서 그녀가 다니는 회사에 연락하니 전화를 받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다는군요. 당연히 메신저를 하고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제 통장 비밀번호나 주민번호 등을 알려주지 않아서 통장에서 잔고가 빠져버리진 않았지만, 은행에서는 범죄 예방을 위해 상대방이 알려준 계좌를 신고해달라더군요. 음, 하지만 저는 이미 창을 닫아버려서 사회에 이로운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요. 

일련의 사건은 이랬습니다.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지금부터입니다. 

당할 때는 어이없고 가슴이 덜컹 했다가 휴 다행이네 정도의 감정만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고보니 므흣해지는 구석이 있는 사건이지 뭡니까. 저와 S양의 믿음과 신뢰가 확인되었달까요. (그 방법이 비록 안타까운 이 사회의 어두운 면을 보여주지만서도) 어떠한 상황에서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그녀가 필요할 때 SOS를 청할 누군가가 있다는 건, 피싱을 당할 지라도 참 든든한 일이 아닐까 해서 솔직히 약간 기분이 좋았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사기를 당하려고 했다는 사실이, 무조건 멍청한 일만은 아니지 않나, 에이 사람 사는 세상 사기도 당할 수도 있지 뭐, (이건 이미 안 당했기 때문에 ㅋㅋ) 대범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더란 말이죠. 역시 사람, 참, 간사해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는 이 생각이 확장되어서,  

그렇다면 저와 S양과 같은 관계 말고 다른 관계들은 어떤 반응들이 나왔을까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오래전에 헤어진 연인인데 잊지 못해서 메신저 삭제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런데 그/그녀가 갑자기 예전처럼 다정하게 'ㅇㅇ 야' 하면서 안부를 묻는다면, 그런데 안부를 묻자마자 급하다면서 돈 이야기를 꺼낸다면, 그렇다면...그 메시지를 받은 그/그녀의 마음은 어떨까. 이거 이거 글 잘 쓰는 사람이면 꽁트 정도의 소재는 되지 않을까요? ^-^; 

건조한 저는 어떠한 경우에도 아무리 친해도 비밀번호는 갈쳐주지말자, 로 이 글을 마무리하지만, 상상력이 보다 풍부하고 맛갈나는 글솜씨를 가진 알라디너분들이 이와 관련해서 재미난 글 하나 써주시면 좋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 헐거운 토요일 아침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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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9-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게요. 저도 메신저들 비밀번호좀 바꿔놔야겠어요. 이니나양도 후배가 말을 걸어서 전화해봤다고 하더라고요. 그거 은근 리얼하더라며. ㄷㄷ

치니 2009-09-13 16:07   좋아요 0 | URL
네, 안그래도 니나님도 당한 거 보면서 이거 아주 대유행이구나 싶더라구요.
허허 참, 살벌한 세상입니다.

마노아 2009-09-13 0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찔함과 훈훈함을 동시에 보여준 에피소드군요. 그런데 정말 사기당했으면 훈훈함으로 안타까움을 못 덮었을 것 같아요ㅠ.ㅠ 아무튼 잘 끝나서 다행이에요.^^

치니 2009-09-13 16:08   좋아요 0 | URL
그러게말여요, 훈훈함은 안 당해서 겨우 챙긴 거구, 당했다면 돈도 돈이지만 그 번거로움을 어쩔 뻔 했나 싶습니다. ^-^

마늘빵 2009-09-13 14: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익후. 저도 연락 끊긴 친구가 갑자기 돈 부쳐달래서 - 메신저로 - 이상하다 생각해서 일단 전화를 했더니 피싱이더라고요. 지금도 그 친구 메신저 제목은 "네이트온 사기 조심하세요"입니다. -_-

치니 2009-09-13 16:09   좋아요 0 | URL
역시, 아프락사스님은 저보다 야무지시네요. 일단 전화를 해보는 생각을 하셨으니. ^_^ 제 친구 메신저 제목도 같은 거에요. ㅋㅋ(거기에 더해서 '저 돈 빌릴 일 없습니다'도 써놨죠. ㅋㅋ)

동탄남자 2009-09-13 17: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행입니다. 얼마 전 제가 마누라 아이디 해킹에 당할뻔한 수법과 비슷하군요.
오래도록 외국 생활을 하고 돌아오는 주재원이나 교환 교수처럼 나름대로 똑똑하고 경제적인 문제도 어느 정도 선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입국과 동시에 보이스 피싱의 목표가 되기도 합니다. 아예 금액이 노골적으로 크고, 신용카드 발급과 비밀번호 노출 등을 이유로 접근하는데, 금액도 수 천만원씩 빼가버리더군요. 그런 걸 직간접적으로 지켜봤는데, 당할 땐 정말 모두 바보가 되는 기분입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V

치니 2009-09-14 09:1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사실무근님, 제 서재에서 처음 뵙네요. 반갑습니다.
어휴, 저 말고도 이래저래 당하신 분들이 많았군요.
평이한 일상에서도 항상 긴장을 늦추지 않고 조심조심 살아야 한다는게, 절대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조심해야해요. 흑.

또치 2009-09-14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 가슴을 쓸어내리게 되네요.

치니 2009-09-14 13:25   좋아요 0 | URL
가슴도 쓸어내렸지만, 이 나이 먹도록 아직도 속는구나 생각하니 허탈하기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