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언하건대,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담배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 시절에 담배를 손에 대보지 않았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었다. 요즘은 아닐테지만, 당시 분위기에서는 여자가 담배를 피운다는 일이 마치 엄청난 금기를 깨는 일처럼 여겨졌다. 청소년들은 모든 금기를 깨고 싶고, 어려운 금기를 깨면 멋져 보인다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수순에 따라 너도 나도 담배를 물어보는 꼴이 영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내가 처음 담배를 찾아 나선 건, '멋있게 보이고 싶은' 이유보다 더 하찮은 '고통으로부터의 도피'를 위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대학 입시에 떨어진 것이다. 태어나서 뭘 크게 시도해보지도 않았지만 시도해서 떨어진 경험도 별로 없는 우리들은 지금 생각해보면 우스울 정도로 그 사실에 낙담했었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낙방 소식을 듣자마자 방에 틀어박혀 한 생각은 가장 반항적인 포즈로 이 마음의 고통을 떼우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을 게다. 집에는 대학에 다니던 오빠가 둘 있었으니, 그들의 서랍을 뒤지면 솔 담배 한 개피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내 예상은 들어맞아 담배를 쉬이 찾아내고, 조그만 창문을 있는 힘껏 열어제친 뒤 추운 겨울 바람과 담배 연기를 거푸 마셨다. 창문에 대고 피워야 하는데 높은 위치였던지라 밑에는 의자까지 대고 용의주도하게 피워댄 것 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싸 첫 담배가 그리 어지러운 거라는 정보는 몰랐던 바, 보기좋게 의자에서 나가 떨어지고 팽팽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아픈 엉덩이도 동시에 부여잡아야 했다.
여성의 흡연이 무조건 싸가지 없는 태도로 무시 당하고 억압 당하던 시기였기에(당시 한 대학에서는 학생식당에서 자장면을 먹은 뒤 담배를 피던 여학생을 보던 선배 남학생이 자장면을 여학생 얼굴에 퍼부어 버린 사건도 있었으니 ㅉㅉ) 대놓고 피우기보다는 까페에 들어앉아 줄담배를 피우거나 소위 운동권들이 모인다는 골방이나 동아리방에서 피우는 것이 대세였다. 꼴같지 않게 멋내는 것을 비웃던 내 얄팍한 자존심에는 이것도 영 마음에 들지 않는 상황. 입시 낙방 때 첫 담배를 물어봤지만 이후 3년간 피우지 않은데에는 그런 사회적 이유만 있었을 뿐, 지금처럼 건강을 생각하여 자제하는 쪽은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대학 3학년 때 갔던 프랑스에서 상황은 대반전 되었다. 지금이야 그 나라 역시 금연 정책을 펼치는데서 남의 나라 반 만큼은 쫓아가고 있지만서도, 당시에는 그야말로 흡연 천국이었던 것이다. 남녀노소를 가리는 게 당연히 촌스러울 뿐 아니라, 누구를 만나도 첫 인사는 '담배 하나 줄까'였을 정도니, 뭐 말 다했다. 아침에 등교를 하려고 집을 나서면 카페가 많은 거리 근처에는 밤새 사람들이 버린 꽁초가 거짓말 안하고 가을 낙엽보다 더 많아서 청소부들은 그걸 쓸어내기 바빴는데 원래 깔끔 떠는 것보다는 수다 떠는 걸 좋아하는 그 나라 국민들은 그런 부분에는 전혀 괘념치 않고 또 다른 담배에 불을 붙이는 것이었다.
멋내는 건 싫다고 해놓고, 결국 나는 잔뜩 멋이 들어가버렸다. 길을 걸으며 파리지엔처럼 담배를 한 손에 들고 피다가 봉주르 인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외국어로 수다를 떨면서 꼴갑을 떨었던 것이다. 하나 둘 얻어 피우다 감질이 나서 내 손으로 처음 산 담배가 하필이면 '지딴'이라는 가장 센 담배 - 거의 시가를 방불케 하는 - 였는데 그 때의 민망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지딴' 한 갑으로 담배마다 강도의 차이가 있다는 걸 배우고 난 뒤에는 말보로 라이트를 주로 피워댔는데, 한국에 돌아오니, 예전의 억압은 덜해졌지만 양담배를 피우면 매국노라는 인식이 대신 자리를 잡고 있어서 억울하게 디스를 피웠던 기억도 있다.
그리하여 근 20년이다.
한번도 담배를 끊어야겠다는 새해 결심 같은 걸 해보지도 않았고, 담배 때문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해 본 적도 없다. 애연가라고 할 만큼 담배 없으면 못살아 라는 타입도 아니지만, 밥 먹었으니까 한 대, 화장실에서 볼 일이 잘 안되니까 한 대, 커피 냄새가 그윽하니까 한 대,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기 위해서 호흡을 고르느라 한 대, 지루해서 한 대, 술이 취해서 한 대, 이런 식으로 담배를 피우는 이유는 '멋 내기 위한' 것만 빼고는 무수하게 늘어가기만 했다.
그러니 아래와 같은 책을 읽었을 때의 내 감흥은 한 마디로 '그럭저럭'이다.
담배 하나 가지고 무슨 호들갑이 이렇게 많은가 하는 의문이 들다가도, 소설가가 담배 아니라 그보다 더 소소한 걸 가지고 소설을 쓰더라도 그것이 잘못은 아닐진대 나야말로 왜 괜시리 삐딱한가 싶기도 하고.
아쉬웠던 것은 좀 심심하기는 해도 그냥 자신의 담배 역사와 연애 역사만 꼬아서 소설을 만드는 편이, 세계의 담배 역사 (16세기의 니코 대사관 어쩌고 하는 소설 속 소설이 있다)까지 어우르는 편보다 훨씬 나았을 것 같다는 점. 욕심이 오히려 소설의 담백함을 망쳐버린 케이스다.
역자는 독일문학이 딱딱하고 심각하다는 편견을 없애주는 신세대적인 기발함과 유머 코드가 있다고 이 작가를 칭찬했던데, 내 생각은 그 반대이다. 이 책을 읽고보니 역시 독일은 유머로는 안돼,라는 생각이 들던 걸. 그놈의 '흡연기호가 나오기 전까지는 담배를 피우시면 안됩니다'라는 중간 문구가 종종 나오던 ..........~ 라는 흡연기호보다 더 거슬렸고, 그런 문구를 넣은 부분에서 재치있다는 생각이 들기보다는 어거지 코미디를 보는 느낌이 더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작가는 이 책을 다 읽고나면 담배를 끊고 싶어질 거라고 했는데, 나로서는 뭐, 더 피고 싶지도 꼭 끊고 싶지도 않다.
다만, 요즘 들어 예전에 여성에게 유독 가해지던 억압이 모든 흡연자에게 골고루 가해지고 있어서, 숨어 피우지는 않지만 한정된 장소에서만 피워야 하는 것이 구찮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이 좀 더 많이 귀찮아지면 아마 조만간 1년에 몇 번 정도로만 국한해서 피우게 될 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