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시는지요.

전 지금 타국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쉼 없이 달려야 했던 출장도 어느덧 막바지라 그런지 오늘은 겨우 이렇게 짬을 낼 수 있긴 하네요.

이 나라는 무척 크고, 이 나라의 밥집에 가면 무척 많이들 먹고, 무척 많이들 버리고, 무척 ... 저질입니다.

사실 대개는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인데, 이 세계에서 몇일 지냈다고 제가 이렇게까지 혐오감을 가지게 될 줄은 몰랐어요. 그들의 행동, 언어, 몸짓 모든 것이 돈,돈,돈, 하는 것만 같아서 경멸이 치밀어 오르는데, 그럴 때마다 저라고 뭐가 다른가 돌아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뭐, 엄밀하게 말하면 국가의 문제라기보단 현대인의 문제겠지만, 서양은 아무래도 동양보다 노골적이라서 그렇게 느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이 나라에서 하고 있는 일이란 것이, 돈,돈,돈 해야 하는 것들 뿐입니다. 제가 걸어다니면, 누군가에게는 삼백원짜리 , 누군가에는 삼천원짜리, 멍청한 누군가에게는 삼백만원 짜리 정도로 보일테지요.

그런 와중에 어제는 스테이크 집에 갔습니다. 역시 통이 큰 이 나라에서는 소 한마리를 통째 넣어도 좋을만한 거대한 기구를 가지고 와서 척 하니 열어 엄청난 양의 고기를 썰어줍디다.

피가 흐르는 미디엄 레어의 소고기를 먹으면서, 한국의 상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는데, 혼자 복잡한 생각에 빠지기도 전에, 상석한 사람들 중 몇몇은 그 상황을 이미 입에 올리며 비웃기 시작하더군요.

자, 이걸 봐라, 이렇게 잘 처먹히지 않느냐, 어차피 촛불이고 뭐고, 잠깐이다. 한국인들은 원래 냄비 근성이 다분하다, 언제는 노무현을 탄핵 하자더니 이제는 또 이명박 가지고 시비다, 맨날 시비만 하고 일은 언제 제대로 할 것이냐, 이러니 나라가 제대로 안 서지, 등등.

그런 말들을 하는 분들이 제발 저에게 아무 말도 시키지 말았으면 했는데, 결국 묻더군요.

미국 쇠고기, 맛있지? 라고. 너는 한국에서 쇠고기 수입 반대 하는 걸 이해한다면서 왜 먹니? 라고.

입을 다물고, 썰던 칼을 내려놓고, 조용히 일어서서 나와 그 길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버린다면 어땠을까요. 소심한 저는 당시에는 그런 상상 조차 하지 못한 채, 이렇게 말할 뿐이었습니다.

이곳에선 적어도 자신들을 위한 검역 시스템을 갖추고 있겠지요.

그쪽은 다시 집요하게 농담이라는 형식을 갖춘 채 비웃습니다.

지금 니가 먹고 있는 것은 40개월 넘은 소래, 흐흐흐. 그래도 잘들 먹지 않니. 도대체 30개월 어쩌구는 어디서 나온 소리래니.

광우병 괴담, 이라는 표현을 뉴스에서 보거나 들었을 때는, 정신이 좀 나간 사람들이나 극우파들이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제가 일하는 직장의 반 이상 사람들이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불리한 것을 자꾸 밀어내려 하고, 그래도 어쩔 수 없으면 부인하게 되는 것이 이치라면, 그들은 아마 광우병 이야기를 괴담으로 만들어 두어야 하는 이명박 정부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것이고, 그런 입장인 사람들이 살살 비웃기나 하지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이지는 않아서 우리는 잘 모르는 것 뿐이었어요.

저는 매우 피곤했지만, 어제 잠을 이루기 힘들었습니다.

돈은 저에게도 매우 중요한 삶의 요소입니다. 돈이 없으면 알라딘에서 책도 못살테고 보고 싶은 공연도 영화도 못볼테고 아들에게 좋은 것도 사주지 못할테고 .... 우울한 일들이 참 많을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시간 동안 이역의 침대에서 뒤척이며 내린 결론은, 적어도 저는

앞에 언급한 사람들과 소위 그 돈 버는 일이라는 걸 계속 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돈은 다른 수단으로 벌어야겠어요. 그것이 무엇이 될 진 아직 모르겠지만.

이 편지를 읽은 어떤 분들 중에서도 잠을 뒤척인 분들이 있을 것만 같습니다. 저보다는 어른스러운 이유에서일거 같아요. 전 아직 크는 중인가 봅니다. 이제서야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서 또 다른 고민을 하고 있으니...

먼 곳에서나마 응원을 보냅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계신 분들에게.

또한 동병상련을 보냅니다. 저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바보 같은 고민이나 하고 있는 분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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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6-01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령인 괌에 회사 사람들과 함께 가서 저도 똑같은 일을 겪었습니다. 유난떨기도 그렇고 하여 몇점 먹고 있는데, 거보라며, 미국산 소가 맛있다며, 너도 먹지 않느냐며, 심지어 여기는 뼈 부위라고... 그리고 저 역시 동일하게, 미국은 자국에 24개월 미만의 소는 공급하지 않는다, 라고 응대하고 다시 소를 먹지 않으려 노력하는 정도로 행동을 했습니다. 그 이후로 먹지 않았던 건 사실 걱정됐다기보다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행동이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며칠 안되는 기간이 지나 돌아왔는데, 상황이 참 많이 심각해져서 깜짝 놀랐었습니다. 치니님 마음도 거기서 많이 불편하시겠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며 고민만 하고 있는 이가 치니님이 보내신 동병상련에 유난히도 마음이 갑니다.

치니 2008-06-01 14:52   좋아요 0 | URL
역시, 동병상련하는 분이 있으리라 짐작했는데, 맞았군요.
지금은 일본 식을 먹고 왔는데, 마요네즈 범벅이라 일본식인지 뭔지 분간이 안가서 속이 뒤집힙니다. 에효, 된장찌개가 그리워요.

누에 2008-06-01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익웃으며,네살을썰어먹는다고생각하면서먹는중이다.라고말씀해주시지그랬어요.
휴...그맘이해합니다.
keyboard고장이라띄어쓰기가..^^;

치니 2008-06-02 00:50   좋아요 0 | URL
아아 그럴걸 그럴걸... 누에님이랑 그럴 때마다 텔레파시가 통했으면 좋겠어요.
네 살을 썰어먹는 중이다, 웃으면서! 멋진데, 멋진데. 흐흑.

rainy 2008-06-02 0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돌아오면 얘기할게 많겠구나..
나도 며칠전 점심시간에 장로님을 무턱대고 감싸안으려는 최모씨와
몇마디 나눈 후 위가 또 꼬여버렸어..
제발 말섞지 말아주길 바랬으나 '촛불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해서
'거기 함께 있지 못해 미안할 뿐'이라고 했더니
입에 담기도 싫은 반응들..
'탁핵'에 대해 어찌 생각하냐는 두번째 질문에
'말귀를 이렇게 계속 못알아들으면 탄핵아니라 암살이라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내가 마치 누군가를 벌써 죽이고라도 온듯한 반응..
그중 한명이 '밥이나 먹읍시다'하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했을까..
난 그러고도 꾸역구역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숨을 몰아쉬다가 그만 다 토해버리고 말았지만..
광우병이 무서운 게 아니라 , 사람들이 무섭고.. 내 자신이 견딜 수 없었고..
시야가 암담해..
암튼. 남은 몇일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길 바랄게..

치니 2008-06-02 00:52   좋아요 0 | URL
그래, 언제나 문제는 사람, 사람이지.
언니의 위는 항상 가장 정직하구나. ^-^;;
내 위는 이러고도 어찌나 뻔뻔하게 소화를 잘 시키는지, 위도 사람 닮나.
건강하게 있어, 나도 그럴게.
이제 금방이다!

mooni 2008-06-02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장길이 고생길이었나보군요. 돈버는 일이 그렇더라고요..; 수고하셨어요. :)

치니 2008-06-02 14:35   좋아요 0 | URL
우는 소리 되도록 안하려고 했는데, 나 고생하고 있노라고 외친 셈이 되어 좀 창피스럽네요.
더한 고생을 하는 분들도 있는데...
마하연님, 고마워요.

2008-06-02 2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3 00: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2 23: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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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0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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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07: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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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13: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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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6-03 09: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3 13:4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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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꼬 2008-06-03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ㅠㅠ 우는 소릴 왜 안 하세요. 당근 눈물 나지. ㅠㅠ

치니 2008-06-04 00:32   좋아요 0 | URL
네꼬님, 이젠 씩씩해졌어요.(하지만 다음에 눈물 날 있음 네꼬님에게 가서 하소연해야지 히히)
네꼬님도 힘 내요!

2008-06-03 2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06-04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게다예요 2008-06-04 2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살 비웃는 그 비웃음이 언젠가 자기 자신에게 꽂히는 날이 있겠죠. 의견이 다른 것보다도 인격적으로 모자란 사람들과 함께 일하기 참 힘들어요.
뒤숭숭한 날들이죠... 아이를 내놓기엔 세상 참 무서워요.
타국에서도 마음고생하시네요..

치니 2008-06-05 08:35   좋아요 0 | URL
의견이 다른 것을 수용하되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용납하지 않는 것이 아마 똘레랑스라고 알고 있습니다.
잘못한 건 엄연히 잘못한 거고, 그걸 풀어나가기 위한 방법들에는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게 가장 올바른 태도인거 같아요.
뒤숭숭하지만 아무튼 오늘 다시 한국의 제 책상에 돌아와 앉았습니다.
아이들, 그래요 아이 때문에라도 우리는 조금 더 좋은 어른이 빨리 되어야 하는데 말예요. ^-^

토니 2008-06-06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치니 님의 글을 읽다 보니, 물론 알곤 있었지만, 제가 새삼 더 이기적으로 느껴지네요. 소고기 전면 개방, 광우병, 뭐 이런 이야기들이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만으로 남의 일처럼 느껴졌는데. 사실 광우병은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는 무서운 병이라기 보단 정말 재수없는 사람만 걸리는 병쯤으로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전 그저 불쌍한 우리 아이들 더 크기 전에 준비된 부모를 찾아주는 것 외에 아무 생각이 없는데. 촛불 시위도 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건데, 전 나무만 보고 숲은 못 보는 그런 사람네요. 부끄럽네요.

치니 2008-06-06 16:09   좋아요 0 | URL
불쌍한 아이들 준비된 부모 찾아주는 것, 정말 좋은 일인걸요.
저야말로 많이 부끄럽죠...
내 식탁 위 안전만을 생각해서라기보다 전체적인 평화를 위해 촛불을 켜는 사람들이 더 많으리라 믿고 있어요.
저도 그래야 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