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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리뷰를 끄적이기 전에 바보 짓을 밥 먹듯이 하고 사는 덜렁이 치니씨에 대한 고백을 먼저 해야겠다. 다음은 2005년 어느날에 다이어리에 적었던 일기.
직장 동료 두 사람이 만났다. 한 사람이 인사했다. "별일 없나?" 그러자 나머지 한 사람이 이렇게 대꾸한다. "꼭 무슨 일이 있기를 바라는 말투로군."
두 친구가 만났다. 한 친구가 말했다.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 그러자 다른 친구가 비아냥거린다. "언제는 좋았어?" (중략)
아무런 악의도 없고 지극히 평범한 질문을 했다가 상대방이 질문을 심각하게 오해하는 바람에 황당해질 때가 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고슴도치"들이다. -본문 14p 중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시를 잔뜩 세우고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는 고슴도치들은 경계선에 대한 감각이 전혀 없다. 더 이상 경계선을 존중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손해를 볼지는 생각도 하지 않고 경계선을 넘어 버리는 것이다. 이럴 때 첫 번째 원칙은 "자기 자신을 위한 안전지대를 확보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상대방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보살피라는 것이다. - 본문 139p 중에서
<고슴도치 길들이기> - 이름트라우트 타르
이 책을 사서 읽을 생각은 없다.
다만, 안전지대 확보. 이것을 기억하기로.
고슴도치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2005년부터 얼마전 이 책을 구입할 때 까지 나는 이 책을 실용서 혹은 처세술에 관한 책인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실제 내가 읽은 이 책은 오히려 고슴도치에 대해 정반대의 호감을 갖고 있는데도) -_ㅠ
예의 실용서인 줄로만 알고 중고로 구입한 이 책이, 급기야는 막판에 훌쩍 훌쩍 눈물까지 맺히게 감동의 도가니 , 공감의 파노라마로 읽힐 줄이야. 세상은 이런 식이다, 항상. 또 아는가, 2007년에 우리나라에 소개된 이 책을 그때 당장 읽었더라면, 지금의 내 삶이 쪼금이나마 바뀌어 있을지. 하지만 나에게는 '완소'가 된 이 책이 저런 터무니 없는 오해를 한 독자인 내게도, 결국은 운명처럼 다가온다, 조금 늦었을 뿐.
자본주의 사회에서 계급은 주로 돈의 유무에 따라 나뉜다. 그런데 자본주의이자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살고 있다고 믿는 많은 우리들은 부의 척도로 계급을 나누는 것에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경계하지만, 슬프게도 현실이 이미 그렇다는 것을 찰나의 순간에 느낄 수 밖에 없기도 하다.
이 책은 그런 계급의식에서 출발했음을 서두에 알리고 시작하는 책이다. 즉,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직업, 외모, 학력, 성장배경, 등등을 제외하고 진정한 그 사람의 소위 '급'을 알아주려는 사람들은 없다,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거다.
그러므로 나는 이 책에서 가끔 거슬리기도 하는 부자는 상위 그룹, 가난한 자는 하위 그룹이라는 철저한 이분법을 일단 그냥 덮어주기로 한다. 왜냐하면 내가 최근 몇년 동안에 읽고 감동의 눈물을 흘리게 된 거의 유일한 소설이기 때문에.
거슬리는 것은 또 있다. 작가의 <한국 독자에게 쓰는 편지>에서 이미 드러나고 있는 아시아에 대한 - 소설 자체에서 보면 일본으로 국한되는 것 같지만 - 밑도 끝도 없는 경도에 아시아인으로써 공정하게 고개를 끄덕여 줄 수 만은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책이 소설이라고, 그러니까 완벽한 픽션이라고 믿는다면 모를까, 작가의 평소 사상이 철학으로 배수진을 깔고 그 위에 소설이라는 형식을 입힌 것이라면, 어설픈데도 확신하고 있는 그 사상에 대해 조금은 반대 의견을 내놓을 수도 있다는 거다.
그래도!
르네와 팔로마는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그들이다. 도입부부터 르네는 나를 매혹시켰다. 그녀는 한낱 수위 일을 하면서 사실은 매우 박식한 자신을 두고, "메뉴를 몰두해서 읽은 다음 배가 부르다고 믿는 한 늙은 미친 여자"같다고 자신을 표현하는 겸손한 지성인이되, 그것을 드러냈을 때 가차없이 행해지는 돌팔매를 감당하기엔 너무 여려 차라리 철저한 가면을 만들어내는 인물.
팔로마는 세상의 부조리와 교육의 사기, 사랑, 우정, 예술의 가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천재 소녀로 언제나 자살과 방화를 꿈 꾸지만 자신과 다른 범인들에게 애처로운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예리하고도 착한 아가씨.
그리고 이 둘의 최대공통분모인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적인 추구. 진정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세상과 등지고 지낼 수 밖에 없는 이들에겐 그나마 산소호흡기의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안다, 자신들 뿐 아니라 그 진정한 아름다움을 못 알아보는 많은 이들에게조차, 그것은 보이지 않는 산소호흡기이며 인간임이 수치스럽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함이란 것을.
아,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와삭 베어물고 단물을 쪽쪽 빨고 싶은 흥미진진한 책인데도, 완전 몰입 죽죽 진도 나가기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
내 철학 지식이 너무나도 짧은 지라, 이 책에서 철학 사상을 빗대어 꾸려가는 이야기는 몇번을 슬로우리딩 해도 어렵기만 하니, 무식이 창피하고 경박함이 창피하긴 한데, 노력해도 안되는 부분은 눈물을 머금고 '공부하고 다시 읽자'라고 생각하고 말아야 했던 것이다.
혹자는 이 책을 두고 고슴도치의 우아함이라기보다는 지식인의 잘난 척, 그러니까 소위 스노비즘이 빚어낸 엉뚱한 소설로 치부할 수도 있겠다만, 여보세요 그건 진실이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당신은 '지식인'과 '지성인'의 차이를 간과한 것일 지 모르니 다시 마음을 열고 이들을 봐야만 한다. 진실은, (심호흡) 세상에는 정말로 이 책에 나오는 우아한 고슴도치가 있다는 거다. 어떻게 아느냐고? 그냥 안다. 어떻게 그냥 알게 되었나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알겠어서, 나 같은 부류는 이 우아한 고슴도치들을 미워할 수도 없을 뿐 아니라 , 실은 존경하기도 하고 주제넘은 연민을 갖기도 한다. 그러니 고슴도치들이여, 너무 고독해하지 말기를. 당신들이 있어 세상은 그나마 살 만한 걸지도 모른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