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를 자주 쓰는 편은 아니다만, 쓰는 걸 좋아하는 편이다.

어려서부터 일기 쓰기 숙제에 대한 부담감이 전혀 없었고, 지금도 다이어리에 끄적여놓고 지나간 일기를 되돌아보는 일에서 나름의 재미를 느끼니까.

홍상수의 이번 영화는 이전 영화와 다르지 않다. 굳이 다르다면, 색깔이 점점 연해진다는 거랄까. 어제 <밤과낮>의 엔딩 크레딧에서 홍상수감독의 여덟번째이야기라는 타이틀을 보자니, 문득 최초로 나에게 한국영화에 대한 눈을 새롭게 뜨게 만들었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 떠오르면서, 아 이사람 정말 많이 연해졌네, 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

이야기가 잠시 샜었다.

일기 이야기로 돌아가서,

어차피 홍상수의 영화가 항상 일기처럼 지난한 일상을 무덤덤하게 그려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새삼스럽게 모월모일 하면서 매일의 일상에 날짜를 집어넣었다고 뭐가 달라지진 않는다. 그럼에도 그러한 삽화적인 재미는, 남의 일기장을 몰래 들춰볼 때의 두근거림이나 기대감을 조금 더 가미해주는 거 같기도 하다.

프랑스에 잠시 살았던 기억도 많이 떠올랐다(극장 가기 전부터 예상했던 거지만).

담배 사러 가는 씬

: 나도 그랬다. 이놈의 나라는 담배는 온국민이 죽어라고 펴대면서, 왜 이리 담배 파는 것에 인색한가. 일요일에 담배가 떨어져 버리면 기차역 정도에나 가야 문 연 가게를 만날 수 있었던 기억. 30분은 걸리는 거리를 아침부터 꾸역꾸역 걸어가면서, 대체 뭐하는 짓이냐 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노숙자 씬

: 나도 그랬다. 멋 모르고 아무하고나 오픈 마인드였던 시기라, 그리고 거기가 우리나라가 아닌 남의 나라라, 노숙자들하고 잘 텄다. 그 중 한사람은 나중에 보니 휠체어를 탄 덕분에 마약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어서 주변의 인기를 얻고 있었는데, 나에겐 그저 보통사람처럼 만나면 반갑게 인사하고, 궁상 떨며 구걸한 적도 없었다.
그 때 아 이 사람들은 일 안하는게 자랑이구나, 그런 생각도 했던 거 같다.

북한 청년 만나는 씬

: 나도 그랬다. 당시로서는 북한사람을 봤다는 말만 해도 어디 끌려갈 거 같은 불안감이 당연히 있었는데, 프랑스에선 북한이나 남한이나 똑같이 취급했다. 남한이 더 잘산다는 사실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 당연히 너는 북이냐 남이냐 매번 물어봐서 나중엔 귀찮아서 처음부터 남쪽 이라고 말해야 했다. 그리고 북한사람을 만나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던 것 같다. 영화 속 정남이처럼 “김일성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물을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릴 적 삐라에 나오는 괴수 같지 않은지 확인하고 싶었다.

그 외에도 이미 잊혀졌다고 생각했던 자질구레한 기억들이 영화를 보면서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그리고 점점 나오는 배우들의 얼굴이 아니라 홍상수의 얼굴이 보였다. 이제 홍상수 영화를 매번 보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지점은 거기였다. 나오는 사람에게 몰입할 수 없는 영화는, 영화로서의 그러니까 거짓 리얼리티로서의 가치를 떨어뜨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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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다예요 2008-03-0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전 영화와 다르지 않다니, 아마 안 볼 거 같아요.
언제부턴가 홍상수 영화가 시시풍덩해지기 시작했어요. 그의 영화에서 한 번도 제대로 일상의 리얼리티를 구경해 본 적이 없는 거 같아요. 꾸며진 리얼만 있을 뿐.
하긴 어떻게 보면 리얼이란 말도 각자의 입장이 있는거겠죠? ^^ 홍상수에겐 리얼이 강박이 되는 것 같고, 고로 보는 저는 늘 그게 부자연스러워 보일테고요.

치니 2008-03-04 13:16   좋아요 0 | URL
자연스럽냐 아니냐로 리얼리티에 대한 잣대를 재보자면, 분명 거짓 리얼리티 같은데, 그 부자연스러움이 또 어떤 때는 우리의 실체 같기도 하단 말이죠.
^-^
리얼에 대한 강박 까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만의 영화 색을 계속 갖춰나가는데 대한 강박은 그래도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영화도 원래 자금난으로 찍지 못할 상황이었는데 박은혜양의 노개런티를 비롯한 스탭들의 이해, 필름 제작이 아닌 디카(?)촬영 식 경비 절감으로 극복한 거라고 하더만요. 자의로 된 건 아닐지 몰라도 유명감독이 된 이상, 그런 부분들 모르쇠는 어렵겠다 싶고...ㅎㅎ 쓰다보니 이건 다예요님의 댓글에 대한 답이 아니네요.

chaire 2008-03-04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전 영화와 다르지 않다니, 저도 안 보고 싶기는 한데(다예요 님과 같은 입장에서),
그러면서도 저는 결국 보게 되드라구요. 외면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로,
홍 감독은 제 습관이 되어버렸나 봐요. 아마.
영화관에서 볼지, 다른 방법으로 볼지는 모르겠지만.

이 영화에는 다행히 좀 신선하게도 김영호가 나와주시는데,
아마 김영호마저도 이 영화에선 홍상수화해버렸겠지요?
김영호를 보는 건 좋은데 황수정까지 봐야 하니 재미없겠지만.

여전히, 미스터홍은, 제목은 참 잘 지어요.

치니 2008-03-04 13:19   좋아요 0 | URL
저도요, chaire님.
예고를 볼 때부터 다르지 않다 싶었는데도 자석처럼 가게 되더라니까요. ㅎㅎ
지루하다는 평도 많은거 같은데, 막상 그렇지도 않았고.

김영호, 홍상수화 ... 흠, 이전의 배우들에 비하면 그렇지는 않다 싶어요.
자꾸 '홍의 목소리가 들려'같은 느낌이 되는건, 그의 대사들 때문이죠.
점점 자기가 하고싶은 말들을 배우를 통해 하는걸 즐기는거 같아서요.
황수정은, 아 스포일러라 말씀 못드리지만, 봐야 한다는 강박을 주진 않아요.
박은혜는 꽤 잘 어울립니다. ^-^

nada 2008-03-04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신 영화도 보시고 일본 여행도 댕겨 오시고, 그 머시냐, 취향 테스트도 하시공.
요즘은 부지런한 분들 보면 그저 경배드리고 있어요.
심각한 슬럼프예요. -.-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더러워지는 징크스가 있어요.
그래서 극장에서는 잘 안 보는 편이랍죠.
아, 하긴 김기덕 영화만큼 더러워지지는 않는군요. >.<

치니 2008-03-04 16:12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꽃양배추님 서재에 가서 업데이트 촉구 데모라도 할까 하고 있었다가, 어디선가 댓글에 아프시다고 적어놓으셔서 가심이 아파 말았다죠.
몸이 아프시니 마음까지 아프셔서 슬럼프가 되신 건 아닐까 ... 미뤄 짐작만 하는 실정입니다. 흑, 뭐 어떻게 도와드리지도 못함서.
홍 & 김 감독의 영화들을 보면 기분 더러워진다는 분들 정말 많은데, 전 왜 안 그럴까요. 아무래도 제가 그들의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보다 더 가증스러워서인가하는 반성이...긁적.

누에 2008-03-04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홍&김 등의 착취형 감독을 혐오해요. ^^;
그들이 하는 꼬라지가 꼴사나워서요. ^^;;
'꼬라지'는 최근 본 드라마 환상커플에 자주 나오는 말이에요. ^^;;;
최근 홍자매에 관심이 가더랍니다. ^^

치니 2008-03-05 09:06   좋아요 0 | URL
환상의 커플, 저는 몇번 못 봤드랬지만 여기서도 꽤 인기가 있었어요.
홍자매는 누군지 잘...^-^;;
어차피 안 보시겠지만 이 영화 파리 장면이 대부분이니 누에님이 보시면 감흥이 많이 다를 수도.

nada 2008-03-10 12:13   좋아요 0 | URL
홍&김 하니까 무슨 피부과 간판 같은..^^
그나저나 치니님, 여기저기 많이 다니셨나 봐요.
파리엔 뭣 땜에 가셨을까.. 궁금해집니당.

치니 2008-03-10 12:39   좋아요 0 | URL
전에 재미로 본 인터넷 점에서 제 전생은 유목민이라고 나왔는데, 정말 역마살이 꽤 있는 편이라, 맞다 그랬어요.
여기저기 다니는데 실속이 없는 형이죠, 제가. ^-^;;
정확히는 파리가 아니라 뚜르라는데 살았었는데, 학과 중 연수였어요.
전공이 불문과였거든요. (아흐, 지금은 어디가서 불어 하라고 하면 입이 안열려 당황스럽지만요.-_-;)

rainy 2008-03-05 0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재밌어.. 마지막 단락, 특히 마지막 문장은 너무 멋지다 ^^
니가 프랑스에 있었던 그 때도 아스라히 생각나고 말야..
난 홍과 김중에서는 그래도 김이 나은데.
왜냐고 생각해보니 홍은 못된x 같은데, 김은 딱히 못된x놈은 아닌 것 같아서.. 아닐까?
홍에겐 슬픔이 없는데 , 김에겐 슬픔이 있어서 일까? ..
쩝.. 영화 보구 싶다.. 홍상수의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본다'에
당신이 감동한 '감싸롱 햄버거'를 걸게 ..
(쓰고보니 결국 내가 먹겠다는 겐가 -_-;;)

치니 2008-03-05 09:09   좋아요 0 | URL
ㅋㅋㅋ 감싸롱에서 아침부터 웃는당.
새로운 영화가 나오면 아마 보겠지. 안 봐도 햄버거는 사주겠네. ㅋㅋ

홍과 김, 많이 다르지만 거론 될 때는 같이 되곤 하는게, 아마 둘 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인정 받으니 그런가봐.
슬픔의 강도에 대해선, 음... 유구무언.

프레이야 2008-03-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홍상수 영화는 우째 집에서 비디오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뤄둘래요^^

치니 2008-03-15 21:33   좋아요 0 | URL
저도 홍씨 영화는 비디오로 봐도 무방하다 생각하는데, 우연찮게도 개봉할 때마다 잘 챙겨보게 되요.
어쩌면 집에서 맥주 하나 들고 낄낄 대며 편안히 딩굴며 보는게 더 제격인 편인데말예요. ㅎㅎ

chaire 2008-03-19 1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주 토요일에 봤어요, 결국, 이 영화.
진짜로 무덤덤하게 찍어놓으셔서, 웬만해서는 홍 영화가 지루하다, 그런 느낌 못 받는데,
이번 건 좀 지루하드라구요. 그래서 정직하다 싶기도 하고. 파리에 대한 판타지를
완전 허무는, 어디 가나 일상은 졸렬하고 지리멸렬한 풍경으로 우리 옆에 펼쳐져 있구나
하는 걸 제대로 보여주더만요. 전 홍 감독이 보이는 지점을, 이전의 해변의 여인, 인가에서
너무 지독하게 느껴버려서, 그때 참 싫었더랬는데요, 외려 이 영화에서는,
홍 감독이 자기 자신에 대해 객관화했달까, 아니면 자기 스스로를 배제하고 보편성을 추구했달까, 그런 느낌을 조금 받았고, 여전히 고민하는구나, 이 사람, 그런 생각도 들더군요.

강렬한 영화는 결코 아니잖아요, 이 영화. 근데, 영화 보구 나서 간혹 떠오르더라구요.
김영호가 걷는 모습, 박은혜의 발과 종아리, 에또 그 구름 그림이랑.

그리고, 언제나 같은 얘길 하면서도 조금씩은 다르고,
홍의 영화를 보다 보면, 언제나 같은 그 얘기 때문에 우린 무너지며 살잖아,
하는 확인을 하게 돼요.

치니 2008-03-19 17:46   좋아요 0 | URL
결국, 보셨군요. 으헤헤.
전 홍상수 감독이 느물거리는 앞면 뒤에 결벽증 적인 소심함이 있지 않나 하는생각을 가끔 하는데, 그게 아마 바꿔 말하면 chaire님이 느낀 그 정직하다 싶은 느낌 때문인가봐요.
그리고 이제 그 소심함이 차차 덜해지면서 객관화 하고 보편화 하고 그래가는 거 같아서, 그리고 그 과정도 꽤 치열한 거 같아서, 괜찮다 싶고요.
박은혜는, 생각보다 꽤 뚱뚱한데, 그게 또 생각보다 꽤 섹시하던걸요. 훗.
김영호는 이제 와선 별루 생각이 안나요. 역시 여배우의 포스가 더 센걸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