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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카파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
로버트 카파 지음, 우태정 옮김 / 필맥 / 2006년 5월
평점 :
나는 로버트 카파가 누구인지 몰랐다. 물론 '카파이즘'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 모름에 대해 부끄러워한 적도 없다.
카파이즘(Capaism)_기자정신을 뜻하는 용어.
세계적인 전쟁사진가 로버트 카파(Robert Capa, 1913∼1954)의 이름에서 따온 말로 기자정신을 뜻하는 용어이다. 로버트 카파는 전쟁을 전문으로 찍는 전쟁사진가로서, 특히 에스파냐내란 중에 찍은 사진으로 유명해졌다. 그는 193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큰 전쟁터를 두루 누비고 다니며 전쟁의 실상을 카메라에 담았다.
1936년 《라이프》지 표지에 에스파냐내란 중에 찍은 카파의 사진이 실렸다. 참호를 뛰쳐 달려나가던 에스파냐의 한 병사가 날아오는 총탄에 맞아 양팔을 벌린 채 갑자기 얼어붙은 표정으로 쓰러지는 처절한 장면을 담은 이 사진은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전쟁기록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진은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에 대항하는 신호탄이 되었으며, 전쟁의 처절함을 그 무엇보다도 사실적으로 증언하는 데 공헌하였다.
로버트 카파는 에스파냐내란 외에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 팔레스티나의 이스라엘 독립전쟁, 인도차이나전쟁 등을 기록하였고, 1954년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사망하였다. 이후 로버트 카파와 같은 투철한 기자정신을 일컬어 '카파이즘'이라고 하게 되었다. (출처_네이버 백과사전)
그러나 내가 전쟁, 기아, 종군기자, 역사 등에 대한 관심까지 전무했다고 할 수는 없다. 나는 아주 조그마한 이름 없는 씨앗이었다. 나는 늘 이런 것들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TV에서 관련 소식을 전해주면 최소한 무관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무지했다.
이 책을 읽은 것도 열에 아홉은 호기심 때문이었다. 씨앗이 새싹이 되기 위한 호기심. 나는 새싹이 되고 싶었다. 누런 잎이 없는 새싹. 그리고 '전설적 포토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파의 2차대전 종군기'라는 카피가 마음에 들어서 이 책을 골랐다. 전쟁은 늘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아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성적인 것이다. 기자라면 감성보다는 이성에 따라 움직인다. 나는 그 이성을 보는 눈이 궁금해졌다. 구구절절 늘어놓는 기사도 필요 없는 사진 한장으로 말하는 이성.
다음날 아침, 간밤에 푹 잔 탓인지 한결 기분이 좋았다. 수염을 깎으면서, 보도 사진가로 산다는 것과 다정한 마음을 잃지 않고 간직한다는 것이 서로 양립할 수 있는가에 대해 자문자답을 해보았다. 병사들이 다치고 죽어가는 장면은 빠뜨린 채 그저 한가하게 비행장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만 찍은 사진은 사람들에게 진실과는 동떨어진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보여주려면, 전사자와 부상자까지도 여과 없이 찍은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내가 감상에 빠지기 전에 그런 장면들을 한 통의 필름에 담아두길 잘했다는 판단이 섰다. p47
카파는 이력부터 화려하다. 유명세로도 그렇지만 그의 일대기 또한 그렇다. 어쨋든 그는 유태인의 아들이었고 헝가리인이었다. 전쟁은 사람을 둘로 가른다. 적과 동지로. 하지만 그는 고국에서도 좌익학생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추방된 몸이었다. '국적불명'. 그러나 우선 적국인으로 분류된 그는 아군도 적군도 아니게 되어버렸다. 내가 생각하기에 입신양명하는 사람은 대부분 천우신조의 기운을 띠는 것 같다. 카파는 내내 운이 좋았다. 포탄도 잘 피했고 물에 빠져서 기절했지만 살아났다. 결국 지뢰를 밟고 폭사로 생을 마감했지만.
병사들이 나를 깨운 것은 녹색등에 불이 들어오기 직전이었다. 차례가 되었을 때 나는 왼발을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내밀면서 몸을 던졌다. 피로가 가시지 않아 몽롱한 상태였던 나는 일천, 이천, 삼천을 세는 대신 다른 말을 되풀이했다.
"백수 사진기자 하강, 백수 사진기자 하강, 백수 사진기자 하강..."
갑자기 내 어깨가 확 당겨졌다. 낙하산이 펴진 것이다. 나는 너무나 기쁜 나머지 혼잣말을 해댔다.
"백수 사진기자 공중부양."
그러나 하강한 지 일 분도 채 안 돼 낙하산이 숲 한가운데에 있는 나무 위에 걸려버렸다. 나는 밤새 나무에 매달려 있어야 했고, 덕분에 내 두 어깨는 궁둥짝의 무게를 확실히 실감했다. 무수한 탄환들이 내 주위를 스쳐갔지만, 감히 살려달라고 고함을 지르지도 못했다. 헝가리 사투리 때문에 까딱하면 적군과 아군 모두로부터 사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p94
아군이 될 수도 있고 적군이 될 수도 있는 까마귀같은 신분의 그는 그 상황을 잘 이용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친구가 되어주었고 그가 위태로울 때마다 손을 잡아주었다.
전쟁은 이성적이라고 미리 말해두었지만 매우 감성적인 것이기도 하다. 잔혹한 학살과 언제 죽을 지 모르는 공포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전장의 군인들은 유머를 잃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융통성과 인간미도 잃지 않았다. 그런게 인간적인 사람들이 군인정신으로 똘똘 뭉쳐서 적을 폭사시키는 것이 가능한가 되묻지 않을 수 없을정도로.
"이 전쟁은 꼭 늙은 여배우 같수다. 상황은 점점 더 험앗해져만 가는 가운데 사진발까지 더욱더 나빠지니 말이오" p67
나는 중간중간 나오는 카파의 사진 속의 군인들의 얼굴과 죽은 시신을 보면서 생각했다.
'저 사람이 내 아들이라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사진한장이 아니었다. 적도 동지도 없었다. 갑자기 가슴이 아파왔다.
전쟁은 예술이 아니었다.
이제는 정말 우리가 하나였던가 자문하게 만드는 분단상황일지라도 휴전은 휴전이다. 나는 유일의 분단국가에 살고 있는 사람이다. 전쟁은 도처에 있었다. 월드컵으로 뜨겁게 달아오르는 남한의 열기 한편으로 미사일 공격의 열기도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진부한 전쟁론일지라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현실을 냉혹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전쟁이 없는 긴 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는 크고 작은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 상당수는 자의와는 관계없이 시작된 싸움이다. 바야흐로 전쟁도 글로벌인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전쟁의 실상은 생각보다 이질적이었다. 나는 80년대에 태어난 그야말로 배불리 먹고 신나게 놀며 자란 세대이다. 불과 몇십년 전 우리는 식민지였고 분단이 되었었다. 굶주림에 영혼까지 팔아넘길 지경이었으나 이제는 음식 쓰레기를 쌓아둘 곳을 걱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나 자신이 전쟁에 대해, 그것도 눈으로 보여지는 사진에 대해 이질적으로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내 눈 앞의 사진 속에 정말로 시체가 있는거야? 그것도 총과 폭탄으로 난도질 당한?'
그것은 너무도 생소해서 마치 편안하게 쉬고 있는 한 명의 병사 같았다. 그래서 그가 내 가족이었다면? 하고 생각하곤 더욱 슬퍼졌다. 나는 그 다음부터 나오는 사진마다 배경을 상상해보았다. 벌판에 있는 군인들이 보이면 내가 그 벌판위에 함께 있다고 상상했다. 너무 외롭고 무서웠다.
나는 학창시절 발표수업이 있는 날에는 몸 속의 모든 장기가 꿈틀대면서 일주일 전에 먹은 도시락까지 넘어올 것만 같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카파와 원정을 떠난 군인들은 출격 직전 구토를 했다. 내 생에 몇 안될 끔찍한 순간들도 전쟁과는 비교할 수 없을정도로 작은 공포에 불과하다.
전쟁도 하나의 삶이다. 그것이 실제 전쟁이든 또 전쟁을 비유한 삶이든 그것은 어쨋든 인생의 부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하거나 유머를 잃어서는 안된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피우고 전우애가 싹튼다. 원수같던 사람이라도 그리워지게 하는 것이 전쟁이니까.
그러나 나는 이제 전쟁이 지겹다. 삶의 부분이라고 치부하기엔 고통이 너무 크다. 의미 없는 싸움일 뿐이고 끝없는 살육일 뿐이다.
앞으로 북아프리카의 사막이나 이탈리아의 산악지대에서 싸우는 병사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는 일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능가하는 공략작전도, 파리에 필적할 만한 도시의 해방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는 가스통에게 이제 전선으로 돌아가 봐도 전망이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제부터는 똑같은 장면들만 계속해서 찍을 게 뻔하다고. 장애물 뒤에 웅크린 병사들하며, 굉음을 내며 전진하는 탱크들하며, 미친 듯이 손을 흔드는 사람들 무리는 죄다 내가 어디에선가 이미 찍었을 법한 사진들의 판박이에 지나지 않을 거라고. p240
이제는 멈출때도 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