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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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내가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내가 살던 동네의 아이들은 대부분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동네 골목 어딘가 건물을 짓기 시작한 공사판에서 벽돌 빻아 소꿉놀이를 하거나 모래를 쌓아 성을 만들고 두껍아 노래를 부르며 뛰어놀기 바빴다. 당시 가장 좋은 놀이기구는 낡은 씽씽카였다. 그걸 제외하면 일부 잘사는 집 아이들만이 TV로 조작하는 슈퍼마리오를 가지고 놀 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같은반 친구들이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내 말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서야 누구나 나와 같은 어린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유치원이라는 곳에 다니긴 했다. 5일인가 7일 속성반이었는데 그 짧은 기간동안 한강에 가서 유람선도 타고 원생들을 모아놓고 졸업사진 비슷한것도 찍었다ㅋ 그때는 지금처럼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배워야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하고싶다고 혹은 하기 싫다고 때를 쓰며 어린아이답게 선택하고 거부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스스로 퀴즈신동(!)이라고 철썩같이 믿게 된것은 유치원에 다녀야할 나이였다. 가게에 모인 손님들과 TV에서 장학퀴즈를 보고 있는데 어린 아이가 몇문제를 맞히니 어른들이 귀여워서 칭찬한것을 가지고 나는 좀 우쭐해졌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하고 집적거리게 된것 같다; 요즘은 아쉽게도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깨닫게 되었지만 TV에서 하는 1:100이라는 프로는 종종 보고 있다.(1명의 도전자와 100인이 떨어질 때까지 10개의 문제를 맞히는 프로그램. 단계가 올라갈수록 금액이 높아진다.) 가족과 둘러앉아 퀴즈를 맞히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순간은 퀴즈의 단계를 성큼성큼 올라가는 것과 참가자의 IQ나 학력 따위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이다. 한번은 엘리트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1인으로 참가했는데 안타깝게도 2번 문제에서 탈락했고 언젠가는 엘리트 100인 중에 절반 이상이 낮은 단계 문제에서 와르르 탈락했었다. 나도 몇 개나 맞히는 문제를 대한민국 2%의 인재일 저 사람이 저렇게 떨어지다니 하고 나는 또 한번 으쓱했고, 최후에 남은 1인이 평범한 사람일 때에는 또 한번 뭔지 모를 스릴을 느꼈다.

 Q&A를 쓴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는 인도 출신으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다. 인도에는 아직도 계급주의가 사람들이 사는데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의 프로필을 보고 인도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외교관 출신이 쓴 소설이겠거니 지레 짐작을 했다. 천만다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비카스 스와루프에게 경의를 표했다. (앗, 다시 생각해보니 빵빵한 집안 출신에, 외교관으로 일하며 등따숩게 사는 사람이 글까지 잘쓰다니 너무 불공평한것 같기도 하다ㅋ)


 

 ‘람 모하마드 토마스‘라는 별별 종교가 뒤섞인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고아로 버려져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그가 인도에서 태어났고, 인도 출신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주인공임에 감사한다. 아마 나라면 그런 삶을 살면서 한우 고기에 마블링 쏙쏙 박아넣은 것처럼 위트 넘치게 이야기를 풀어놓지는 못하리라. 토마스는 ’W3B:누가 십억의 주인이 될 것인가?’라는 퀴즈쇼에 나가 12문제면 끝날 퀴즈를 13문제나 맞히고는 우승하여 10억루피 상금을 탔다. 그러나 퀴즈쇼 는 (참가자만 빼고) 철저하게 각본에 의해 진행되어야 했고, 예기치 못하게 10억루피를 지급하게 생긴 담당자들은 토마스가 고아에 빈민굴 출신이고 바텐더를 하는 어린 소년에 불과한데 1등을 할리 만무하다며 속임수를 쓴게 분명하다고 경찰에 고발한다.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그에게 변호사 스미타 샤가 신문에서 토마스의 이야기를 읽었다며 찾아와서 그를 돕겠다고 나선다. 토마스는 변호사에게 자기가 어떻게 퀴즈쇼 문제를 모두 맞히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인데 그 우여곡절이 얼마나 재미있고 안타깝고 놀라운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마지막 장의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 누구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 될 것이다.


 

 작가는 퀴즈쇼의 우승자는 언제나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비틀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퀴즈쇼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인들의 고급 두뇌가 아니라 생활에서 체득하는 지혜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다. 내가 TV 퀴즈쇼를 보며 퀴즈를 곧잘 맞히고, 영재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1등 상금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퀴즈는 지식 싸움이 아닌 경험 싸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토마스의 인생은 시작부터 쪽박이었지만 그의 어제는 한날씩 모여 오늘의 대박을 만들었다. 소문만큼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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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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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

 

 유령은 아니었을까. 외원에서의 우연한 첫 만남을 지켜보면서 이 여자, 유령은 아닐까 했다. 늦은 시간, 책을 읽느라 혼이 쏙 빠졌던 하야카와는 공원지기의 문 닫을 시간임을 알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공원지기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찬 바위 위에 걸터앉은 여자 쪽이었는데 여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 하야카와가 자전거를 끌고 다가가서 다시 한 번 공원지기의 말을 반복해보지만 여자는 햐야카와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조용하다. 자전거가 요란하게 쓰러질 때에도 여자는 놀라지 않는다. 무척이나 조용한 여자여서 ‘알고 보니 유령이었다.’로 끝나는 전설의 고향이 떠올랐다. 첫 데이트 때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종이 냅킨에 짧은 글을 주고받는다. 헤어질 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서도 글로 약속시간을 정했다. 그제야 나는 여자가 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다시 맨 앞 페이지의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뚜렷하게 여자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는 곳은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이 그랬듯이 여자가 그렇다는 것도 마치 하야카와 혼자 알고 넘어가듯 조용했다. ‘교코’라고 적어준 이름 하나로 고요한 사랑에 빠진 하야카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 조금 어색할 뿐 큰 불편함 없이 잘 지낼 수 있다. 듣지 못해서 위험에 빠질 때나 곤란함을 겪을 때에도 교코와 오래 무리 없이 사귈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았다. 매우 조용하지만 샛길로 가지 않는 정직한 사랑이랄지, 그런 느낌이 강했다. 기다리지만 기다려주기를 바라지 않고, 그 자리에 없어도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바쁘더라도 며칠이나 연락이 없었다면 나는 하야카와가 만났던 여자들처럼 화를 냈을 것이다. 교코는 소리를 지를 수 없지만 화를 낼 수는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교코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에도 하야카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무심코 큰소리를 내거나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하던 하야카와는 어느새 말이 없고 듣지 못하는 교코와 가까워져 있었다. 종이에 적어서 마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말을 적당한 표현을 써서 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 하야카와는 주절주절 말로 설명하면 쉬울 것을 글로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곤 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교코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여러 말을 문자로 썼다가 모두 지우고는 ‘보고 싶어’라고만 적었다. 문득 살면서 얼마만큼 해놓고 후회할 말을 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들어놓고도 속 시원하지 않았었는지를 떠올렸다. 전하고 싶은 말을 콕 집어서 말해도 그 안에 담긴 말이면 충분한 그런 말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여기에는 ‘사랑해’라는 공식 같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일상적인 말이 간단히 오고갈 뿐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다보면 뭉클한 마음에 목에 무언가 잠기는 기분이다.


 

 커다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극히 소소하고 조용한 일상을 정말 리얼하고 정갈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는 일본작가들이 눈에 띈다. 이번 소설을 읽고 나서도 너무 단출해서 쉽게 질려하곤 했지만 쉬어가는 마음을 원한다면 언제나 낮잠 같은 휴식을 주는 일본소설의 매력을 느끼면서 조금 질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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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쓰기 특강 : 동화작가 임정진의 실전 노하우 - 소통과 글쓰기 3 아로리총서 9
임정진 지음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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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어릴 때 부모님께서 닭이니 병아리니 하는 그림과 함께 ‘닭’, ‘병아리’ 라고 적힌 책을 한 권 사주신 것이 처음 받은 책 선물로 기억한다. 그 외에 <파랑새>, <성냥팔이 소녀> 같은 동화책도 선물 받은 후 종이가 떨어져나가도록 읽었다. 부모님은 주로 낱권으로 된 책을 한 권씩 사주셨기 때문에 나의 책장에는 다른 아이들처럼 전집 같은 것은 없었다. 늘 짬이 나면 서점에 직접 데리고 나가서 책을 골라주시거나 스스로 고르게 하셨기에 아빠의 책장 한 쪽에 자리 잡은 ‘내 자리’ 한 칸 에는 어린 아이가 읽지 못하는 소설류도 몇 권이나 꽂혀 있었다. 어릴 적 무엇도 모르고 제목에 이끌려 무작정 고른 책도 19금 성인용으로 분류된 것이 아니라면 사주시곤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모은 몇 권의 책은 내 보물이 되었고 책을 스스로 골라 읽는 재미도 일찍 알게 되었으며 장르 구분 없이 호기심을 가지게 되었다. 어릴 때에 읽었던 동화책은 아직도 책장에 전부 꽂혀 있다.



 

 요즘에는 꽤 많은 종류의 동화책이 읽히고 어른들도 동화 마니아가 있을 정도이지만 예전엔 동화책이라고 하면 그야말로 어린이가 읽는 고전동화 쯤으로 생각하기 쉬웠다.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는 더 이상 동화책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던 중 같은 반 친구와 서점에 갔다가 친구가 동화책 코너에서 한참을 머무르는 것을 보고 의아했었다. 친구의 꿈은 동화작가였다. 주변에 책 읽기를 좋아하고 소설가가 되는 것이 꿈인 사람은 꽤 있었지만 동화작가라는 장래희망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작은 동네 서점도 꽤 많이 있어서 책을 고를 때에는 그곳으로 갔었고, 종로의 대형 서점에 다니게 된 것은 중학생이 되어서부터였다. 그것도 문제집이나 소설 코너가 주 동선이었다. 난생처음 대형 서점의 동화책 코너를 둘러본 것이었는데 그렇게 많은 종류의 동화가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친구는 자기가 좋아하는 동화작가를 이야기 해주고, 유명한 동화책 출판사 까지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는 아직 동화의 범위가 좁은 편이지만 외국에는 동화책을 쓸 수 있는 여건이 잘 되어있다면서 어른들까지 읽을 수 있는 동화를 쓰고 싶다고 했었다. 친구가 소개한 동화책 중에는 ‘소설’이라고 분류해도 좋을 정도의 책도 있었다. 수능을 마친 후에도 친구는 한 권의 동화책을 선물해 주었고 그 책은 지금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그 후로도 가끔 눈에 띄는 동화를 손에 쥐고 읽곤 하지만 즐겨 읽는 편은 아니었는데 ‘동화쓰기특강’이라는 책을 보자마자 그 친구가 생각났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주제 고르기, 동화의 주 독자층인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기 등의 내용을 읽으면서, 어른에게는 오히려 소설쓰기보다 어려운 것이 동화쓰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릴 때 경험했던 기억에 남는 일을 나열해보라는 예제를 읽고 써보았는데 15가지를 채우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아이들은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라는 말이 있다. 동화작가를 꿈꾸었던 친구의 곁에 있으면 늘 6살 어린이처럼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늘 어린소녀의 마음으로 살기를 꿈꾼다고 말하던 중년의 여배우 모습도 떠올랐다. 특강을 읽고 나서 동화를 뚝딱 써내려갈 자신은 없지만 할머니가 되어서도 동화책을 읽으면서 즐거워하는 어린아이처럼 살아야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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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할머니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나라 요시토모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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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모토 바나나 하면 '키친'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나는 일단 '하치의 마지막 연인'이 생각난다. 바나나의 소설 중 가장 처음 읽은 책이기도 하다. 요시모토 바나나 스러움을 지겹다, 상업적이다, 별거 아닌것을 포장만 했다,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나도 일부 동의하지만 '하치의 마지막 연인'을 읽었을 때에만 해도 그런 감성을 접한 것은 처음이었고 소녀의 두근거림을 느꼈었다. 그래서 당시에 책을 선물할 일이 생기면 그 책을 고르곤 했다. (물론 여자에게만)

 

 '일본소설' 중에 요시모토 바나나를 포함한 그녀 시대의 여류작가들은 비슷비슷한 감성을 지녔다. 그래서 그게 붐이 되어 빵빵 터질때도 있지만 쌓이고 쌓이면 남는것도 없고 진부하다는 생각도 들만하다. 그녀들의 소설은 '일상'과 닮았다. 평범하게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생각하기에는 평범 축에도 못 끼는 것 같아 평범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처럼 일상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지만 우리의 하루 중 속속 박혀있지 않은가. 그런 일상이 반복되면 '지겹다'고 하는 게 사람 변덕인 것처럼 이런 잔잔하고 감성적인 책 또한 단물이 빠지면 홀대하게 되나보다.

 

 요시모토 나라의 일러스트와 아르헨티나 할머니라는 이국적인 제목 때문에 출간 직후부터 사서 읽고 싶었는데 지금까지 방구석에 꽂아두고 있었다. 엄청 얇은 책이라서 순식간에 읽을 수 있는데도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도 비슷한 감성에 지쳐서 조금 무게 있는 책을 읽고 싶었던 때문이다.

 

 이 책은 꾸준하게 잘 팔렸고 바나나의 팬이 아닌 사람 중에도 읽은 사람이 꽤 있을듯 한데 막상 주변에서 읽은 사람에게 '어때?'라고 물으면 '별로야'라는 대답을 들었다. 한 명은 '그냥 그래요' 라고 말해서 개인 취향이겠지 했었다. 그런데 어제 시린 발을 녹여가며 이불 위에서 이 책을 읽고 있는데 스포일러로 명 재촉하는 나쁜사람마냥 실실 웃으면서 '그거 재미없어'라고 잘라 말했다. 그것도 몇번이나 옆에 와서 '재미 없다니까' 라고 해대서 그래도 마음먹고 일년 넘게 벼르다가 읽는건데 짜증이 조금 났다. 실은 절반 이상 읽을 때에도 오랜만에 접하는 요시모토 바나나의 감성에 살살 녹다가 혼자서 소설 속 풍경을 상상하기도 하며 읽었기에 '역시 책은 개인 취향이야'라며 오히려 흐믓했다.

 

 소설 내용 중에는 말도 안되는 것이 조금 끼어있기도 하지만 소설이니까, 하고 용서할 수 있는 정도였다. 석공 아빠와 엄마, 나 이렇게 살고 있다가 엄마가 돌연 죽었는데 아빠는 엄마의 임종도 지키지 않고 도망쳤다. 어릴때부터 아이들이 '아르헨티나 할머니'라고 부르는 요상하게 화장을 하고 옷을 입은 여자가 사는 집이 있다. 그 여자는 옛날에는 탱고를 가르치며 살았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하지 않고 집 밖에는 꼭 필요한 때 아니면 나오지 않는다. 그 여자에 대해서는 무수한 소문이 있다. 그런데 도망간 아빠가 그 여자네 집에 산다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에는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 집에 찾아가보니 정말 아빠가 있었고,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실은 50대의 아줌마로 겉모습은 괴상한면이 있으나 마음이 따뜻한 여자다. 그리고 그녀의 집도 낡고 더럽고 냄새가 나지만 오분정도 있으면 금새 익숙해지고 포근함을 느낄 수 있다. (이 아이 적응이 무척 빠르다 싶을 정도로 집이 포근한건지 아이가 빠른건지.) 죽은 엄마 생각은 잘 안하고 아르헨티나 할머니가 자꾸봐도 예쁘다고 해복해하는 아빠,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 배다른 동생이 태어났지만 덤덤하고 기쁘기까지 한 주인공. 게다가 아르헨티나 할머니는 그 후 6년만에 죽는다. 엄마가 죽을 때 주인공 혼자 엄마 곁을 지켰는데 그 때에 받은 충격 때문에 강해졌다고는 하지만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음에도 별다른 갈등 없이 받아들이는 모습이 낯설었다. 짧은 소설이라 급한 진행, 그리고 결말도 약간 벙쪘다. 이런점 때문에 다들 별로라고 했나 싶다. 그래도 이런 감성은 오랜만이고,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것이라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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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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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동안 ‘한국 문학의 위기’라는 기사도 많이 뜨고, 그 동안은 일본소설이 와르륵 쏟아져나왔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젊은층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일본의 문학이다. 젊은이의 감각을 자극하는 노곤하고 말랑한 일본소설. 나도 한때 그런 매력에 빠져 일본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런 감성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매일 달달한 케이크를 먹고 살수는 없는 것처럼 내 감성의 주식은 역시 밥이라는 것 말이다. 

 지난 9월에 읽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기억하고 있다. 달달한 일본소설을 읽는 것이 지겨워지던 때이다. 비슷한 내용과 같은 느낌의 반복. 가장 큰 문제는 묵직한 주제의 부재였다. 뚜렷한 주제 없이 감각과 상상력만으로는 내 목마름을 채우기 부족했다. 이렇게 일본소설 자체를 의심하게 된 상태에서 손에 쥔 책이 예상 밖으로 재미있었다. 일본작가가 가진 강점인 상상력을 중심으로 가볍지만 뼈대있게 건들여지는 유머덕분이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모리미 도미히코’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한국문학의 위기, 그 후에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소설의 무게중심이 조금 가벼운 쪽으로 넘어가면서 젊은층에서도 한국소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며칠 전 한 해를 정산하는 ‘TV 책을 말하다‘에서 한 패널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소위 칙릿이라는 장르도 그렇고 판타지도 그렇고 ‘아류’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무슨 책이든 읽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인기 소설들 중 일부는 ‘함량미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편 없어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소설은 그동안 순수문학 밖에 있는 ‘장르소설’ 등을 등한시하거나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독자층도 다양해지고 있고 순수문학 이외의 것을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록 이제 시작이지만 토대를 잘 닦아서 좀 더 섬세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로 깜짝 놀랄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와 문학이 탄생했으면 한다. 

 생각나는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 이야기를 벗어나버렸다. 이 작가의 책은 호불호가 비교적 명확히 갈리는 편인듯하다. 오타쿠 같은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고, 주면 인물의 우스꽝스럽고 귀엽기도 한 모습을 묘사하고, 주인공 혼자서 말도 안되는 공상에 빠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망상은 어느 햏자(DC 폐인이라든지...)의 말투와도 닮았고, 여느 청년의 모습과도 닮았다. 끝없는 혼잣말 같으면서도 슬며시 입을 가리고 큭큭 웃게 되는 이야기가 꽉 차있다. <태양의 탑>은 모리미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일부 엮이는 내용이 있다.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고, 남자 주인공이 졸졸 따라다니며 ‘연구’하는 여자주인공도 같은 여자가 아닌가 싶다. ‘태양의 탑’은 처녀작이라서 그런지 ‘밤은 짧아...’보다 묘령의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대학 동아리에서 사귄 첫 여자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네키네코’를 사주었다가 ‘쓸데없는 것으로 방이 지저분해지는 것이 싫다’는 말을 듣고 버림 받은 남자. 엑스포에 데이트를 하러 갔다가 본 ‘태양의 탑’에 반해서 매일 밤 전차를 타고 탑을 보러 다니는 여자. 마네키네코로는 갑자기 차인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주인공은 전여친의 뒤를 밟으며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한다. 이 책은 그 수상한 연구 도중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중심내용은 마네키네코를 선물하고 돌연 차인 남자가 실연당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여자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차차 정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내용은 맨 뒤에 가야 정리가 되고 90퍼센트 이상은 주인공의 상상력과 엉뚱함에 의해 진행된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읽는 사람도 배경과 인물, 사건을 상상하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결말 부근에서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해 회상하는 한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읽을 때는 왠지 뭉클했다.

 ‘태양의 탑’으로 검색해보니 재미있게 생긴 탑의 사진이 나온다. 책 표지에 그려진 탑의 모습과 꼭 닮았지만 실제 사진으로 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다.
느끼한 감성은 쏙 빼고 담백하고 즐거운 상상이 가득 담긴 책이었다. 

 

 

엑스포 홈페이지 http://park.expo70.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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