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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 밀리어네어 - Q & A
비카스 스와루프 지음, 강주헌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누군가 ‘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고 말했을 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내가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내가 살던 동네의 아이들은 대부분 유치원에 다니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동네 골목 어딘가 건물을 짓기 시작한 공사판에서 벽돌 빻아 소꿉놀이를 하거나 모래를 쌓아 성을 만들고 두껍아 노래를 부르며 뛰어놀기 바빴다. 당시 가장 좋은 놀이기구는 낡은 씽씽카였다. 그걸 제외하면 일부 잘사는 집 아이들만이 TV로 조작하는 슈퍼마리오를 가지고 놀 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어서 같은반 친구들이 유치원을 다니지 않았다는 내 말에 놀라는 모습을 보고서야 누구나 나와 같은 어린시절을 보낸 것은 아니구나 하고 생각했다. 사실 나는 유치원이라는 곳에 다니긴 했다. 5일인가 7일 속성반이었는데 그 짧은 기간동안 한강에 가서 유람선도 타고 원생들을 모아놓고 졸업사진 비슷한것도 찍었다ㅋ 그때는 지금처럼 어린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배워야한다고 강요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하고싶다고 혹은 하기 싫다고 때를 쓰며 어린아이답게 선택하고 거부하기만 하면 되었다.
내가 스스로 퀴즈신동(!)이라고 철썩같이 믿게 된것은 유치원에 다녀야할 나이였다. 가게에 모인 손님들과 TV에서 장학퀴즈를 보고 있는데 어린 아이가 몇문제를 맞히니 어른들이 귀여워서 칭찬한것을 가지고 나는 좀 우쭐해졌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알고 싶어하고 집적거리게 된것 같다; 요즘은 아쉽게도 난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고 깨닫게 되었지만 TV에서 하는 1:100이라는 프로는 종종 보고 있다.(1명의 도전자와 100인이 떨어질 때까지 10개의 문제를 맞히는 프로그램. 단계가 올라갈수록 금액이 높아진다.) 가족과 둘러앉아 퀴즈를 맞히는 것도 즐겁지만 무엇보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순간은 퀴즈의 단계를 성큼성큼 올라가는 것과 참가자의 IQ나 학력 따위는 별로 관계가 없다는 것을 발견할 때이다. 한번은 엘리트라 해도 손색없을 정도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1인으로 참가했는데 안타깝게도 2번 문제에서 탈락했고 언젠가는 엘리트 100인 중에 절반 이상이 낮은 단계 문제에서 와르르 탈락했었다. 나도 몇 개나 맞히는 문제를 대한민국 2%의 인재일 저 사람이 저렇게 떨어지다니 하고 나는 또 한번 으쓱했고, 최후에 남은 1인이 평범한 사람일 때에는 또 한번 뭔지 모를 스릴을 느꼈다.
Q&A를 쓴 작가 비카스 스와루프는 인도 출신으로 외교관으로 일하고 있다. 인도에는 아직도 계급주의가 사람들이 사는데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고 한다. 나는 작가의 프로필을 보고 인도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난 외교관 출신이 쓴 소설이겠거니 지레 짐작을 했다. 천만다행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비카스 스와루프에게 경의를 표했다. (앗, 다시 생각해보니 빵빵한 집안 출신에, 외교관으로 일하며 등따숩게 사는 사람이 글까지 잘쓰다니 너무 불공평한것 같기도 하다ㅋ)
‘람 모하마드 토마스‘라는 별별 종교가 뒤섞인 이름을 가진 주인공은 고아로 버려져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그가 인도에서 태어났고, 인도 출신 작가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의 주인공임에 감사한다. 아마 나라면 그런 삶을 살면서 한우 고기에 마블링 쏙쏙 박아넣은 것처럼 위트 넘치게 이야기를 풀어놓지는 못하리라. 토마스는 ’W3B:누가 십억의 주인이 될 것인가?’라는 퀴즈쇼에 나가 12문제면 끝날 퀴즈를 13문제나 맞히고는 우승하여 10억루피 상금을 탔다. 그러나 퀴즈쇼 는 (참가자만 빼고) 철저하게 각본에 의해 진행되어야 했고, 예기치 못하게 10억루피를 지급하게 생긴 담당자들은 토마스가 고아에 빈민굴 출신이고 바텐더를 하는 어린 소년에 불과한데 1등을 할리 만무하다며 속임수를 쓴게 분명하다고 경찰에 고발한다. 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던 그에게 변호사 스미타 샤가 신문에서 토마스의 이야기를 읽었다며 찾아와서 그를 돕겠다고 나선다. 토마스는 변호사에게 자기가 어떻게 퀴즈쇼 문제를 모두 맞히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 소설은 바로 그 이야기를 풀어놓은 것인데 그 우여곡절이 얼마나 재미있고 안타깝고 놀라운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특히 마지막 장의 이야기에서는 얼마나 놀랐는지... 아마 누구라도 처음부터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는 책이 될 것이다.
작가는 퀴즈쇼의 우승자는 언제나 예측 가능하다는 것을 비틀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인생이라는 퀴즈쇼에서 필요한 것은 지식인들의 고급 두뇌가 아니라 생활에서 체득하는 지혜일지도 모른다고 이야기 했다. 내가 TV 퀴즈쇼를 보며 퀴즈를 곧잘 맞히고, 영재 출신이 아닌 평범한 사람이 1등 상금을 획득할 수 있는 것도 퀴즈는 지식 싸움이 아닌 경험 싸움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토마스의 인생은 시작부터 쪽박이었지만 그의 어제는 한날씩 모여 오늘의 대박을 만들었다. 소문만큼이나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다.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주저없이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