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산 고양이 집 나가다
전지영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4년 7월
평점 :
품절


날씨 따땃하고 맑으며 가끔 흐리고, 가끔 비옴.


내 인생 최대의 고비였으며 자아상실로 극심한 고통을 호소하던 그날(언제게?).
바로 집으로 가기는 민망스럽기도 하고 책으로 구원받는 영혼이라 종로에가서 책을 골랐다.
암흑기였던 당시 그 정신으로 책을 고를 여유가 있었을까 싶다.
암흑기를 끝내면 무조건 '떠나겠다'고 작정하고 있던 그때 내가 고른 책은 당연히 여행서였다.
지금도 그닥 가고싶은 곳은 아닌 뉴욕이 왜 그때는 그리도 가고 싶었을까.
그래. 알록달록한 색을 하고 있는 일러스트가 독특한 책 <뉴욕, 매혹당할 확률 104%>을 읽은 건 그날이었지.
S역으로 와서 스타벅스에 앉아 책 한권을 다 읽도록 일어서지 않았다.
책을 읽다가 카페 안 조명에 눈이 침침해지면 함께 사온 500원짜리 작은사이즈의 노트에 이제 어떻게 살것인가에 대한 계획을 끄적였다.
처음 만난 탄산 고양이.
처음 마신 핑크 레모네이드.
처음 겪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한해 하고 반년 후 인 5월초.
싸늘했던 겨울도, 새침했던 봄도 다 가버리는 듯 맑은날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늘이 하얗게 질리더니 비를 토해낸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처럼, 맑은 날씨의 한줄기 비처럼
그날 스타벅스에서의 계획들과 뉴욕은 어디로 간걸까.
한결같은 나의 생활에도 무언가 상콤하게 변화를 주고싶은 요즘, 나는 여행서를 골라들었다.

<탄산고양이 집 나가다>

탄산고양이 전지영님의 이력은 독특하다. 항공사 승무원으로 일하다가(봐라봐라, 여기 솔깃하는 사람 많다.) 얼마 안되어서 관두고 대충 일러스트 그리면서 여행이나 다니면서 고양이나 키우면서 살고 있다.
자주 결혼압박을 받는 나이가 되었고 탄산고양이 답게 톡톡튀는 여행기를 쓸줄 안다. (물론 여기서 '대충'이란 보는 관점에 달려있다.)

그해 늦가을 스타벅스에서 만난 탄산고양이는 나의 우상.
'그래 나도!' 라고 소리치며 박수를 보내고 싶은 그녀의 당돌함과 씩씩함, 엉뚱함...
역시 세월이 변하면서 사람도 변하나보다.
겨우 한살 반 더먹었을 뿐인데도 여행기 속의 그녀가 달리보인다.
(시간상으로 볼 때 이 책이 뉴욕, 매혹당할 확률 104%보다 일찍 출판되었다. 그리고 나는 거꾸로 이 책을 나중에 읽었다.)
지금은 마흔을 바라보고 있을까.
지금도 이렇게 발랄하게 살고 있을 탄산고양이를 생각하니 왠지 이질적이다.
점점 '나도 별수없는 인간이다'라고 느낄 때가 바로 이럴때다.
현실에 안주하고, 변화를 회피하고, 젊다는 것을 두려워한다.
1년 반 전에 만났을 때와 달리 많은 공감을 할 수 없었던 것도 그 이유일까.

일주일 넘게 책을 붙잡고 있었지만 진도가 안나간다.
'이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여행서'라는 것이 나의 느낌이다.
일기쓰듯 써내려간 것이라서 특별히 귀한 정보를 얻기에도, 다른 성향의 사람이 공감하기에도 어려울 것이다.
그리고 가끔 노처녀의 푸념과 상실을 해학으로 승화시키는 내용에 피식하긴 하지만 그것도 이미 '너무 오버했다'싶을 정도.
나 너무 매말랐나봐ㅠㅠ

'도쿄'여행편에서는 도대체 도쿄가서 뭐한거야? 싶어서 책을 덮어버릴까 했고
'뉴질랜드'여행편에서는 그나마 트래킹 하는 여정이 볼만했지만 결국에는 '뭐야 이게 끝이야?' 하고 마는 결말없는 드라마같은 느낌이다.
맨 뒤에 실린 'Friends-길에서 만난 친구들'에 실린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의 사진과 '에필로그'의 글이야말로 이 책이 왜 쓰여졌는지 보여주는 글인것 같다.
그 앞의 250쪽에 달하는 여행기는 맨 뒤의 10페이지를 위해 있는 글 같달까.

'영어도 못하는 동양인 여자가 혼자 떠나는 배낭여행'이라는 주제로 볼 때 탄산고양이의 여행이 순탄치 않았을 것은 이해가 된다.
나 또한 외국 여행가서 외국인과 대화한 것은 손에 꼽을 정도이고 조선족이 하는 민박집에서는 왁자지껄한 한국인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았으니까.
(당시에는 외국 가서 한국인 민박 하는 것에 대해 일찌감치 불만?이 있었음. 지금 생각하면 스스로 웃기는거지만;)
하지만 여행기를 쓸 정도의 여행이라면 최소한 자신의 여행기를 읽을 독자를 좀 배려하면 안되겠니?
아니면 정말로 일기로 혼자만 가지고 있던가.
혼자 트래킹 씩이나 했으면서 통성명을 한 사람은 손에 꼽고
숙소에서도 입을 거의 다물고 있고 주로 '관찰'만 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데 이건 여행이 아니라 관광(see라는 의미에서)이나 공간이동 정도나 될까.

뉴질랜드에 다녀온 친구들의 여행담 때문에 '뉴질랜드'하면 꿈의 파라다이스를 떠올리던 나는 이 책 때문에 도리어 사이다에 탄산이 팍 빠진 느낌이다.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생기는 '여행가고싶어 병'을 유발하지 않는 책이었음에 감사해야하는 것일까.

그나마 책을 읽은 일주일에 대해 위안이 되는 것은 마지막 다섯 장의 사진들(앞의 내용들을 상기 시키며 혼자 웃었다ㅋ)과 에필로그.

그리고 그녀가 중얼대듯 말했던 밑줄 그을만한 이야기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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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ne 2007-08-12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을 때 어떻게 이런 걸 출판할 용기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문장력이나 내용이 형편없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저 역시 "상당히" 실망하면서 읽은 기억이 납니다 이런 개인적인 일기 수준의 책도 출판해 줄 정도로 대한민국 출판사의 문이 확 열려 있는 건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