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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평점 :
한비야 이 아줌마 우리엄마 또래다. 그냥 지나쳤을 그녀의 나이가 새삼 느껴졌다. 우리엄마 나이또래... 여느 아줌마잖아. 어디서 이런 힘이 솟아나는거지? 역시 한국 아줌마의 힘은 강한건가.
긴급구호, 의료봉사 등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잘 알고 있다. 병원에서 밤낮을 꼴딱 새며 죽어가는 사람들 가슴을 짖눌러가며 CPR을 했던 새벽들을 기억하는 나는 더욱 잘 알고 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들 옆에서 강하지 않으면 같이 약해질 수 밖에 없다. 처음엔 되레 강해진다. 내가 저 사람들을 살려야지, 내가 밝아져서 저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어야지. 시간이 지날수록 나 혼자의 힘은 너무 작아지고 스스로 지쳐버려서 곧 나 또한 아파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 고통을 함께 느끼고 경지에 이르면 그녀처럼 강해지는걸까.
한비야님은 에티오피아, 방글라데시, 몽골에 후원아동이 한명씩 있다. 그 중 방글라데시의 아도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의아한 것 중 하나, 그녀는 어떻게 자신의 후원아동이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 후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를 그렇제 자세히 알 수 있을까?
현재 월드비전에서 일하고 있는 그녀로서는 원드비전의 시스템을 알고 있을것이다. 해서, 보통의 후원자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알고 있기 때문일까.
나는 방글라데시의 아동을 후원하고 있다. 고등학생이었을 때 처음으로 후원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마음을 굴뚝같았지만 학생의 신분이었기 때문에 내가 후원하는 돈은 결국 부모님의 돈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 돈을 벌게 되면 그 돈으로 가장 먼저 후원금을 내야지 하고 결심했던 것이다. 졸업 전에 나는 취업을 하게 되었고 졸업 후 직장에 다니고 첫 월급을 받고 가장먼저 한 일이 적금통장을 만드는 것과 후원아동결연을 한 것이다.
몇해전에 TV에서 방글라데시의 모습이 나왔는데 당시 내가 본 그 나라의 모습은 천국이었다. 극빈국에 속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우기가 되면 빗물이 그대로 새는 나무로 헐겁게 지은 집에 가족과 살고 있었다. 그 집이라는 것도 너무 헐거워서 무인도에서 대강 집은 집같았다. 더 놀랐던 것은 화면에 잡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너무도 행복해보인다는 것. 저 사람들은 끼니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가난한데 어떻게 저토록 아름답게 웃을 수 있을까. 아니나다를까, 방글라데시는 가난한 나라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나라에 속하지만 국민행복지수 1위의 행복한 나라였다.
그때 TV로 본 방글라데시를 잊지 못하고 나는 줄곧 그 곳에 사는 아이와 결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리고 역시 지금의 방글라데시 소년을 만났다. 처음 받아든 아이의 사진을 보고 난 정말 기분이 좋아졌다. 아이는 후원자에게 보낼 사진을 찍기 위해 사람들이 때깔곱게 머리를 빗기고 교복(인것 같음)도 각이지게 입힌 모습 그대로였다. 뒷배경도 파란 벽앞에서 증명사진 찍듯이 찍은 사진이었는데 '보여주기'위한 옷차림과 달리 아이의 표정이 참 재미났다. 11살된 아이의 눈은 또랑또랑했고, 얼굴엔 특유의 장난끼가 가득하다. 역시나 좋아하는 것은 '축구'다. 나도 사진을 보는 순간 '아 너는 참 건강하게 뛰어놀겠구나.' 싶었으니까. 나는 처음 그 아이를 소개받은 후 부터 줄곧 '우리 아들'이라고 부른다. 동생이라고 하기엔 왠지 징그럽고(난 늦둥이 동생은 싫어ㅋ) 아이가 참 똘똘하게 생겼으니 딱 내 아들이 좋겠다 싶다.
크리스마스때에도 선물금 2만원을 월드비전으로 보내어 의자, 사탕, 축구공, 비누 등을 보냈다. 많지 않은 돈으로 아이와 아이의 가족들도 참 좋아할 것을 생각하니 나도 기쁘다.
사실 월 2만원이라는 돈은 적다면 적은 돈이고 많다면 많은 돈이다. 나같은 짠순이에겐 더 그렇다. 월급을 받을 때는 적게 느껴졌던 돈이 일을 쉬는 요즘은 엄청난 액수로 느껴질때가 있다. 하지만 따져보면 일년에 24만원의 돈이니 술값, 밥값, 쇼핑값 아끼면 된다.
앞서 내가 이상하다고 한 것은 비록 내가 아이를 후원한지 1년이 조금 안되었으나 월드비전에서 보내오는 아동에 대한 소식이 너무 빈약하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내가 돈을 이렇게 보내는데 당신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려줘야하는거 아니냐 라는 의미가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우리 큰아들이 정말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후원은 단지 개인 대 개인의 일이 아니다. 우리가 1991년까지 해외원조를 받았다고 하는데 그에 앞서서 전후에 받은 원조만 생각해보더라도 후원, 원조라는 개념의 중요성은 국가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나 한사람으로 인해 한국과 방글라데시와의 친교를 쌓는 계기가 된다면 너무 큰 과장일까.
다른 나라의 아동을 후원하는 친구와 함께 언젠가 아이들을 만나러 가고 싶다. 나는 기본적으로는 아이들을 그렇게 예뻐하지 않았는데 역시 나이를 한두살 먹어가니 예쁜 아이들은 예쁘다.ㅋ
어서 타라줄의 나라에 가서 아이의 손을 꼭 잡아보고 싶다. 아이의 가족들도 만나고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