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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 출간된 알랭 드 보통의 책 중 처음으로 읽은 책.
알랭 드 보통은 일종의 도전이었기에 쉽게 그의 책을 집어서 읽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평가라던가 그의 책에 대한 서평이 이미 무언가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쩐지 그의 책은 시간을 한참 두고 몽땅 탐독을 해야할 것이라는 의무감을 안겼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동물원에 가기'라는 에세이가 신간목록에서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이전에 가졌던 의무감, 몰아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책을 골라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은 150쪽도 되지 않는 얇은 두께에 안에는 보기 좋게 정렬된 인쇄체가 보인다. 그 배열은 매우 자유로워보이는데 위 아래도 큼직한 빈 공간을 적절히 이용해 놓아서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런 빈 공간들과 동화같은 그림까지 합쳐져서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고 안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파란색 양장 표지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책의 두께와는 달리 그 안의 내용은 매우 사색적이다. 물론 이 책은 개인의 서정이 담긴 에세이에 불과하지만 한 단어, 한 문장을 스킵하며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모두 매력적이었다. 8쪽부터 140쪽까지 모두 암기해버리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다. (부끄럽지만)여지껏 감동 받았던 책 속의 어느 문장도 완벽하게 외우지 못하는 내가 말이다.
맨 처음 나는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와 동일시 하게 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그들의 에세이에 동일성이 보였던 것이다. (하루키 에세이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다.) 그렇지만 분명 둘 사이에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하루키는 섬세하지만 남성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그래서 줄곧 '이 남자가 정말 중년을 넘기고 있단 말이지'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의 경우는 그 섬세함이 조금 다르다. '쨔식이 예민해가지고는..' 이런 성차별적인 발언이 튀어나오게 될 정도로 그는 여성스러운 섬세함을 가진 것 같다.
책 안에 등장하는 매 에피소드마다 내가 공감할만한 것들이 한가득이어서 읽는 내내 나는 매우 즐거웠다. 더 이상 그가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10)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16)
우리가 그 그림에서 반기는 것을 제재라기 보다는 분위기다. 색과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감정적 태도다. 우리는 물론 그런 감정으로부터 곧 멀리 쓸려 내려갈 것임을 안다.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17)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도 쉬워진다. (19)
이따금씩 건물 내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쉭 하고 솟아오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호텔 방에 누워 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금을 그을 수 있다. 우리 경험에서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넓은 영역 위를 날아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일속에서는 이르지 못했던 높이에서 우리 삶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럴때면 주위의 낯선 세계가 은근히 도움을 준다. (21)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37)
이 위에 올라와야만 보이는 구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양의 사옹 어딘가에서 우리가 아주 커다란 솜사탕 같은 섬을 지나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승객 가운데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필요한 만큼 목에 힘을 주어가며, 창밖을 보면 우리가 구름 위를 날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나 푸생, 클로드나 컨스터블이라면 가만있지 못했을 텐데. (37)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었다. (48)
주말에는 주로 뭘 합니까? [“토요일에는 영화를 보고, 일요일에는 저녁에 우울해지면 먹을 초콜릿을 쟁여둬요.“] (50)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외교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화려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꾸짖고, 웃고,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족과 함께-또 너 자신과 함께-상냥하고 정의롭게 함께 사는 것, 늘어지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더 주목할 만한 일이고, 더 드물고,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그런 한적한 삶에서 이행해 나가는 의무들은 다른 화려한 삶의 의무들만큼이나 어렵고 또 긴박한 것들이다. (117_몽테뉴 수상록 인용)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세계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1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