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디안텀 블루
오사키 요시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오사키 요시오 :
파일럿 피쉬를 읽은 독자라면 아디안텀 블루의 존재가치가 커질 것이다. 오사키 요시오라는 작가 이름과 함께 파일럿 피쉬 역자 후기에서의 아디안텀 블루의 소개가 한 몫했으리라 여겨진다. 나 또한 이 책이 나오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기에 책을 받아든 순간 읽기도 전에 이미 만족해버렸던 것 같다.
오사키 요시오의 책은 파일럿 피쉬가 처음이었다. 굳이 다른 책을 읽지 않아도 이 책 한권만으로 그의 문체라거나 작품안에서 줄곧 등장하는 소재들이 눈에 띄게 매력적이었다.
폴리스의 노래라거나 파일럿 피쉬라는 물고기 자체, 그리고 이번 아디안텀 블루에서의 비틀즈, 엘튼 존의 노래 등은 '오사키 요시오'가 어떤 작가라고 일러주는 것 같았다. 마치 하루키 소설에 여러번 등장하는 고양이라거나 마라톤, 재즈처럼 말이다.
그는 일본 문학에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던 나에게 신선한 봄비와 같은 존재였다.

고요의 울림 :
그의 문체는 강요하지 않지만 충분히 공명되는 울림을 전한다. 개인적으로 이런것은 일본 작가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인은 자기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켜켜이 쌓인 감정들을 묵히고 묵혀서 결국 이렇게 사람 마음을 파고드는 문장으로 다듬어 내는 것은 아닐까.
아디안텀 블루에서도 역시 제목이 가져다 주는 청명한 우울함과 함께 마치 어두운 방 안에서 수조만이 불을 밝히고 있는 듯한 분위기가 잘 조화되어 있다. 이것은 굳이 뭐라고 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감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전작과의 비교 :
몇가지 설정을 바꾸었지만 전작에서의 중요한 점은 그대로 따왔다. 그래서 파일럿 피쉬와도 자연스럽게 느낌이나 상황이 연결된다. 하지만 자칫 파일럿 피쉬를 읽지 않고 이 책을 먼저 읽는 사람은 무언가 소설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덧붙이자면 파일럿 피쉬에 비해서 난해한 감정의 표현들이 많았던 것 같다. 아련하게 전해오는 책의 분위기는 충분히 느껴졌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주인공의 상황묘사보다는 감정묘사가 주를 이루었다는 것이 이유인것 같다.

착한 남자의 자아 찾기 :
이 소설은 단순히 사랑 이야기만을 다루지 않는다. 다 큰 어른의 제3의 사춘기랄까? 사람들은 이유없는 방황과 우울이 성장기의 청소년에게만 오는것이라 착각한다. 하지만 과도하게 자라버린 어른들조차도 주기적인 우울을 경험하는 것이다.
때때로 류지는 R.Y.라는 이니셜로 변한다. 그는 한 마리의 달팽이처럼 딱딱한 집으로 몸을 둥글게 말고 숨는다. 이미 다 자라버린 어른이지만 마음만은 아직 어릴적의 상처를 고스란히 담고있기 때문이다. 그 상처들은 불쑥 불쑥 튀어나와 류지가 아닌 R.Y.가 되게 만든다.

요코, 과거 :
'브링 온 더 나이트'가 듣고 싶어지는 순간 곡이 담긴 CD를 둔 곳이 떠오르지 않는 주인공. 죽은 옛 연인 요코의 빈자리를 대신하는 진통제 같은 음악을 찾을 수 없는 것 처럼 그에게서 요코라는 존재도 조금씩 잊혀지고 있는건 아니었을까?
요컨데 그의 과거는 요코라는 곳으로 압축되어서 그 안에 그의 아픈 상처, 상처를 준 사람들, 여러 과거의 기억들이 모두 함께 소멸된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과거가 아닌 현재에 충실하며 R.Y.가 아닌 자신으로 살아가려고 마음먹은 것 처럼 말이다.
누군가는 언제고 씨를 뿌리고 다시 자라나는 나무가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지만 식물이란 생각보다 약하다. 화초가꾸기 초보인 나는 올해부터 몇가지 허브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그 중 3개의 화분을 말라죽였다. 무럭무럭 자라는 것 같던 화분들도 조금만 애정을 멈추고 모른채하면 그 사이에 말라서 죽어버리는 것이다. 갑갑증을 못견디고 죽는다는 토끼처럼 '사랑받지 못한다면 죽어버리겠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내가 죽어도 착한 사람으로 남아줘.'
요코의 유언이 바라는 착한 사람이란 언제까지나 사랑받는 사람, 사랑을 주는 사람으로 남아달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과거라는 우울한 건조함에 죽어가던 아디안텀에서, 블루를 이기고 촉촉하고 파릇한 새순을 올리는 아디안텀으로 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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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원에 가기
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 이레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 출간된 알랭 드 보통의 책 중 처음으로 읽은 책.

알랭 드 보통은 일종의 도전이었기에 쉽게 그의 책을 집어서 읽을 수 없었다. 그에 대한 평가라던가 그의 책에 대한 서평이 이미 무언가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쩐지 그의 책은 시간을 한참 두고 몽땅 탐독을 해야할 것이라는 의무감을 안겼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동물원에 가기'라는 에세이가 신간목록에서 눈에 띄었고 그 순간 이전에 가졌던 의무감, 몰아서 읽어야지 하는 마음 따위는 온데간데 없이 책을 골라서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책은 150쪽도 되지 않는 얇은 두께에 안에는 보기 좋게 정렬된 인쇄체가 보인다. 그 배열은 매우 자유로워보이는데 위 아래도 큼직한 빈 공간을 적절히 이용해 놓아서 책을 펼치기만 하면 그런 빈 공간들과 동화같은 그림까지 합쳐져서 사람의 마음을 고요하고 안심하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파란색 양장 표지가 부담스러울 정도의 책의 두께와는 달리 그 안의 내용은 매우 사색적이다. 물론 이 책은 개인의 서정이 담긴 에세이에 불과하지만 한 단어, 한 문장을 스킵하며 읽을 수 없을 정도로 그것들은 모두 매력적이었다. 8쪽부터 140쪽까지 모두 암기해버리고 싶은 욕심이 들기도 했다. (부끄럽지만)여지껏 감동 받았던 책 속의 어느 문장도 완벽하게 외우지 못하는 내가 말이다. 

  맨 처음 나는 알랭 드 보통의 문장을 무라카미 하루키의 에세이와 동일시 하게 되었다. 군더더기 없는 그들의 에세이에 동일성이 보였던 것이다. (하루키 에세이는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한다.) 그렇지만 분명 둘 사이에는 다른 점이 존재했다. 하루키는 섬세하지만 남성적인 분위기가 풍긴다. 그래서 줄곧 '이 남자가 정말 중년을 넘기고 있단 말이지'라고 안타까워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랭 드 보통의 경우는 그 섬세함이 조금 다르다. '쨔식이 예민해가지고는..' 이런 성차별적인 발언이 튀어나오게 될 정도로 그는 여성스러운 섬세함을 가진 것 같다.

 책 안에 등장하는 매 에피소드마다 내가 공감할만한 것들이 한가득이어서 읽는 내내 나는 매우 즐거웠다. 더 이상 그가 낯설지 않다.

  어쩌면 우리가 슬플 때 우리를 가장 잘 위로해주는 것은 슬픈 책이고, 우리가 끌어안거나 사랑할 사람이 없을 때 벽에 걸어야 할 것은 쓸쓸한 도로변 휴게소 그림인지도 모른다. (10)

 호퍼의 작품은 잠시 지나치는 곳과 집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마치 우리 자신 내부의 어떤 중요한 곳, 고요하고 슬픈 곳, 진지하고 진정한 곳으로 돌아온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16)

  우리가 그 그림에서 반기는 것을 제재라기 보다는 분위기다. 색과 형태를 통하여 전달되는 감정적 태도다. 우리는 물론 그런 감정으로부터 곧 멀리 쓸려 내려갈 것임을 안다. 그림이 전하는 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현실적이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17)

  정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생각뿐일 때는 제대로 그 일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마치 남의 요구에 따라 농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 말투를 흉내 내야 할 때처럼 몸이 굳어버린다. 그러나 정신의 일부가 다른 일을 하고 있을 때는 외려 생각도 쉬워진다. (19)

  이따금씩 건물 내장에서 엘리베이터가 쉭 하고 솟아오르는 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호텔 방에 누워 있으면, 그곳에 도착하기 전에 일어났던 일들 밑에 금을 그을 수 있다. 우리 경험에서 이제까지 무시해왔던 넓은 영역 위를 날아볼 수도 있다. 일상적인 일속에서는 이르지 못했던 높이에서 우리 삶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럴때면 주위의 낯선 세계가 은근히 도움을 준다. (21)

  우리 눈에 감추어져 있었다 뿐이지, 사실 우리 삶은 저렇게 작았다는 것.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가 살고는 있지만 실제로 볼 기회는 드문 세상이다. 그러나 매나 신에게는 우리가 늘 그렇게 보일 것이다. (37)

  이 위에 올라와야만 보이는 구름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양의 사옹 어딘가에서 우리가 아주 커다란 솜사탕 같은 섬을 지나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특별히 관심을 가질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승객 가운데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필요한 만큼 목에 힘을 주어가며, 창밖을 보면 우리가 구름 위를 날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해주지 않는다. 레오나르도나 푸생, 클로드나 컨스터블이라면 가만있지 못했을 텐데. (37)

  매력적이지 않은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그것은 상대가 따분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고, 매력적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침묵하면 구제불능일 정도로 따분한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이 분명해지기 때문이었다. (48)

  주말에는 주로 뭘 합니까? [“토요일에는 영화를 보고, 일요일에는 저녁에 우울해지면 먹을 초콜릿을 쟁여둬요.“] (50)

  적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외교를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화려한 행위들이다. 그러나 꾸짖고, 웃고, 사고, 팔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가족과 함께-또 너 자신과 함께-상냥하고 정의롭게 함께 사는 것, 늘어지거나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은 더 주목할 만한 일이고, 더 드물고, 더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뭐라고 말하건 그런 한적한 삶에서 이행해 나가는 의무들은 다른 화려한 삶의 의무들만큼이나 어렵고 또 긴박한 것들이다. (117_몽테뉴 수상록 인용)

  다른 사람들이 쓴 책을 읽다 보면 역설적으로 나 혼자 파악하려 할 때보다 우리 자신의 삶에 관해서 더 많이 알게 된다. 다른 사람의 책에 있는 말을 읽다 보면 전보다 더 생생한 느낌으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세계는 어떠한지 돌아보게 된다. (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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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alian Joy - 이탈리아 스타일 여행기
칼라 컬슨 지음 / 넥서스BOOKS / 2006년 8월
평점 :
절판


뭔가를 버리고 다시 시작한다는 건 어떤 것일까?

* 모든 것이 끝났다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때가 바로 시작이다-루이 라무르

과거를 정돈하고 현재를 시작하는 방법 중 여행보다 완벽한 것이 있을까? 

 여기에 성공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모든 물질적인 것을 가졌지만 모든 인간적인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고 여긴다. 그녀는 다 끝났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지금이야말로 무엇인가 새롭게 시작해야할 때라는 것을 느꼈다. 

 시작은 줄곧 우리에게 다른 것 하나를 버리도록 만든다. 내가 세상에 나왔을 때 리본이 달린 멋진 드레스를 입고 태어나지 않았듯 시작이란 늘 텅비는 것부터 비롯된다. 버린다는 것은 지금 당장 필요없다는 의미와도 같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들은 늘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노래 ♬ 타타타(김국환아저씨)를 들어보자.

     ...산다는 건 좋은거지 수지맞는 장사잖소~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잖소~

그렇게 우리는 알몸으로 태어났다. 

 여행은 우리네 인생과 많이 닮아있다. 이제껏 쌓아둔 나의 직업, 인간관계, 집 혹은 고향이라는 보금자리, 통장잔고, 빚 독촉의 압박, 사랑 그리고 기타 모든 나와 관련되었던 것들을 그냥 두고 빈가방(때로는 이것 조차 두고 정말 빈손으로 떠날 수도 있다!)을 가볍게 둘러매고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딘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 우리는 여행 맨 처음의 낯설음과 두려움을, 그 다음엔 익숙해짐과 아쉬움을, 마지막으로는 그리움과 희망을 챙겨서 돌아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점점 꿈처럼 희미해져가지만 언제나 심장속에 가득 채워진 혈액처럼 박동과 함께 숨쉰다. (어쩌면 한 세상 소풍을 끝내고 생을 마치는 사람이 사후 세계로 가기를 꺼려하듯 여행지에서 떠나고싶지 않아 찔찔짜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그녀는 탁월한 선택을 했다.

이탈리아!

낭만, 고전, 젊음, 열정, 모험, 사람 냄새, 여행의 진실...이 모든 것들로 가득 채워진 곳이 바로 이탈리아니까. 고백하자면 내가 이탈리아에 있었던 2004년 겨울.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왜 그토록 이탈리아에 열광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그리고 도대체 내가 왜 이런 무미건조한(!) 곳을 여행 루트로 정했는지 후회스러웠다. 마치 에쿠니 가오리의 '냉정과 열정사이'를 읽고 난 후 잔뜩 기대를 하고 영화로 보았을 때의 허망함과도 비슷했다고나 할까. (이 영화 역시 오랜 후에 감회가 새롭더군...)

말하자면 이탈리아는 내게 매우 한국적인 동시에 유럽적인 곳이었다. 그런 익숙함에 나는 이탈리아에 대해 건조함을 느끼고 돌아왔을지도 모르겠다. 비행기를 타고 런던으로 갈 때에도 이탈리아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고 (피렌체의 두오모가 궁금하긴 했지만!) 로마에서 돌아오는 인천행 비행기 안에서도 내내 딴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후 2년이 지난 지금은 내가 밟았던 어떤 땅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도시들이 너무도 그립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내뱉던 특유의 힘찬 인토네이션과 서양인 다운 풍부한 표정, 그 속의 동양적인 인간미, 숙소의 냄새(;), 아이스크림 맛, 스피지코 피자의 맛, 온갖 예술품.... 지금 이런것들을 명확히 떠올리려 노력해도 점차 희미해져가고 그것들은 하나의 기억에 불과하게 되었지만 내가 그곳에 있었던 계절이 돌아와 그 때의 이탈리아 공기 냄새와 비슷한 느낌을 만나게 되면 곧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는 매일매일이 되어버렸다. (어째 여행기 리뷰마다 이탈리아 타령을 해서 귀가 따갑다;)

  이 책을 발견하고 그토록 발광을 했던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 책으로는 분명 이탈리아 사람들의 인토네이션이라거나 이탈리아의 공기냄새 따위를 듣거나 맡을 수 없다. 그래서 늘 여행기는 가뭄에 잔비내리듯 감질나기 마련이다. 이제껏 여행기를 읽은 후엔 불난집에 부채질하듯 이탈리아로 향하는 내 마음을 가다듬지 못하고, 젖 모자란 아기마냥 더욱 징징대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탈리안 조이'는 읽고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꽉 채워져버렸다. 당장 떠날 수 없어도 안심했다고나 할까.  

 이탈리안 조이를 읽기 시작하면서 염려했던 것은 저자가 외국인인 만큼 여행기에 대한 이질감이 느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한국인과 호주인은 분명 조금은 다른 취향을 갖고 있을거라는 염려..) 하지만 여행자는 그저 여행자일 뿐이었다. 누가 가서 보아도 그곳은 이탈리아이니까! 칼라 킬슨은 내가 보지못했을 이탈리아의 모습을 참 잘도 구경시켜 주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탈리아에서 제 2의 인생을 시작했다. 호주의 성공한 커리어우먼에서 갑자기 이탈리아로 훌쩍 떠나서는 사진을 배우기 시작하고 사진을 찍고 드디어는 사진작가로, 칼럼니스트로 일하는 그녀의 드라마틱한 인생 여정이 함께 담아져 있는 것만으로도 이 책은 분명 다른 여행기와는 다르다.

 그리고 나는 다시금 이탈리아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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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사건
엘리에트 아베카시스 지음, 이세진 옮김 / 예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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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정말 행복한 거 맞아?"

이런 질문에 심각해진다면 그건 유혹을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의하면 남자들이 여자를 떠볼 때 하는 질문이라고 한다. 애인이나 남편이 있는 여자에게 이런질문을 하는 이성은 열에 아홉은 흑심이라는거다.

 

 하지만 어쩌나... 내 질문은 의도가 좀 다르다.

그림을 파헤쳐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준 책 '그림 보여주는 손가락_김치샐러드'를 읽은 독자답게 표지를 분석하기 시작한다. 얼핏봐서는 평화로워보이는 저 그림은 젊은 여자가 벤치에 앉은 채 유모차를 옆에 두고 있다. '아, 저 여자는 아기를 낳았고 아기와 함께 공원에라도 나왔나보네.'라고 생각한다면 틀렸다. 책을 읽고 난 사람은 알 것이다. 그녀는 아기를 보고 있지 않다. 벤치 뒤에 펼쳐진 도시를 멍하니 응시하며 육아에 지친 몸을 벤치에 기댄채 유모차 한 켠을 붙들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막 엄마가 되었다.

'행복한 사건'이라는 제목에 대한 내 물음은 여기서 시작된다.

아이를 가진 여자들은 양가감정에 휩싸인다. 아이가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마음과 정말 죽겠으니 쳐다보기도 싫다는 마음이 그것이다. 이것은 '엄마'가 되는 여자들의 공통적이고도 정상적인 반응이다. 여자라고 해서 매순간 자기가 낳은 아이라는 이유로 그 애가 예뻐보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거다. 이 책의 바르바라처럼 잠을 설치고 밤낮이 바뀌는 것은 물론이고 자기 직업을 유지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에 뱃가죽은 점점 흘러내리고 오줌이 찔끔찔끔 새어나온다(요실금). 아기를 안고 들어올리고 하느라 팔뚝은 어느새 남편보다 두꺼워져있고 화장은 커녕 세수조차 하기 힘든 나날의 연속이다. 여자에서 엄마로 변신한 여자들은 하루아침에 다른 사람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 우리는 여성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여성이 되어가는 것이다. (58)

 

 그럼에도 우리네 엄마들은 우리를 포함한 무수한 자녀를 잉태했다.

10개월의 인내와 회음부 절개의 고통과 양육의 막막함을 잊은채 어느새 그녀들은 다시 '행복한 사건'을 맞이한다.

 

 그녀들은 행복하다고 했다.

적어도 내가 본 출산의 현장은 기묘한 것이었다. 회음부는 생각보다 두터웠다. 작은 구멍으로 아기의 머리가 보였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산모가 느낄 신음의 고통은 말할것도 없지만 그것을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는 소독 된 가위로 '쑹덩'하고 잘려나가는 회음부와 그 안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하얀 살덩어리, 태반과 기타의 붉은 것들에 적잖이 놀랄 수 밖에 없었다. 포유류로 태어나서는 아주 자연스럽고 원시적인 행위인 출산을 마주한 나는 적어도 충격으로 쓰러지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매우 기묘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내 동료 중 몇몇은 그 현장에서 쓰러져 실려갔다는 이야기가...)

자궁 안에서 견뎠을 무수한 침묵을 깨며 아기는 울음을 터뜨린다. 산모는 언제 고통스러웠냐는 듯이 활짝 웃으며 행복해한다. 그 아기가 그녀가 고통을 잊어버린 이유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남(?)의 몸에서 일어나는 임신의 현상을 흥미롭게 지켜보던 남자는 비로소 출산하는 순간 무언가를 느낀다. 우리는 모성애에 비해 부성애에 대해서는 너무 무관심했던 것 같다.

* 산부인과 의사는 분만실 간호사에게 아기 아빠를 다시 들어오게 하라고 했다. 니콜라는 혼이 쏙 빠진 모습으로 나타났다. 충격을 받은 것이다. 로랑스 페르누 저서의 2000년 판본은 대단한 진전을 보였지만, 1967년도 판본과 마찬가지로 아기 아빠가 분만에 참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어쨋든 내 앞으로는 하얀 막이 쳐져 있어서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니콜라는 자기 아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공포영화를 보기라도 한 듯 하žA게 질려 있었다.

그는 망연자실해 있었다. 남자들은 약해 빠졌다. 너무 민감하다. 남자들은 생리도, 입덧도, 임신도, 분만도, 회음부 절개도 모른다. 남자들은 행복한 여자들이다. (72)

 

 출산 그 이후 여자와 남자는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지난날 모성이 다산을 하는 것을 풍요로 여기고 남자는 동굴밖에 나가서 짐승을 잡아다가 생계를 꾸렸듯이 그들은 현재에도 그리고 미래에도 여전히 그 뗄 수 없는 본능적 책임감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이다.

 

 자유분방하기로 소문난 '프랑스'의 여자도 자연의 섭리 앞에서는 어쩔 수 없는 여자고 엄마고 아내, 며느리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 여자와 시어머니, 남편은 이럴것'이라는 편견!!) 

그동안의 아련한 사랑 이야기에 속았던 나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리얼리티쇼'란 이런것이구나 했다.

 

* 처음의 사랑이 있고, 성숙한 사랑이 있다. 성숙한 사랑은 나중에야 온다. 아무도 그런 사랑은 꿈꾸지 않는다. 하지만 처음 만날 때의 사랑은 부부의 사랑에 비하면 풋내 나는 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172)

* 나는 모르는 게 없었다. 지독히도 난해한 헤겔, 칸트, 라이프니츠의 저서들도 이해했다. 그런데 인생을 마주하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204)

 

 완벽한 부부란 없다. 인내하는 부부만 있을 뿐. ^^

내 눈에 행복해보이는 남의 가정도 알고보면 이런저런 사연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진정으로 오래도록 진행되는 사랑은 '얼만큼'도 아니고 '왜'도 아닌 동고동락의 '과정'에 있는게 아닐까?

 

*나는 레아를 지켜보면서, 모든 사람에게는 그를 돌봐준 누군가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이는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았던 것이다. 사랑해 준 누군가가 없었더라면 그렇게 살아남기도 힘들었으리라. (225)

 

 이 책을 읽고 나면 비로소 내가 그토록 금이야 옥이야 마음을 졸이며 길러진 아이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사랑을 하는 방법과 그 가운데 고난을 이겨내는 방법도 함께. 

 

♬ 추천 : 애를 낳은 이후로 부부 사이가 소원해진 부부,

           여자들의 출산이 어떤 사건인지 궁금한 남자들,

           도대체 왜 결혼하면 지옥이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미혼남녀,

           이 인간과 드디어 같이 못 지내겠다고 결심한 연인들에게^^

 

* 결국 이 여행이나 저 여행이나 엇비슷해지게 마련이다. 가보지 않은 땅이 없다. 미지의 땅은 오직 하나, 딸뿐이었다. 우리가 낳은 아기 말이다. (91)

 

* 아빠는 좀 달랐다. 아기 아빠는 젖을 먹이지 않기 때문에 아이한테 바라는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불규칙적이었다. 니콜라의 생활도 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이는 정신이 번쩍 든 모양이었다. 철마에 올라앉아 정말로 열정을 불태울 수 있는 일 아니면 하고 싶지 않다고 호기롭게 외치던 반항아는 도대체 어디로 갔는지? 뭐가 그리 중요해서 아침마다 부리나케 일터로 달려가는지? 그는 점점 더 일찍 집을 나섰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고객들을 만나고, 예산을 잡고, 그가 이제 '수익'이라고 부르는 판로들을 찾아야 했다. 예숙을 위한 예술에 목매던 나날은 끝났다. (98)

 

* 아! 위대한 사랑의 맹세와 마법 같은 포옹의 나날은 저만치 멀어졌다. 진정 낙원은 잃어버린 낙원일 수밖에 없는 걸까? 기저귀가 사방으로 널린 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란 불가능한 것일까?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돈 걱정에 빠져들면서도 여전히 애인 노릇을 한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을까? 하지만 왜 우리는 처음부터 사랑은 정신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세뇌당했을까? 왜 사랑은 낭만적인 베네치아의 운하이지, 결코 아빠니 엄마니 아이니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을까? 사랑은 성스럽고 가정은 구질구질하다면, 어떻게 사랑이 영원할 수 있을까? (104)

 

* 아기는 부부를 파괴하는 제3의 요소다. 하지만 우리가 오히려 부부 사이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아마 아기는 더 잘 자라게 될 것이다. (108)

 

* 미래가 어떻게 될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다. 서로 사랑할 수도 없고, 사랑을 포기한 채 살 수도 없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딱 그랬다. 질문들을 던져도 결코 해답을 찾지 못한다. 가능한 일인지 어떤지도 알지 못한 채 궁지에서 벗어나보겠다고 불가능에 도전하고또 도전한다. 행복을 추구하면서 행복을 포기해 버리고, 불행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다가 정말 바닥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다시 솟아올라 처음 순간의 비약에 대한 감각을 되찾는다. (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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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보여주는 손가락
김치샐러드 지음 / 학고재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나도 지금은 그림 구경을 매우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예전엔 그저 책 속의 명화나 보며 '이런 작품이 있군.'하는 정도였다. '고흐를 좋아해요, <고흐의 방>을 좋아하죠.' 등의 이야기를 하며 그림 이야기에 신나서 얼굴을 붉히는 정도였달까. 고흐에 대한 나의 취향은 지금껏 변하지 않았지만 그뿐이었다. 나는 갈증을 느꼈다.

 뮤지컬 보기를 즐겨하는 나는 영화, 뮤지컬이라면 얼마든지 장소를 옮겨가며 무대를 관람하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림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은 방법에의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작품을 보았을 때 전체적인 것을 느낄 뿐 왜 이 그림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미술관에 가게 된다. 그것도 아주 제대로 찾아갔다. 유럽의 미술관은 그야말로 예술의 천국이었다. 내가 어렴풋이 알고 있던 서양의 예술이 모두 그곳에 있었다. 열강의 대열에 있던 그들의 나라는 찬란한 문화적 풍요 속에서 전세계의 예술가까지 양산했다. 옥의 티 하나 없이 남의 나라의 예술품까지 모아둔 박물관과 화려한 미술관은 그야말로 리얼리틱함 그 자체였다.(붓 터치까지 보인단 말이지!) 아직 열악한 우리나라의 미술관과는 달리 그곳의 미술관은 규모로보나 시설로 보나 최첨단이었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우는 나폴레옹의 초상화도 놀라웠지만 무엇보다 '모나리자'가 그렇게도 어둡고 작은 그림일줄이야. 나는 그 곳에서 화가들의 붓의 움직임까지 느낄 수 있었다. 거창한 설명 없이도 그냥 그림만으로도 감동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감동이 실제로 심장을 두드리는 것만 같았다. 내가 몰랐던 화가의 그림들까지 보면서 새로이 마음속에 들어오는 작가와 그림들이 넘쳐났다. 갈비뼈 한 쪽이 뻐근할 정도로 아팠다. 뭔가 찌릿하는 느낌. 

 그 이후 한국에 돌아와서도 주기적으로 미술관에 찾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나의 목을 마르게 했던 것은 그림의 디테일함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공부를 따로 하지 않는 이상은 힘든 일인 것 같았다. 피카소의 그림에서의 색채 변화와 샤갈의 닭, 바이올린, 당나귀 등의 요소들에 대한 '느낌'이 아닌 '의미'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명화가 왜 명화인지 모르겠다는 사람이 많다. '남들이 좋으니까 좋은가보다' 하고 보는게 일상적이게 되어버린 잘못된 그림 감상법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이 이 책이다. 김치샐러드는 작품 하나를 골라서 하나, 둘씩 파헤치기 시작한다. 물론 여러 네티즌들이 지적한대로 너무 자의적인 해석이라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그림 감상에는 정도란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예술학도가 아닌이상은 그냥 내 방식대로 충분히 그림을 알면 그뿐인것이다. 조금 더 심도있는 그림의 배경까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 '손가락'은 매우 친절한 도슨트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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