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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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랗고 빨간 작은 가방을 매고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등교하던 어린시절 우리는 누구나 이상세계를 하나씩 꿈꾸고 있었다. 그것들은 저마다 다르게 표현되곤 했는데, 공주처럼 예뻤던 아이는 중세의 궁전을, 동화책을 좋아하던 아이는 네버랜드를, 마징가 Z가 되고 싶었던 아이는 장난감이 움직이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했을 꿈의 나라는 바로 도깨비의 나라가 아닌가 싶다. 아직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가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시골의 뒷간에 가면서도 도깨비를 만날까 두렵고,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나면 산에 오르기가 두려워지곤 했던 것이다. 다 자라버린 지금은 '사후세계' 혹은 'SF에나 나올 법한 공상의 세계'라고 이름지으면 될까.

 한국인에게 도깨비가 있다면 일본에는 좀 더 다양한 종류의 그것들이 존재한다. 일본인들은 모든 생명체나 사물을 신격화 시키는 특유의 토속신앙이 있었고, 부럽게도 그런 신앙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너는 신의 아이란다. 작은 신이나 다름없으니 소중하고 귀여운 아이야.'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인에게는 태어날적부터 신이나 도깨비 등이 더욱 친숙할 것이다. 가끔 일본문화 관련 매체들을 접할 때 현실을 초월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모습 또한 그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그들의 독특한 정신세계(혹은 면면히 이어져내려오는 문화적 소재)는 쓰네카와 고타로에게도 영향을 미쳤나보다. 그의 이번 작품 '야시' 또한 현세를 초월한 공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요괴, 사체 등이 등장한다. 이 두 세계(인간세계와 초월한 세계)는 서로 공존하면서도 인간은 인간세계 밖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동시에 묘하게도 충돌하며 살아간다. 눈여겨 볼 것은 현실 세계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면에 요괴들의 세계(사후세계로 이해 됨)는 시간을 거스르는 면모를 보인다. 이를테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비교적 역사적으로 안정적이었고, 그래서 고유의 문화가 다치거나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일본의 문화적 강점을 나타낸다.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발전 된 현대사회와 기모노로 대변되는 옛날이 융화되는 것이다. 거기에 '모든 것은 죽어서 신이된다'는 일본의 문화적, 신화적 코드가 맞물려서 태어난 작품이 '야시'이다.

 '야시'는 풀어쓰면 '야시장'의 의미이다.
복작거리는 주택가에 살다가 아파트 촌으로 처음 이사를 온 후, 어린아이에 불과했음에도 나는 향수를 느꼈다. 아파트는 놀이거리가 없었다. 고작 놀이터 몇 군데가 있었을 뿐, 주택가 처럼 온갖 모험요소는 잊어버려야 했다. 그런 갑작스러운 고요함이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뜬금없이 야시장에 가자고 졸랐다. 꼭 밤에 열리는 시장이 보고 싶었다. 집 근처에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던 시장에 갔던 그 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그마저 사라져버렸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 그 시장이 떠올랐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왜 시장을 '도깨비 시장'이라고 부르는지도 새삼스럽게 느꼈다. 눈뜬 사람 코도 베어간다는 시장은 도깨비나 요괴가 돌아다니는 것 처럼 정신이 없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더 어릴때는 외가댁 근처의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쳐서 하루 종일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과일가게에 앉아서 사과를 얻어먹으면서 태평하게 엄마, 아빠를 기다렸는데 나 혼자서는 '부모를 잃어버렸다. 어서 찾아야해'라는 급박함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과일 가게에 앉아있으니 가게 문 밖으로 아빠와 엄마가 급히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부모님은 몇번이고 나를 찾아 헤매인것인데 나는 아빠와 엄마가 바쁘다고만 생각하고 느긋하게 과일을 얻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날 나는 엄청나게 궁둥이 찜질을 당해야했다.

 야시의 첫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내가 그날 과일 상자 위에 앉아서 밖을 쳐다보고 있는 내내 밖과 안이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과일 가게의 문을 경계로 안에 앉아 있는 나는 '고도'에 와 있는 것이고 밖(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안을 볼 수 없다. (그럼 나를 보살펴준 과일가게 아줌마는 요괴?)

 책을 읽는 내내 정말 내가 요괴세계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책 자체가 워낙 보기 좋게 편집이 되어있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흡인력이 너무 강해서 매말라버린 감정이 다시 촉촉해지며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괴물들을 지나쳤다.
특히 나는 주로 밤에 불을 꺼 놓고 잠들기 직전에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서 책을 읽는 편인데, 그 때마다 벽에 걸린 옷의 그림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꿈에 요괴가 안 나온게 다행이랄까.

 일본 소설은 무게가 없다. (물론 이 문장에 말을 덧붙이자면 '무게 있는 소설에 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늘 일본 소설이나 문화를 대하면서 느끼는 불안감과 질투, 부러움은 이번에도 어쩔 수가 없다.
침범당하지 않은 고유의 문화와 우리가 문화 침체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약 50년간 일본의 문화는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틈새는 영원히 매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일본의 문화적 재산들이 부럽다. 나는 한국인이기에 한국의 문화를 늘 남의 문화와 견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일본 문학이 가볍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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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피터팬
제랄딘 맥코린 지음, 조동섭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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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랄딘 매커린 저, 조동섭 역 | 김영사 | 원제 Peter Pan In Scarlet | 2006년 10월
 
 기억나? 매일 밤 달빛이 비추던 창문 너머 나뭇가지의 그림자. 반지하의 집안 방 창문으로는 나무들이 괴물의 모습의 찢어진 입을 벌리고 낄낄대며 웃곤했어. 티없는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는 유일한 공포였지. 난 매일밤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겨우 잠이 들어서도 매마른 모래밭을 기어다니는 무시무시한 호랑이 꿈에 시달리곤 했어. 울면서 깨는 나를 업고 달래던 아빠의 따뜻하고 커다란 등이 생각나네.
 
 무수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던 그 어린시절, 그림이나 사진 때위가 붙은 한글단어를 배우는 책 이외에 읽은 나의 첫 동화는 아마도 '파랑새'였던 것 같아. 그 몽롱하고 음울한 책은 어린 나에게 깊고 푸른 밤의 색을 경험하게 해 주었지.
 
 옆 집의 남자아이네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어. 용감한 '후레쉬맨'을 한 번 얻어 보기 위해서 온갖 사탕발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 그러던 어느날 우리 집에도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했어. '후크'라는 영화를 본 것은 행운이었어. 팅커벨과 창문너머 달과 별을 헤치고 날아오는 녹색 옷의 그 아이 말이야. 난 어리고 밤의 나무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불면증에 걸린 작은 꼬마였고 그 아이는 밤도 모험도 두렵지 않은 용감한 피터팬이었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점점 자라고 있지만 그 애는 영원히 어린이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었어.
'파랑새'를 읽으며 다져진 나의 어둠 사랑을 시작으로 '후크'라는 그 비디오를 열 번도 넘게 돌려 보면서 불면의 밤과도 이별을 고할 수 있게 되었어. 피터팬을 만나고난 후 밤은 더이상 어둡고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나무 그림자의 찢어진 입도 우스꽝스러운 인형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동화 속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현실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지 그땐 몰랐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난 스무살이었고 더이상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난 아이가 아니니까 이제 피터팬을 만날 수 없었어. 나는 그 때 네버랜드에서 살던 영원한 어린이인 '어른이 될 수 없는 피터팬'이 되어버린거야. 피터팬인 내가 네버랜드를 떠나자 갑자기 어른이 되길 강요받기 시작했고 '나는 왜 아직 어른이 되지 않는걸까'하고 불행해진거야.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네버랜드에 다녀왔어.
네버랜드에 가 본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불행하지 않아.  여기 다시 모인 웬디와 아이들을 봐. 그들은 엄마, 아빠, 의사, 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여전히 요정의 존재를 믿고 '요정을 무시하면 그 요정은 죽어!' 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해. 웬디는 어김없이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고, 피터팬도 옛 친구들을 만나서 다시 모험을 떠나기로 했어. 아무도 이들을 어른이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벌써 어린이가 되어버렸어. 왜냐하면 그들은 '네버랜드 출신'이거든.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다시 만난 피터팬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어. 네버랜드도 많이 변했지. 상상력도 점점 힘을 잃고 있었고, 아이들은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어. 그들은 어른을 만나게 된거야. 지난 날 후크라는 무시무시한 어른을 만난 것에 비하면 이번은 더 끔찍해. 아이들은 이미 네버랜드 밖에서 어른이 되었고, 어른의 생활, 어른의 생각을 경험했어. 그리고 피터팬도 몸은 자라지 않지만 돌아온 후크(!)의 놀라운 조종으로 마음은 점점 어른으로 변해갔어. 모두 어른을 경험한거야. 그런데 이상하지? 이제 그들은 다투지 않아.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고 그래서 어른이 된 어른들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이해하기 쉬워. 하지만 영원히 어린이인 피터팬은 달라. 그는 어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은 이해할 수 없어. 그런 그가 이제 어른의 마음을 가져보게 되고, 어른을 이해하게 되는거야. 그리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지. 버림받았다는 아픔과 증오를 털어버리게 되는거야. 아, 그 여정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이미 네버랜드에서 함께 용감하게 모험을 펼쳤던 그들은 이번에도 용기로 무장하고 '악한' 어른과 싸워. 착한 어른은 어린이의 마음을 잊지 않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지. 어른은 아이를 돌보고 아이는 어른과 친구가 되는거야. 가끔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노웨어랜드로 보내버리면 돼. 그러면 그 아이와는 말도 하면 안되고 옆에 있지 않은 것 처럼 굴어야하지. 하지만 이 벌칙은 별로 효과가 없어. 왜냐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티격태격 했다는 것을 곧 잊어버리거든. 그리고 용서도 빠르지. 가장 악한 욕은 '꼬끼오 놈'이라는 거야. '이 못난 꼬끼오 놈아!' 라고 하는 거지. 아마 아이들 중 피터팬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겠지?
 
 그들과의 두 번 째 네버랜드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어른이 되어있어. 첫번 째 여행에서는 나도 그들도 어린이였기 때문에 어린이의 눈으로 네버랜드를 보았지만 지금은 어른의 눈으로 그 곳을 보게 되더라. 어른이 된 사람도 아이 같은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내가 나중에 웬디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네버랜드의 아이들처럼 티 없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물론 아이가 유모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하고, 혹여나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요정과 피터팬이 지켜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  
 
 동화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 어린이건 어른이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눈을 갖게 해 줘. 물론 아이의 눈에 그것이 좀 더 잘 보이지. 나는 이번에 돌아온 피터팬을 만나면서 다시 꼬마소녀가 된 기분이었고, 그 뿐 아니라 어른으로서 동심을 잃지 않고 사는 방법도 알 것 같아.
이젠 어른이 되어도 슬프거나 두렵지 않아. 언제든 네버랜드에 가서 피터팬을 만날 수 있으니까. 가끔 어릴적으로 돌아가서 꽁꽁 얼어붙은 나의 네버랜드를 녹여보는 건 어떨까. 
어른이 되면 불행해진다고 누가 그래? 나는 영원히 어린 아이일 것이고 늘 행복하게 살거야. 나의 네버랜드에서.
 
 
 + 한동안 어른이 되어 불행했어요.
용기를 주어서 고마워 피터팬!
(그리고 피터팬의 아빠 제임스 매튜 베리와 엄마 제랄딘 매커린에게도 감사를^^)
너는 나에게 새우깡, 불량식품, 담장의 개나리, 초등학교의 운동장, 크레파스 냄새 같은 존재야.
이제 용기를 모아서 날아오르자. (팅커벨, 파이어플라이어 뭐하니 요정가루 안 뿌리고)
 
 
중이미지보기
 
해야할 일
-자라지 말 것.
  나는 법을 기억할 것.
  요정 가루를 찾을 것.
  아내에게 할 변명거리를 생각할 것. (P 24)
 
"그런 말 하면 안 돼! 절대 안 돼!" 닙스 씨가 하얗게 길려 소리쳤다.
"생각 안 나? 요정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마다 요정 하나가 어디선가 죽는단 말이야!" (p 26)
 
"길이 잘 닦여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야. 그래도 우린 해냈어! 누구나 아무 때든 여기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아니면 어림도 없어! 쉬운 일을 하고 싶었어? 공원을 산책하고 싶었어? 누구나 다 부자가 되는건 아냐. 누구나 다 강하거나 영리한 것도 아니지. 누구나 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아냐. 그렇지만 누구나 용감해질 수는 있어!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 우리 마음에 대고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면, 스스로 영웅답게 행동하면...... 우리는 누구나 용감해질 수 있어! 위험을 똑바로 마주한 채 칼을 휘두르며 말하는 거야! '반갑다, 위험아! 난 네가 두렵지 않아!' 용기는 그냥 갖기만 하면 돼. 돈을 주고 살 필요도 없어. 학교에 가서 배우지 않아도 돼! 용기만 있으면 된다구!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틀렸어? 용기만 있으면 돼! 용기만 있으면 모두 이겨낼 수 있어!" (p 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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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범우문고 62
F.사강 지음 / 범우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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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아직 보지 않은 영화. 보다가 말았는데 처음 부분부터 사강의 책이 등장한다.
일본어로 쓰여진 사강의 책이라 묘했다.
그 책들이 여주인공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다.
아무래도 영화를 끝까지 봐야겠다.
영화 속 등장하는 사강의 작품은 아니지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는 영화 이전부터 너무 유명한 소설이라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제목이 참 낭만적이다.
책 속에 브람스의 음악이 등장하겠거니 했는데 달랑 한 장면 나온다. 브람스나 브람스의 곡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말의 의미를 생각해봐야한다.

'시간있으시면 차나 한 잔....'
이제 이 표현도 너무 진부한가.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라는 말은 남자가 여자에게 들이댈 때 사용되는 말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는 그렇다. 아마도 프랑스에서는 차나 한 잔 하실까요? 라는 의미로 쓰이는 것일까?
들이대는 말 치고는 참 낭만적이다.

작은 포켓사이즈의 책은 들고다니면서 읽기에 안성맞춤이다. 손이 작은편인 나는 책을 볼 때는 공부를 하건 독서이건간에 커다란 잡지를 제외하고는 모두 엎드려서 읽거나 바로 누워서 책을 읽는다. 이런 자세는 책의 무게가 조금만 무거워져도 불편하다. 포켓 사이즈의 책은 양장이 유행처럼 번지는 요즘 나에게는 새로운 독서의 바다이다.

7년 전 일본여행에서 의미있었던 구경은 아무래도 지하철 풍경이다.
책 읽기가 소수의 특권으로 생각되어지던 그 때 (책 읽기를 널리 퍼뜨린 프로그램인 '느낌표'도 하기 전이었다.) 일본에 도착한 나는 적잖이 놀랐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바닥만한 책을 들고 이동하고 있었다. 직장인의 007 가방에는 포켓북이 한 권씩 끼워져 있었고, 이것은 이동하면서 보기에도 좋을 뿐만 아니라 007가방에 넣으면 가방의 모양이 삐뚤어지지 않아서 좋을 것이었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나에게 일본어로 된 포켓북은 참으로 가지고 싶은 보물들이었다.

여튼 그 때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이 포켓 사이즈의 책은 디자인이 참 마음에 들었다. 손이 작은 내가 들고 다니면서 보기에 딱 좋은 사이즈. 따뜻한 노란 색 바탕의 표지. 단정한 붉은 빛 라인의 조화가 참 좋다.
통속 소설로 낙인 찍히기도 하는 이 책은 그 낙인이 민망하지 않을 정도로 지루한 로맨스 소설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작가 특유의 심리 묘사는 그야말로 탁월하다. 

나이 많은 폴르와 14살 어린 시몽의 관계는 사랑일까 아니면 단순한 외로움의 결과였을까.
폴르와 로제의 관계는 사랑일까 아니면 정일까.
고이 지키던 마음을 한 순간에 뺏기는 것은 쉽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식는 것도 쉬운 법인가보다. 

폴르를 두고 외도를 하는 로제는 그를 '몽쉐르'라고 부르는 어린 여자에게 그는 물었다.
그 말의 의미를 아냐고.
안다면 당신은 나를 몽쉐르라고 부를 수 없지 않냐고.
맹목적인 사랑을 주는 시몽에게 폴르는 말한다.
이제 그만 되었으니 가달라고.

이기적이다.
마치 한 다리는 물 밖에, 나머지 다리는 물 안에 담그고 있는 사람처럼 (이게 양다리인거군.) 그들의 사랑은 끈끈하면서도 화가난다.

아니지,
뭐가 사랑이고 뭐가 사랑이 아닌가
나는 모르겠다.

+
얇은 책인데도 읽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번역에 문제인 것 같은데 벌써 3판 인쇄인 이 책이 다음에 나올 때는 직역 보다는 의역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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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백 - 소유할 수 없는 자유에 관한 아홉 가지 이야기
바히이 나크자바니 지음, 이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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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의 마지막 주 이십하고도 일곱번째의 밤을 맞이한다.

늦가을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워져서 문을 꼭꼭 닫아도 틈새로 칼날처럼 파고든다. 방바닥이 금방 식을까봐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깔고 그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양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책을 고정시킨 후 책의 나머지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책을 오래 읽기에 불편한 자세이지만 내가 태어난 후 처음 책이란 걸 손에 쥔 후부터 생긴 나만의 독서 자세이다. 방바닥이 따뜻하고 늦가을 특유의 고요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지금 막 중간을 넘어선 이 새들백이라는 책도 고요한 가을 공기와 닮아있다. 마음을 안정시켜준다는 허브티를 옆에 두고 홀짝거리며 책에 빠져든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정적이 흐르는 가을의 밤, 새들백은 아홉의 꿈을 꾸게 했다.

 아홉명의 살아있는 자에게 다가온 새들백과의 운명적 만남처럼 마치 내가 걷고 있는 사막의 길에서 예고없이 알 수 없는 물건을 만난 듯 이 책을 처음 만나고 나서는 몹시 어리둥절했다. '새들백이 뭐지? 이 묘한 표지그림은?' 새들백은 '안장가죽으로 만든 튼튼한 가방'으로 말, 낙타 따위의 안장쪽에 달고 다니는 주머니이다. 길 떠나는 이에게 말이나 낙타가 살아있는 동무라면 새들백은 생명은 없으나 그 자체로 나그네를 표현하는 물건이다. 하나의 죽은 사물에 불과한 새들백은 아홉명의 나그네에게 각자 보물이 든 주머니, 천사의 메시지, 회개함 등으로 여겨지니 신비롭기만 하다. 어쩌면 이는 단순한 주머니가 아니라 우리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 아닐까.

 유럽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중 저주받은 보석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그 보석을 갖는 사람은 결국 그 저주 때문에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새들백은 그 보석처럼 저주받은 주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보석 이야기 속의 저주도 '각자가 마음먹은 것이 무엇인가'에 달린 것이듯 새들백과의 만남도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홀로 남겨지는 새들백과 아홉의 새로운 주인에 관한 에피소드는 참으로 신비하다. 전혀 관련없던 사람들이 새들백을 가지게 되면서 서로 관계되어지고, 새들백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다. 바뀌는 인생의 모습은 행복이나 파멸 등의 단편적인 결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결말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아홉의 주인공들은 새들백과의 인연의 끝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관계 없이 모두 세속을 초월하는 자유로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은 새들백을 만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다.

 이를테면 '새들백의 팔자'랄까.

사람에게만 정의되는 팔자라는 것이 사물에게도 있다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부터는 그 팔자가 저주가 될 수도 있고 행운의 물건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사주 팔자 인연' 운운 하는 것 처럼 우리들의 인생이 얼마나 기묘하게 고리지어 있는지, 그 고리가 여기에서는 '새들백'이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움직이며 인연이라는 하늘의 뜻으로 서로 만나고, 죽어있는 것은 늘 그 자리에서 새로운 만남(주인)을 기다린다.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이 만나니 죽어있는 새들백은 것은 더 이상 죽은 것이 아니다. 호의와 악의 또한 그 자리에 있음이 아니라 뜻하는 사람의 마음 씀에 달려있었다. 악한자가 보는 세상은 악한 것이고, 선한 자의 눈에는 선하게 보이는 법.

 마치 내가 아홉명의 주인공이 되어 아홉의 꿈을 꾸는 듯한 이 몽환적인 소설은 작가 바히이 나크자바니의 출신과 이력을 반영하듯 이국적이고, 교훈적이며,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과 사랑, 탐욕 등을 이야기 하는 이 책은 한편으로 '파울로 코엘료'를 떠올리게 했다. 초기에 번역 된 '연금술사'와 최근에 번역된 그의 처녀작 '순례자'가 그러하다. 이들의  소설은 읽는이로 하여금 주인공의 여정과 함께하며 구도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가 절제되고 말쑥한 교훈을 주었다면, 바히이 나크자바니는 인간 내면의 안개 낀 미로 속을 통과하는듯한 먹먹함을 느끼게 하고, 숨김 없는 욕망을 드러내어 읽는 이의 부끄러움 까지 끄집어내도록 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거짓되고 추한 모습까지 정화시킨다.

'이렇게 살아라' 하고 훈계하는 파울로 코엘료에게 바히이 나크자바니는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것도 인간이야' 라고.

 새들백 안의 물욕이나 이상향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 파멸의 순간 그제야 비로소 물질, 이상이 아닌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새들백은 그야말로 거울이다. 추악한 것 까지 비춰주는 거울. 그러나 그 거울은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세기와 종교를 뛰어넘는 내용의 이 소설 덕분에 깊은 밤 꿈 속에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나의 새들백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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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어떻게 책이 되었을까
윌리엄 슈니더윈드 지음, 박정연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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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천성이 '무교'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라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요즘은 어딜가도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이 드물다.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만의 믿음이 있는 종교를 가지고 있고 '무교입니다'라고 답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서양에서는 '나는 무교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한다. '무교'가 아니라 '특정 종교를 믿지 않습니다'가 맞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나도 여러차례 신앙을 가져보려 노력했던적이 있었는데 나는 종교와는 인연이 없는 것 같다. 달리 말하자면 신앙이 없이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중생이랄까. 그런 나도 종교의 교리만큼은 철학적인 의미에서 접근해보고자 하는 소망이 있다. 대학 때 기독교인인 친구를 따라 기독교 동아리의 전무후무할 '명예회원'으로 약 한달 성경공부를 했었다.(무교라서 '회원'은 아니었음^^;) 전적으로 종교적인 의미에서 동아리를 이끄는 사람의 지도와 전적으로 철학적인 의미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나와의 마찰로 길지 않은 기간에 끝을 맺었지만 말이다. 그 때 나는 새삼스럽게 '종교는 따지면 안되는 것. 종교적인 것으로 다투면 안된다는 것'을 되새겼다. 신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그 선배에게 토론하듯 교리를 물었던 나도 참 우습다. 전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미래에도 계속 나는 종교에 대한 것이라면 기독교든 불교든 옴진리교든 호불호를 구분하거나 과학적으로 따져보려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의문과 관심이라도 비종교인이기에 신앙이 아닌 철학적인 고찰로 이어지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종교인에게도, 비종교인에게도 유익한 책이 아닐까 싶다. '종교서적'에 꼽아두기엔 아까운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종교관련 서적이 '종교의 내용'이라거나 '종교의 실증'등을 따져들거나 한다면 이 책은 그저 '종교교리인 성경이 어떻게 책으로 만들어지고 현재에까지 이어졌는지'를 연구한 논문에 가깝다. 그렇기에 100% 종교적이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100% 학문적이지도 않다.

 민족의 탄생에는 종교적인 신화가 존재한다. 우리나라의 단군신화도 그러하다. 이러한 신화가 신앙으로 발전하여 민족의 종교로 오랜세월 함께 한다면 그것은 단순히 신화나 신앙이 아닌 역사가 된다. 역사란 그 안에 무수한 팽창과 소멸이 있다. 정복하고 정복당하는 것은 지도 위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종교 또한 그 역사의 파란과 함께 팽창하고 소멸하는 과정을 겪어왔다. 그렇다면 성경에 담긴 신앙은 역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종교가 역사가 될 때 그것은 신앙을 넘어서 현실이 된다. 신의 말씀은 그 민족의 뿌리가 되고 그 말씀을 전하는 기록의 책은 역사적 사실과 합해지게 된다. 성경 또한 무수한 시간동안 기록되고 덧붙여지고 해석되어왔다.

 이 책이 소개하고 있는 것은 성경의 내용이 아닌 '성경이 어떻게 책이 되었는가'라는 주제이다. 그래서 작가는 문자가 만들어지기 이전의 구전되던 시대에서 문자가 만들어진 이후, 문자가 보편화 된 시대에서의 성경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가 흔히 '객관적'인 문명의 상징으로 여기는 문자기록이 생각처럼 '객관적이지 않다'는데 있다. 기록이라는 것도 인간과 함께 변화하고, 단순한 대화도 시대와 함께 달라진다. 그래서 고문을 현대어로 다시 해석하는 것에서 오류가 발생하기 마련이며, 그 오류는 문자적인 것 외에 해석하는 사람의 개인적 사상과도 관련되어진다. 그래서 성경의 고문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교파의 주장이 달라지는 것 같다. 성경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성경과 함께 역사를 향유한 민족이다. 그래서 이 책에서도 이스라엘 등의 성경 안에 있는 민족의 역사도 함께 다루어지고 있다.

 이 책은 철학적 의미에서 기독교(종교)를 알고자 했던 나에게 일종의 교과서가 되어줄거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종교인에게 종교의 교리나 언어는 쉽지 않았다. 기독교인이라면 좀 더 쉽게 이해되었을 성경의 인용구나 관련 배경지식이 부족하니 처음부터 끝 까지 암호해독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행히 책 자체는 성경내용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기 보다는 구전되던 인류의 문화가 기록되어지는 역사를 담고있다보니 그런 것에서 책을 읽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세계사에 대한 지식도 부족해서 서양의 고대사에 대한 내용이 나오면 마치 외계어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러한 어려움 때문에 책을 좀 더 꼼꼼히 읽고 사료하지 못한점이 많다. 너무 학문적이고 너무 종교적이어서 머리를 싸매가며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을 수 밖에 없었달까.

 '성경'이라고 하면 '책'이라는 물체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성경은 전세계적으로 깰 수 없는 기록을 가진 베스트셀러라고 하지 않던가. 성경이 그토록 강한 힘을 가진 교리가 되고 그 교세를 수많은 나라로 뻗게 된 것은 성경의 힘인 동시에 문자의 힘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을 포함한 많은 종교 교리서들은 그 종교의 교리이기도 하지만 기록으로 이어져온 인류의 문화유산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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