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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시 - 눈을 감으면 다른 세상이 열린다
쓰네카와 고타로 지음, 이규원 옮김 / 노블마인 / 2006년 9월
평점 :
파랗고 빨간 작은 가방을 매고 넓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등교하던 어린시절 우리는 누구나 이상세계를 하나씩 꿈꾸고 있었다. 그것들은 저마다 다르게 표현되곤 했는데, 공주처럼 예뻤던 아이는 중세의 궁전을, 동화책을 좋아하던 아이는 네버랜드를, 마징가 Z가 되고 싶었던 아이는 장난감이 움직이는 세계를 꿈꾸었다. 그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상상했을 꿈의 나라는 바로 도깨비의 나라가 아닌가 싶다. 아직 할머니의 옛날 이야기가 통하던 시절이었으니 시골의 뒷간에 가면서도 도깨비를 만날까 두렵고, 전설의 고향을 보고 나면 산에 오르기가 두려워지곤 했던 것이다. 다 자라버린 지금은 '사후세계' 혹은 'SF에나 나올 법한 공상의 세계'라고 이름지으면 될까.
한국인에게 도깨비가 있다면 일본에는 좀 더 다양한 종류의 그것들이 존재한다. 일본인들은 모든 생명체나 사물을 신격화 시키는 특유의 토속신앙이 있었고, 부럽게도 그런 신앙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도 '너는 신의 아이란다. 작은 신이나 다름없으니 소중하고 귀여운 아이야.'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일본인에게는 태어날적부터 신이나 도깨비 등이 더욱 친숙할 것이다. 가끔 일본문화 관련 매체들을 접할 때 현실을 초월하는 놀라운 상상력을 발휘하는 모습 또한 그런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이러한 그들의 독특한 정신세계(혹은 면면히 이어져내려오는 문화적 소재)는 쓰네카와 고타로에게도 영향을 미쳤나보다. 그의 이번 작품 '야시' 또한 현세를 초월한 공간과 그곳에서 살아가는 요괴, 사체 등이 등장한다. 이 두 세계(인간세계와 초월한 세계)는 서로 공존하면서도 인간은 인간세계 밖의 세계는 눈에 보이지 않으며, 동시에 묘하게도 충돌하며 살아간다. 눈여겨 볼 것은 현실 세계는 급속도로 발전하는 반면에 요괴들의 세계(사후세계로 이해 됨)는 시간을 거스르는 면모를 보인다. 이를테면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것인데, 이것 또한 비교적 역사적으로 안정적이었고, 그래서 고유의 문화가 다치거나 잊혀지지 않을 수 있었던 일본의 문화적 강점을 나타낸다. 아무런 거부반응 없이 발전 된 현대사회와 기모노로 대변되는 옛날이 융화되는 것이다. 거기에 '모든 것은 죽어서 신이된다'는 일본의 문화적, 신화적 코드가 맞물려서 태어난 작품이 '야시'이다.
'야시'는 풀어쓰면 '야시장'의 의미이다.
복작거리는 주택가에 살다가 아파트 촌으로 처음 이사를 온 후, 어린아이에 불과했음에도 나는 향수를 느꼈다. 아파트는 놀이거리가 없었다. 고작 놀이터 몇 군데가 있었을 뿐, 주택가 처럼 온갖 모험요소는 잊어버려야 했다. 그런 갑작스러운 고요함이 싫었던 것 같다. 나는 엄마에게 뜬금없이 야시장에 가자고 졸랐다. 꼭 밤에 열리는 시장이 보고 싶었다. 집 근처에 유일하게 자리잡고 있던 시장에 갔던 그 날 밤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은 그마저 사라져버렸지만, 이 책을 읽는 순간 그 시장이 떠올랐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사람들이 왜 시장을 '도깨비 시장'이라고 부르는지도 새삼스럽게 느꼈다. 눈뜬 사람 코도 베어간다는 시장은 도깨비나 요괴가 돌아다니는 것 처럼 정신이 없기에 그렇게 불리는 것이다. 더 어릴때는 외가댁 근처의 시장에서 엄마 손을 놓쳐서 하루 종일 고생을 했던 기억이 있다. 과일가게에 앉아서 사과를 얻어먹으면서 태평하게 엄마, 아빠를 기다렸는데 나 혼자서는 '부모를 잃어버렸다. 어서 찾아야해'라는 급박함이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과일 가게에 앉아있으니 가게 문 밖으로 아빠와 엄마가 급히 왔다갔다 뛰어다니는 것이 보였다. 부모님은 몇번이고 나를 찾아 헤매인것인데 나는 아빠와 엄마가 바쁘다고만 생각하고 느긋하게 과일을 얻어먹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날 나는 엄청나게 궁둥이 찜질을 당해야했다.
야시의 첫 이야기에 나오는 아이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내가 그날 과일 상자 위에 앉아서 밖을 쳐다보고 있는 내내 밖과 안이 마치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과일 가게의 문을 경계로 안에 앉아 있는 나는 '고도'에 와 있는 것이고 밖(현실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안을 볼 수 없다. (그럼 나를 보살펴준 과일가게 아줌마는 요괴?)
책을 읽는 내내 정말 내가 요괴세계에 발을 디딘 기분이 들었다.
책 자체가 워낙 보기 좋게 편집이 되어있기도 했지만 이야기의 흡인력이 너무 강해서 매말라버린 감정이 다시 촉촉해지며 어린아이가 된 기분으로 괴물들을 지나쳤다.
특히 나는 주로 밤에 불을 꺼 놓고 잠들기 직전에 스탠드 불빛에 의지해서 책을 읽는 편인데, 그 때마다 벽에 걸린 옷의 그림자가 자꾸 눈에 밟혔다. 꿈에 요괴가 안 나온게 다행이랄까.
일본 소설은 무게가 없다. (물론 이 문장에 말을 덧붙이자면 '무게 있는 소설에 비해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늘 일본 소설이나 문화를 대하면서 느끼는 불안감과 질투, 부러움은 이번에도 어쩔 수가 없다.
침범당하지 않은 고유의 문화와 우리가 문화 침체기를 겪을 수 밖에 없었던 약 50년간 일본의 문화는 엄청나게 발전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틈새는 영원히 매꿀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나를 슬프게 만든다. 그리고 그런 일본의 문화적 재산들이 부럽다. 나는 한국인이기에 한국의 문화를 늘 남의 문화와 견주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이유로 나는 일본 문학이 가볍더라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