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백 - 소유할 수 없는 자유에 관한 아홉 가지 이야기
바히이 나크자바니 지음, 이명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0월
평점 :
품절


 10월의 마지막 주 이십하고도 일곱번째의 밤을 맞이한다.

늦가을의 밤바람은 제법 차가워져서 문을 꼭꼭 닫아도 틈새로 칼날처럼 파고든다. 방바닥이 금방 식을까봐 일찌감치 이부자리를 깔고 그 속으로 들어가 누웠다. 양 팔꿈치를 바닥에 대고 책을 고정시킨 후 책의 나머지를 읽어내리기 시작했다. 책을 오래 읽기에 불편한 자세이지만 내가 태어난 후 처음 책이란 걸 손에 쥔 후부터 생긴 나만의 독서 자세이다. 방바닥이 따뜻하고 늦가을 특유의 고요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지금 막 중간을 넘어선 이 새들백이라는 책도 고요한 가을 공기와 닮아있다. 마음을 안정시켜준다는 허브티를 옆에 두고 홀짝거리며 책에 빠져든다.

 꿈을 꾸는 것 같다. 정적이 흐르는 가을의 밤, 새들백은 아홉의 꿈을 꾸게 했다.

 아홉명의 살아있는 자에게 다가온 새들백과의 운명적 만남처럼 마치 내가 걷고 있는 사막의 길에서 예고없이 알 수 없는 물건을 만난 듯 이 책을 처음 만나고 나서는 몹시 어리둥절했다. '새들백이 뭐지? 이 묘한 표지그림은?' 새들백은 '안장가죽으로 만든 튼튼한 가방'으로 말, 낙타 따위의 안장쪽에 달고 다니는 주머니이다. 길 떠나는 이에게 말이나 낙타가 살아있는 동무라면 새들백은 생명은 없으나 그 자체로 나그네를 표현하는 물건이다. 하나의 죽은 사물에 불과한 새들백은 아홉명의 나그네에게 각자 보물이 든 주머니, 천사의 메시지, 회개함 등으로 여겨지니 신비롭기만 하다. 어쩌면 이는 단순한 주머니가 아니라 우리를 비추는 맑은 거울이 아닐까.

 유럽에서 전해오는 이야기 중 저주받은 보석에 대해 들어봤을 것이다. 그 보석을 갖는 사람은 결국 그 저주 때문에 파멸에 이른다는 내용이다. 새들백은 그 보석처럼 저주받은 주머니는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들에게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보석 이야기 속의 저주도 '각자가 마음먹은 것이 무엇인가'에 달린 것이듯 새들백과의 만남도 마음먹기에 달려있다. 

 홀로 남겨지는 새들백과 아홉의 새로운 주인에 관한 에피소드는 참으로 신비하다. 전혀 관련없던 사람들이 새들백을 가지게 되면서 서로 관계되어지고, 새들백으로 인해 인생이 바뀐다. 바뀌는 인생의 모습은 행복이나 파멸 등의 단편적인 결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고 결말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아홉의 주인공들은 새들백과의 인연의 끝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관계 없이 모두 세속을 초월하는 자유로움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유로움은 새들백을 만나지 않으면 경험할 수 없다.

 이를테면 '새들백의 팔자'랄까.

사람에게만 정의되는 팔자라는 것이 사물에게도 있다면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부터는 그 팔자가 저주가 될 수도 있고 행운의 물건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가 '사주 팔자 인연' 운운 하는 것 처럼 우리들의 인생이 얼마나 기묘하게 고리지어 있는지, 그 고리가 여기에서는 '새들백'이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것은 계속 변화하고 움직이며 인연이라는 하늘의 뜻으로 서로 만나고, 죽어있는 것은 늘 그 자리에서 새로운 만남(주인)을 기다린다. 살아있는 것과 죽어있는 것이 만나니 죽어있는 새들백은 것은 더 이상 죽은 것이 아니다. 호의와 악의 또한 그 자리에 있음이 아니라 뜻하는 사람의 마음 씀에 달려있었다. 악한자가 보는 세상은 악한 것이고, 선한 자의 눈에는 선하게 보이는 법.

 마치 내가 아홉명의 주인공이 되어 아홉의 꿈을 꾸는 듯한 이 몽환적인 소설은 작가 바히이 나크자바니의 출신과 이력을 반영하듯 이국적이고, 교훈적이며,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의 욕망과 사랑, 탐욕 등을 이야기 하는 이 책은 한편으로 '파울로 코엘료'를 떠올리게 했다. 초기에 번역 된 '연금술사'와 최근에 번역된 그의 처녀작 '순례자'가 그러하다. 이들의  소설은 읽는이로 하여금 주인공의 여정과 함께하며 구도하는 마음을 갖게 만드는 힘이 있다. 파울로 코엘료가 절제되고 말쑥한 교훈을 주었다면, 바히이 나크자바니는 인간 내면의 안개 낀 미로 속을 통과하는듯한 먹먹함을 느끼게 하고, 숨김 없는 욕망을 드러내어 읽는 이의 부끄러움 까지 끄집어내도록 함으로써 인간 본연의 거짓되고 추한 모습까지 정화시킨다.

'이렇게 살아라' 하고 훈계하는 파울로 코엘료에게 바히이 나크자바니는 말한다.

'이렇게 사는 것도 인간이야' 라고.

 새들백 안의 물욕이나 이상향에 눈이 멀어버린 인간 파멸의 순간 그제야 비로소 물질, 이상이 아닌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새들백은 그야말로 거울이다. 추악한 것 까지 비춰주는 거울. 그러나 그 거울은 더러운 것을 정화시키는 힘이 있다. 세기와 종교를 뛰어넘는 내용의 이 소설 덕분에 깊은 밤 꿈 속에서 그동안 행방이 묘연했던 나의 새들백을 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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