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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피터팬
제랄딘 맥코린 지음, 조동섭 옮김 / 김영사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제랄딘 매커린 저, 조동섭 역 | 김영사 | 원제 Peter Pan In Scarlet | 2006년 10월
기억나? 매일 밤 달빛이 비추던 창문 너머 나뭇가지의 그림자. 반지하의 집안 방 창문으로는 나무들이 괴물의 모습의 찢어진 입을 벌리고 낄낄대며 웃곤했어. 티없는 어린아이였던 나에게는 유일한 공포였지. 난 매일밤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었고, 겨우 잠이 들어서도 매마른 모래밭을 기어다니는 무시무시한 호랑이 꿈에 시달리곤 했어. 울면서 깨는 나를 업고 달래던 아빠의 따뜻하고 커다란 등이 생각나네.
무수한 불면의 밤을 경험하던 그 어린시절, 그림이나 사진 때위가 붙은 한글단어를 배우는 책 이외에 읽은 나의 첫 동화는 아마도 '파랑새'였던 것 같아. 그 몽롱하고 음울한 책은 어린 나에게 깊고 푸른 밤의 색을 경험하게 해 주었지.
옆 집의 남자아이네 집에는 비디오 플레이어가 있었어. 용감한 '후레쉬맨'을 한 번 얻어 보기 위해서 온갖 사탕발림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지. 그러던 어느날 우리 집에도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했어. '후크'라는 영화를 본 것은 행운이었어. 팅커벨과 창문너머 달과 별을 헤치고 날아오는 녹색 옷의 그 아이 말이야. 난 어리고 밤의 나무 그림자를 두려워하던 불면증에 걸린 작은 꼬마였고 그 아이는 밤도 모험도 두렵지 않은 용감한 피터팬이었지.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점점 자라고 있지만 그 애는 영원히 어린이로 남을 거라는 사실이었어.
'파랑새'를 읽으며 다져진 나의 어둠 사랑을 시작으로 '후크'라는 그 비디오를 열 번도 넘게 돌려 보면서 불면의 밤과도 이별을 고할 수 있게 되었어. 피터팬을 만나고난 후 밤은 더이상 어둡고 두려운 것이 아니었고, 나무 그림자의 찢어진 입도 우스꽝스러운 인형처럼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나는 동화 속 이야기와는 동떨어진 현실에 집중하게 되었고, 그게 바로 어른이 되어가는 것인지 그땐 몰랐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난 스무살이었고 더이상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른도 아닌 것이 불안하고 두려워지기 시작했어. 난 아이가 아니니까 이제 피터팬을 만날 수 없었어. 나는 그 때 네버랜드에서 살던 영원한 어린이인 '어른이 될 수 없는 피터팬'이 되어버린거야. 피터팬인 내가 네버랜드를 떠나자 갑자기 어른이 되길 강요받기 시작했고 '나는 왜 아직 어른이 되지 않는걸까'하고 불행해진거야.
그리고 오늘 나는 다시 네버랜드에 다녀왔어.
네버랜드에 가 본 어린이는 어른이 되어서도 결코 불행하지 않아. 여기 다시 모인 웬디와 아이들을 봐. 그들은 엄마, 아빠, 의사, 판사가 되었지만 아직도 어린애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어. 여전히 요정의 존재를 믿고 '요정을 무시하면 그 요정은 죽어!' 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해. 웬디는 어김없이 모든 아이들의 엄마가 되어주고, 피터팬도 옛 친구들을 만나서 다시 모험을 떠나기로 했어. 아무도 이들을 어른이라고 말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벌써 어린이가 되어버렸어. 왜냐하면 그들은 '네버랜드 출신'이거든. 우리 모두가 그렇듯이.
다시 만난 피터팬은 더 이상 예전의 그가 아니었어. 네버랜드도 많이 변했지. 상상력도 점점 힘을 잃고 있었고, 아이들은 더 이상 즐겁지가 않았어. 그들은 어른을 만나게 된거야. 지난 날 후크라는 무시무시한 어른을 만난 것에 비하면 이번은 더 끔찍해. 아이들은 이미 네버랜드 밖에서 어른이 되었고, 어른의 생활, 어른의 생각을 경험했어. 그리고 피터팬도 몸은 자라지 않지만 돌아온 후크(!)의 놀라운 조종으로 마음은 점점 어른으로 변해갔어. 모두 어른을 경험한거야. 그런데 이상하지? 이제 그들은 다투지 않아. 우리 모두는 어린이였고 그래서 어른이 된 어른들은 어린이와 어른 모두를 이해하기 쉬워. 하지만 영원히 어린이인 피터팬은 달라. 그는 어른이 되지 않기 때문에 어른은 이해할 수 없어. 그런 그가 이제 어른의 마음을 가져보게 되고, 어른을 이해하게 되는거야. 그리고 엄마를 이해하게 되지. 버림받았다는 아픔과 증오를 털어버리게 되는거야. 아, 그 여정이 얼마나 감동적인지...
이미 네버랜드에서 함께 용감하게 모험을 펼쳤던 그들은 이번에도 용기로 무장하고 '악한' 어른과 싸워. 착한 어른은 어린이의 마음을 잊지 않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지. 어른은 아이를 돌보고 아이는 어른과 친구가 되는거야. 가끔 마음이 맞지 않을 때는 노웨어랜드로 보내버리면 돼. 그러면 그 아이와는 말도 하면 안되고 옆에 있지 않은 것 처럼 굴어야하지. 하지만 이 벌칙은 별로 효과가 없어. 왜냐면 아이들은 자기들이 티격태격 했다는 것을 곧 잊어버리거든. 그리고 용서도 빠르지. 가장 악한 욕은 '꼬끼오 놈'이라는 거야. '이 못난 꼬끼오 놈아!' 라고 하는 거지. 아마 아이들 중 피터팬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겠지?
그들과의 두 번 째 네버랜드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어른이 되어있어. 첫번 째 여행에서는 나도 그들도 어린이였기 때문에 어린이의 눈으로 네버랜드를 보았지만 지금은 어른의 눈으로 그 곳을 보게 되더라. 어른이 된 사람도 아이 같은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어. 그리고 내가 나중에 웬디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는다면 네버랜드의 아이들처럼 티 없이 자랄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어.
(물론 아이가 유모차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하고, 혹여나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요정과 피터팬이 지켜준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
동화라는 것은 정말 대단하지. 어린이건 어른이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는 눈을 갖게 해 줘. 물론 아이의 눈에 그것이 좀 더 잘 보이지. 나는 이번에 돌아온 피터팬을 만나면서 다시 꼬마소녀가 된 기분이었고, 그 뿐 아니라 어른으로서 동심을 잃지 않고 사는 방법도 알 것 같아.
이젠 어른이 되어도 슬프거나 두렵지 않아. 언제든 네버랜드에 가서 피터팬을 만날 수 있으니까. 가끔 어릴적으로 돌아가서 꽁꽁 얼어붙은 나의 네버랜드를 녹여보는 건 어떨까.
어른이 되면 불행해진다고 누가 그래? 나는 영원히 어린 아이일 것이고 늘 행복하게 살거야. 나의 네버랜드에서.
+ 한동안 어른이 되어 불행했어요.
용기를 주어서 고마워 피터팬!
(그리고 피터팬의 아빠 제임스 매튜 베리와 엄마 제랄딘 매커린에게도 감사를^^)
너는 나에게 새우깡, 불량식품, 담장의 개나리, 초등학교의 운동장, 크레파스 냄새 같은 존재야.
이제 용기를 모아서 날아오르자. (팅커벨, 파이어플라이어 뭐하니 요정가루 안 뿌리고)
해야할 일
-자라지 말 것.
나는 법을 기억할 것.
요정 가루를 찾을 것.
아내에게 할 변명거리를 생각할 것. (P 24)
"그런 말 하면 안 돼! 절대 안 돼!" 닙스 씨가 하얗게 길려 소리쳤다.
"생각 안 나? 요정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때마다 요정 하나가 어디선가 죽는단 말이야!" (p 26)
"길이 잘 닦여 있을 거라 생각했어? 아니야. 그래도 우린 해냈어! 누구나 아무 때든 여기 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아니면 어림도 없어! 쉬운 일을 하고 싶었어? 공원을 산책하고 싶었어? 누구나 다 부자가 되는건 아냐. 누구나 다 강하거나 영리한 것도 아니지. 누구나 다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아냐. 그렇지만 누구나 용감해질 수는 있어! 할 수 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면, 우리 마음에 대고 '포기하지 마'라고 말하면, 스스로 영웅답게 행동하면...... 우리는 누구나 용감해질 수 있어! 위험을 똑바로 마주한 채 칼을 휘두르며 말하는 거야! '반갑다, 위험아! 난 네가 두렵지 않아!' 용기는 그냥 갖기만 하면 돼. 돈을 주고 살 필요도 없어. 학교에 가서 배우지 않아도 돼! 용기만 있으면 된다구!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내가 틀렸어? 용기만 있으면 돼! 용기만 있으면 모두 이겨낼 수 있어!" (p 1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