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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클럽
크리스티앙 가이이 지음, 김도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누군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때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
예술적인 재능이란 그렇다고 본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타고나야만 숙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음악도 미술도 글쓰기도 그렇다. '난 천재가 아니에요, 그저 노력했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팔할은 타고난 것이다. 겸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신내림처럼, 그들은 그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생에는 삼신할머니와 모든 조물주를 못살게 굴어서라도 예술가로 태어나고 싶다. 그와 함께 딸려올 모든 고난과 역경도 받아들이리.
음만 듣고 악보를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학교 축제가 되면 악보를 구하지 못해도 모든 곡은 그 아이의 손에 들어가면 빠짐없이 악보로 재탄생했다.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꿈꾸었을 그 아이는 꿈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수능날을 몇달 앞두고 병이 걸렸다. 피아노는 손을 놓은지 4년째. 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연주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지, 연주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뒤쳐지고 있는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너는 할 수 있어. 아직 19살이야.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때때로 말은 주문처럼 마법을 건다. 나의 말이 응원이 되고 주문이 되어 그 아이는 다시 피아노를 시작했다. 놀라운 속도로 기존의 학생들을 따라잡고 말았다. 대학 차석. 그리고 재수. 국내 최고의 대학에 합격... 나는 그 아이를 '천재'라고 불렀다. 너는 천재야. 난 니가 연주하는 곡을 꼭 듣고 싶어. 너의 손이 부서질 정도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줘. 쉬지 말고 노력해줘. 얼마전 친구의 졸업 연주회가 있었다. 그녀가 작곡한 곡들을 연주자들이 연주했다. 재능이란 이렇게 환상적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사람들 각자의 재능을 믿는다. 이 친구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면 다른 사람도 분명 각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스럽게 말하자면 신이 나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려보낼 때부터 이미 나의 재능은 정해져있고, 그것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라고.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태어난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삶이 고통스럽다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괴로운 삶도 있느니라 하고 말이다.
<작가 크리스티앙 가이이>
재능을 찾는 것은 외로운 여정이다. 마침내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홀로 사는 인생이 아니기에 그 길을 온전히 마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크리스티앙 가이이의 꿈은 비행사였다. 근시로 좌절된 꿈 이후에 그는 재즈를 연주했다. 예술은 좌절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남들이 당신이 최고요,라고 말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좌절하고 만다. 그는 재즈에 좌절했다. 그리고 정신분석가가 되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작가 크리스티앙 가이이의 인생이 담겨있다고 해도 무관한 이 소설의 시작이다.
<시몽 나르디>
*시몽 나르디를 닮으셨네요. 그녀가 말했다. 아, 그래요? 시몽이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죠? (59)*
그는 자기를 잃었다. 시몽 나르디는 재즈 연주가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연주자는 예술의 힘에 지배당했다. 그는 그 힘에 못이겨 무너졌다. (그래서 예술가는 예술 자체의 힘을 이길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를 쉬잔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좌절과 마약에 찌들어 죽어가는 그를 그녀가 구해냈다. 둘은 가족이 되었다. 그는 재즈를 포기했고, 정비공이 되었다. 재즈를 할 때 보다는 고요한 삶이 이어졌다. 재능을 발휘하는 것 혹은 꿈을 이루는 것과 자기를 지키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그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예술적 재능 대신 자신을 지키기로 했다. 꿈이 빠져나간 인간은 껍데기와도 같다. 그는 껍데기인 채 정비공으로서 떠난 출장에서 우연히 재즈클럽에 들른다. 젊은시절 자신의 연주법을 따라해보는 젊은 연주가들의 재즈를 듣고 과거를 회상한다. 재즈가 삶이었던 그 때, 재즈를 거부하는 현재.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연주한다. 건반을 따라 텅 빈 그의 과거가 하나 둘 씩 채워져간다.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난다. 데뷔는 재즈 가수이다. 두 사람은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우리는 운명이야. 그의 현실은 과거가 되고 그의 과거가 현재와 이어진다. 재즈가 지워졌던 그의 인생은 희미해진다. 그래, 모든 것은 우연처럼 일어난다.
*이해해 줘. 난 너무 행복했어. 절실히 원하긴 했지만, 내가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게 아냐. 내 앞에 펼쳐져 있었어. 그런 상황이. 그래, 물론 내가 물리칠 수도 있었겠지. 어쨋든,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내일 전화해서 말해줄게. (64)*
<기차는 떠났다>
아니. 기차는 떠난게 아니다. 그가 그냥 두고본 것 뿐, 기차란 늘 멈추고 출발하기를 반복하는 것 뿐이다. 쉬잔과 정비공의 삶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매 순간 그의 앞에 놓여지고 일정한 시간 그를 기다린다. 그는 망설이는 척 할 뿐 모두 알고 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라고.
우리는 사랑해서 함께이지만 하나일 수는 없다.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반드시 해가 지고 밤이 오듯이 우리 인생은 늘 변화하는 환경속에 놓이게 된다. 그 때 마다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탓 할 수 있을까?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현실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동안의 과거를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었다. 양 팔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두 어머니에게 붙잡힌 아기처럼 그는 망설인다.
*그는 쉬잔이 길에서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감사했다고. 그래, 그녀에게 고마워했다고. 넌 이해 못할 거라고 내게 말했다. (162)*
쉬잔이 죽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말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은, 인생은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니까. '당신이 그 여자와 재즈가 그렇게 좋다면 당신의 인생을 살아.' 라고 말하는 것만큼 비 현실적인 대사가 있을까? 그래서 작가는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용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하는 방법은 죽음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독자로서 그녀의 죽음이 마음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재즈를 사랑하는 시몽도, 시몽을 구한 쉬잔도, 시몽을 만난 데비도, 시몽과 쉬잔의 아들 자미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삶의 운명같은 여정에 할 말을 잃는 것이다. '어떨 수 없었어.'라고 말하는 수 밖에.
시몽은 예술가이다. 예술적 재능은 신내림과도 같은 운명이다. 시몽이 혼자였다면, 그는 마약과 재즈에 찌들어서 죽어갔을지언정 재즈를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운명을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모를리 없다. 모두 그의 억눌린 소망에 함께 갑갑해했다.
*곳에 그냥 계세요. 다시 돌아오실 필요 없어요. 어머니는 아르헨티나 남자랑 떠났어요. 아버지한테 질렸대요. 저보고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시면서, 술을 드리고, 재즈를 연주하세요.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169)*
어쩌면 모두 그가 재즈를 연주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재즈와 살아야하는 사람이야. 라고.... 그리고 그는 재즈를 향해 떠났다.
<말하는 이와 듣는이가 뒤섞인 문체>
시몽의 친구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은 그가 보고 들은 시몽의 일생에 대한 회고와도 같다. 조용조용히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분명 이야기속에 슬픔과 이별, 죽음을 담고 있음에도 아무도 소리지르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삐뚤어지고 곧 튕겨져나올 것 같지만 제자리를 찾는 취한듯한 곡선의 재즈 선율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