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즈클럽
크리스티앙 가이이 지음, 김도연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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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부러운 사람이 누구냐?'고 물을때면 나는 늘 이렇게 말한다.

 "예술적 재능을 타고난 사람".

예술적인 재능이란 그렇다고 본다.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타고나는 것이라고.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지만 타고나야만 숙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음악도 미술도 글쓰기도 그렇다. '난 천재가 아니에요, 그저 노력했을 뿐이에요'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도 팔할은 타고난 것이다. 겸손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신내림처럼, 그들은 그런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다음 생에는 삼신할머니와 모든 조물주를 못살게 굴어서라도 예술가로 태어나고 싶다. 그와 함께 딸려올 모든 고난과 역경도 받아들이리.

 음만 듣고 악보를 그리는 아이가 있었다. 학교 축제가 되면 악보를 구하지 못해도 모든 곡은 그 아이의 손에 들어가면 빠짐없이 악보로 재탄생했다. 예술고등학교 진학을 꿈꾸었을 그 아이는 꿈을 포기했다. 그러다가 수능날을 몇달 앞두고 병이 걸렸다. 피아노는 손을 놓은지 4년째. 그 아이는 알고 있었다. 연주를 하려면 얼마나 많은 희생이 따르는지, 연주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에 비해 자기가 얼마나 뒤쳐지고 있는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너는 할 수 있어. 아직 19살이야. 지금부터 시작이라고. 때때로 말은 주문처럼 마법을 건다. 나의 말이 응원이 되고 주문이 되어 그 아이는 다시 피아노를 시작했다. 놀라운 속도로 기존의 학생들을 따라잡고 말았다. 대학 차석. 그리고 재수. 국내 최고의 대학에 합격... 나는 그 아이를 '천재'라고 불렀다. 너는 천재야. 난 니가 연주하는 곡을 꼭 듣고 싶어. 너의 손이 부서질 정도로 연습하는 모습을 보여줘. 쉬지 말고 노력해줘. 얼마전 친구의 졸업 연주회가 있었다. 그녀가 작곡한 곡들을 연주자들이 연주했다. 재능이란 이렇게 환상적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나는 사람들 각자의 재능을 믿는다. 이 친구가 음악적 재능을 타고났다면 다른 사람도 분명 각자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 어린이스럽게 말하자면 신이 나를 만들어서 세상에 내려보낼 때부터 이미 나의 재능은 정해져있고, 그것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라고. 달리 말하자면 우리가 태어난 것에는 분명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 삶이 고통스럽다가 끝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의 이유이다. 세상에는 이렇게 괴로운 삶도 있느니라 하고 말이다.

<작가 크리스티앙 가이이>
재능을 찾는 것은 외로운 여정이다. 마침내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홀로 사는 인생이 아니기에 그 길을 온전히 마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크리스티앙 가이이의 꿈은 비행사였다. 근시로 좌절된 꿈 이후에 그는 재즈를 연주했다. 예술은 좌절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아무리 남들이 당신이 최고요,라고 말해도 스스로 만족하지 않으면 좌절하고 만다. 그는 재즈에 좌절했다. 그리고 정신분석가가 되었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것이 작가 크리스티앙 가이이의 인생이 담겨있다고 해도 무관한 이 소설의 시작이다.

 <시몽 나르디>
*시몽 나르디를 닮으셨네요. 그녀가 말했다. 아, 그래요? 시몽이 말했다. 그 사람이 누구죠? (59)*

 그는 자기를 잃었다. 시몽 나르디는 재즈 연주가였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연주자는 예술의 힘에 지배당했다. 그는 그 힘에 못이겨 무너졌다. (그래서 예술가는 예술 자체의 힘을 이길 수 있도록 정신적으로 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그를 쉬잔이 구해주었다고 한다. 좌절과 마약에 찌들어 죽어가는 그를 그녀가 구해냈다. 둘은 가족이 되었다. 그는 재즈를 포기했고, 정비공이 되었다. 재즈를 할 때 보다는 고요한 삶이 이어졌다. 재능을 발휘하는 것 혹은 꿈을 이루는 것과 자기를 지키는 일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할까. 그는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예술적 재능 대신 자신을 지키기로 했다. 꿈이 빠져나간 인간은 껍데기와도 같다. 그는 껍데기인 채 정비공으로서 떠난 출장에서 우연히 재즈클럽에 들른다. 젊은시절 자신의 연주법을 따라해보는 젊은 연주가들의 재즈를 듣고 과거를 회상한다. 재즈가 삶이었던 그 때, 재즈를 거부하는 현재.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연주한다. 건반을 따라 텅 빈 그의 과거가 하나 둘 씩 채워져간다. 그리고 한 여인을 만난다. 데뷔는 재즈 가수이다. 두 사람은 첫 눈에 서로를 알아본다. 우리는 운명이야. 그의 현실은 과거가 되고 그의 과거가 현재와 이어진다. 재즈가 지워졌던 그의 인생은 희미해진다. 그래, 모든 것은 우연처럼 일어난다.

*이해해 줘. 난 너무 행복했어. 절실히 원하긴 했지만, 내가 일부러 그러려고 했던 게 아냐. 내 앞에 펼쳐져 있었어. 그런 상황이. 그래, 물론 내가 물리칠 수도 있었겠지. 어쨋든, 걱정하지 말고, 푹 쉬어. 내일 전화해서 말해줄게. (64)*

<기차는 떠났다>
아니. 기차는 떠난게 아니다. 그가 그냥 두고본 것 뿐, 기차란 늘 멈추고 출발하기를 반복하는 것 뿐이다. 쉬잔과 정비공의 삶으로 돌아가는 기차는 매 순간 그의 앞에 놓여지고 일정한 시간 그를 기다린다. 그는 망설이는 척 할 뿐 모두 알고 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아. 라고.

우리는 사랑해서 함께이지만 하나일 수는 없다. 해가 뜨고 아침이 오면 반드시 해가 지고 밤이 오듯이 우리 인생은 늘 변화하는 환경속에 놓이게 된다. 그 때 마다 변덕스러운 인간의 마음을 탓 할 수 있을까?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혼자가 아닌 함께라는 현실이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고 그동안의 과거를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었다. 양 팔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두 어머니에게 붙잡힌 아기처럼 그는 망설인다.

*그는 쉬잔이 길에서 죽었으면 하고 바랐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녀에게 감사했다고. 그래, 그녀에게 고마워했다고. 넌 이해 못할 거라고 내게 말했다. (162)*

쉬잔이 죽었다. 그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말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랑은, 인생은 양보하기 어려운 것이니까. '당신이 그 여자와 재즈가 그렇게 좋다면 당신의 인생을 살아.' 라고 말하는 것만큼 비 현실적인 대사가 있을까? 그래서 작가는 그런 결말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용서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용서하는 방법은 죽음 뿐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독자로서 그녀의 죽음이 마음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재즈를 사랑하는 시몽도, 시몽을 구한 쉬잔도, 시몽을 만난 데비도, 시몽과 쉬잔의 아들 자미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삶의 운명같은 여정에 할 말을 잃는 것이다. '어떨 수 없었어.'라고 말하는 수 밖에.

시몽은 예술가이다. 예술적 재능은 신내림과도 같은 운명이다. 시몽이 혼자였다면, 그는 마약과 재즈에 찌들어서 죽어갔을지언정 재즈를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그의 운명을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의 모를리 없다. 모두 그의 억눌린 소망에 함께 갑갑해했다.

*곳에 그냥 계세요. 다시 돌아오실 필요 없어요. 어머니는 아르헨티나 남자랑 떠났어요. 아버지한테 질렸대요. 저보고 얘기하라고 했어요.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시면서, 술을 드리고, 재즈를 연주하세요. 엄마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169)*

어쩌면 모두 그가 재즈를 연주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홀연히 떠나서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당신은 재즈와 살아야하는 사람이야. 라고.... 그리고 그는 재즈를 향해 떠났다.

<말하는 이와 듣는이가 뒤섞인 문체>
시몽의 친구가 화자로 등장하는 소설은 그가 보고 들은 시몽의 일생에 대한 회고와도 같다. 조용조용히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분명 이야기속에 슬픔과 이별, 죽음을 담고 있음에도 아무도 소리지르거나 분노하지 않는다. 삐뚤어지고 곧 튕겨져나올 것 같지만 제자리를 찾는 취한듯한 곡선의 재즈 선율 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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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남자 - KI신서 916
페르난도 트리아스 데 베스 지음, 권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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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리뷰어<<

<아, 원죄여>
 내 나이 스물을 갓 넘기고야 '인간의 원죄란 평생 일하며 살아야 하는 죄'가 아닌가 하고 깨달았던 때가 기억난다. 막연하게 '직장, 일'이라는 것을 생각하다가 어느날 사회인이 되고 짧게는 일주일의 5~6일을 길게는 평생의 대부분을 일해야하고, 학생때와 같은 방학이란 꿈도 꾸지 못한다는 것을 체감했을 때, 그 충격은 이루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나 나처럼 삶의 의미 자체가 무위도식 혹은 유유자적 네 글자로 요약되는 사람에게는 정해진 일정의 삶이 나의 라이프 스타일과는 전혀 관계없이 끌려간다는 생각을 하니 죽고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나와 우리 모두의 부모님께도 존경을 표했더랬지...취직하자마자 정년퇴직을 손꼽을 날이 올줄이야!)
 
 35년이라는 시간(T)은 다 자라버린 어른에게는 평생과도 같다. 가진 것(A)과 빚진 것(P)을 계산해보고 P를 갚으려면 35년이 걸린다는 결론이 나왔을 때 우리의 주인공 TC가 느꼈을 좌절과 고통을 말해봐야 입만 아프지. 내 한몸 의지할 집 한 채 얻는데 필요한 것은 몇 천만원에서 몇 억원의 돈이 아닌 그 돈을 벌어야하는 시간인 것이다! 다들 알겠지만 우리 인간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이것을 지불하라니 이게 원죄가 아니고 뭐냔말이지. 여기서 TC는 "T(시간)는 $(시간)이다"라는 동서고금을 불문하는 명제를 몸소 체험하며 증명해보인 것이다. 아...개인의 원초적 이상이자 꿈(TC에게는 개미연구, 나에게는 무위도식)을 현실화하지 못하게 막는 원죄여~
 
<모모와 회색신사, TC와 체제>
 미하엘 헨데의 '모모'를 기억하는가? '시간을 파는 남자'라는 제목을 듣자마자 나에게 떠오른 것은 '모모'의 회색신사였다. 모모를 읽던 당시 이미 어른이 된 내가 책속으로 들어간듯한 착각에 빠져 모모와 잡은 손을 놓칠세라 두 손을 꼭 쥐고 회색신사에게 붙잡힐까 불안에 떨던 모습이라니.... 다 읽고난 후 '내 시간은 절대로 회색신사 눈에 띄지 않게 하겠어!'라고 다짐했던 것이 생각난다.
 
 여기에 시간 강박증 초기에서 중기를 지나 말기로 가고 있는 한 사나이가 있다. 적두개미를 연구하겠다는 일생일대의 숙원을 이룰 계획을 가진 주인공 TC는 돈($)이 없어서 집을 넓힐 수가 없고, 집이 좁아 셋째아이도 가질 수 없는 등의 현실을 자각하게 된다. 자산과 부채를 정리해보던 중 융자금 등을 합한 빚을 갚기 위해 적어도 35년을 꼬박 직장에 다니며 일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하여 나온 공식, "시간(T)은 돈($)이다."
시간을 버는 것이 돈을 버는 것이고 돈을 벌면 부채를 갚고 개미연구를 시작하는 시점을 좀 더 앞당길 수 있다.
 
 급기야 그는 시간을 팔기로 결심한다. 이 엉뚱하고 비 상식적인 계획이 어찌나 치밀하게 계산되고 있던지 하마터면 나까지 의심없이 수긍할 뻔 했다. 누가그랬던가 '상식을 깨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시간이 아닌 '여유'가 필요해>
 그의 개인적인 소망은 나라 전체로 영향을 끼치고 결정적으로 국가기반을 흔드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어쩌면 그가 발견한 시간과 돈의 상호 관련성은 생각보다 단순한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시간이 없다고 바둥대며 인간은 빠른것을 창조해냈다. 엘리베이터, 로켓, 비행기, 패스트푸드, 컴퓨터 등등... 그러나 우리는 아직도 시간에 쫓기고 비행기 따위의 피조물들이 느리다며 답답해하며 계속해서 더 빠른 것을 원하고 조바심 낸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은 때로 '느린것'을 갈망하기도 하니 얼마나 우스운가. 어쩌면 우리가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것은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 '여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5분이 담겨있다는 플라스틱 통을 구입한 책 속의 사람들은 5분을 산 것이 아니라 일하지 않을 자유, 즉 여유를 산 것이다.
 
<시간&체제의 관계>
 "정부의 강경한 부동산 정책에도 불구하고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있습니다."
매일같이 뉴스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아나운서의 맨트가 "체제의 단속에도 불구하고 시간의 값이 천정부지로 오르고 있습니다."로 들리는 것은 나뿐인가. 지금 경제가 파도타듯 위태로운 것은 우리나라만이 아니라고 한다. 안심시키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시대와, 경제체제가 전세계적으로 변화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자급자족하던 원시시대에서 신석기혁명이 일어나고 그 후 산업혁명이 전세계를 변화시켰듯이 IT시대도, T(시간) 중심의 $(돈, 경제적 부)의 시대도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즈음에 온 것이다. 이렇게 가치는 매순간 변화한다. 이것은 '체제'와 함께 연관되어진다. 체제는 가치를 통제하고 가치 또한 체제를 통제한다. 그렇다면 체제나 가치를 창조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바로 우리들 스스로이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하는 사람, 꼭 들어맞는 예측을 하여 사람들을 이끄는 이를 선구자라고 한다. 우리 각자가 개인의 인생에 있어서 선구자라고 한다면 이제 한번쯤 생각해보자. 이 다음 시대에는 무엇이 절대가치가 되겠는가? 이제껏 인류를 이끌어온 가치의 상징은 양극적이었다. 힘, 경제력, 군사력, 영토의 크기 등... 이왕이면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보다 긍정적이고 공생적인 것을 지향한다면 좋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가치 창조의 주역인 우리 스스로가 창조의 방향을 긍정적이고 공생적인 곳에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이 책은 여러분에게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요청하는 초대장에 다름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낙관적이다. 인간은 자신을 극복할 운명을 타고 났으며, 인간이 의식적으로, 또 무의식적으로 유발하는 폐해에 대한 해결책을 항상 찾을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다른 누구도 아닌 각자의 것이며 간달프가 말했듯 '당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지고 무엇을 할지 결정하는 것은 오직 자신의 몫'이고 변화는 각 개인으로부터 시작된다. 여러분의 시간 역시 여러분의 것이며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이를 준수하고 살면 보이지 않는 손이 우리를 다시 한번 사회 전체의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다." (190쪽)
 
 작가가 남긴 위의 맺음말의 의미대로 독자는 자기만의 가치관을 이전보다 뚜렷하게 갖게 될 것이다. 그 가치관은 경제관이 될 수도 있고, 인생관 혹은 사회관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되었든 그것은 조금 이상적이고 비 이성적인 가치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이상적인 것을 꿈꾸는 자만이 그 이상을 현실로 재현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좀 더 긍정적이고 쌍생적인 미래의 가치를 꿈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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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온돌방 - 이화종의 시골집, 열평의 행복
이화종 지음 / 수선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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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벽난로 온돌방을 읽기로 한 것은 나의 아버지께 큰 선물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귀농'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기엔 너무 큰 내 아버지의 전원에 대한 향수는 자식에게도 고스란히 묻어나게 되었다. 전원이라기 보다는 '농촌'에 가까운 향수이지만.

 촌에서 자란 아버지는 스무살무렵 양은 냄비하나와 이불한채를 둘러매고 상경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여인과 만나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넓고 번듯한 집보다는 작고 아늑한 오두막집을 좋아한다며 생전 처음 내 집을 마련한 후 가진 20평짜리 아파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셨던 분이다. 젊어서부터 흙집 오두막을 짓고 살겠다고 소원이셔서 '전원생활(옛날 '새농민' 이라는 제목)'이라는 전원일기에나 나오는 농사꾼을 위한 잡지를 매달 구독하신 것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다. 물론 도시생활에 익숙한 가족들은 모두 처음에는 아빠의 귀농을 반대했었다. 이미 아버지 당신도 도시에서 살아온 날들이 쌓이고 쌓여서 시골로 간다고 해도 더이상 옛날의 당신이 아닐것이므로 귀농은 아무나 하냐며 모두 불만이었다. 주변의 응원이 없으니 차선책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화초 가꾸기였다. 그것도 누가 들어도 모를 요상한 이름의 야생화를 데려다가 멋지다 예쁘다 하시니, 꽃도 피지 않고 피어도 금새 지고마는 야생화를 도시에서 나고자란 자식들이 이해할리 만무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정성이 나에게 미쳤다. 워낙 어려서부터 평소에 아빠와 대화도 많았기에 아빠의 흙집에 대한 소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이해가 관심으로 바뀌고, 드디어는 나도 나이에 맞지 않게 시골을 좋아하게 되었다.

 벽난로 온돌방이라는 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아버지였다. 재산이나 명예욕보다는 그저 책읽기나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이제 나이가 지긋해지고 삶이 안정을 찾아갈 때 당신의 소원을 풀 날을 고대하고 계신다. 그런 아빠에게 이 책은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불치의 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때묻지 않은 것들을 찾아다니던 작가는 흙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그 집은 향수에 젖은 도시인에게도 기운을 뻗쳐서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크고 멋진 펜션같은 집은 아니지만 가족의 사랑과 손자국이 가득할 그 집은 할아버지댁에 걸려있던 메주와도 닮아있다. 지금도 푸세식 화장실이 있고, 부엌에는 온수기 하나 없어 손이 얼어붙고, 아궁이에 짚에 불을 넣어 방도 덥히고 솥뚜껑으로 밥을 짓는 나의 친가는 어린아이에게는 더 없는 놀이터와도 같았다. 한쪽 벽에 매달려 있던 곶감과 꽈리와 함께 메주가 있었다. 나름대로 '서울 깍쟁이'였던 나는 메주를 보고 코부터 움켜쥐었다. 손으로 대충 뭉쳐놓은 흙처럼 생긴 메주는 거친 겉모습과는 달리 따뜻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만지면 거칠거칠하지만 눈으로 보는 아늑한 색과 모양에서 나오는 후덕함에 어렸던 나는 반해버렸다. (물론 냄새가 안 난다는 것이 놀라움이기도 했다^^) 이 책 속의 온돌집도 그 메주같다. 덕지덕지 깔끔치 못하게 발라진 듯 보이는 흙들은 정돈되지 않았으나 푸근한 정감을 준다. 어른이 만든 집인데도 아이가 지점토를 주물럭거려서 빚어놓은 것처럼 앙증스럽기까지 하니 이것이야말로 인스턴트적인 도시가 줄 수 없는 자연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책 속에는 지은이가 직접 짓고 사는 벽난로 온돌방의 집짓기 과정이 간단하지만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집짓기 교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을 보고 집을 지어보이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도시촌놈이 무작정 시골로 내려가서 벌어질 크고 작은 실수는 줄여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막연하게 집이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집을 짓고 살면서 생길 위험이나 터를 잡고 살려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상식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벽난로 온돌방을 짓고 살아본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가이드북과도 같다. 거기에 지은이의 삶의 에피소드들이 더해져서 더욱 푸근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책을 읽고나서 '이거 보고 집 지을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면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집짓기는 책 한권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섬세한 작업이 아닌지. 게다가 집짓는 것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 책만보고 뚝딱뚝딱 집을 짓는다고 기대한다면 잘못이 아닐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을 짓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벽난로 온돌방을 짓는 사람은 그냥 집짓는 일꾼이 아니라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그 집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넓고 시원한 풍경이 보이는 조그마한 집에서 흙냄새 맡으며 소박하게 살고싶다'는 생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과도 같다. 사람은 본래 땅을 밟으며 물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사는 동물이 아닌가. 흙집을 짓는다고 해서 아무나 소박한 삶을 살며 행복해질 수는 없다. 이미 더러워지고 굴곡진 현대인의 삶은 지워지고 씻겨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은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싶다. 바닥이 절절 끓는 방구들에 배를 깔고 누워있는 것도, 장작을 태워가며 고구마나 감자따위를 그을려 먹는 것도 순간의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원이 그리워 긴 여행을 떠났다가 외롭고 심심해서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고도 말했다. 그만큼 우리는 현대인의 편리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상상력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장작을 태워서 고구마를 구워먹으려면 장작을 패야한다. 겨우내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도 노곤한 월동준비가 필요하고, 외따로 떨어진 시골의 흙집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것 투성일 것이다. 슈퍼도 병원도 놀이터도 가깝지 않다. 힘들여서 지은 흙집에 들어가서 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거 완전히 원시인 아니야?'하고 자조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귀농은 싫다. 충분한 준비를 한 후의 귀농이어야 좌절하지 않는다. 향수를 느껴서 돌아간 고향에서 '내가 생각한 귀농은 이런게 아니었어'라고 좌절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귀농은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나만의 땅에서 맨발로 두 팔 걷고 집을 짓고 살겠다는 나의 아버지와 소박한 도시인의 소망에 박수쳐주는 응원가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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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보흐밀 흐라발 지음, 김경옥.송순섭 옮김 / 버티고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간이주점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부분>

 사학과 1학년 교과과목중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강의가 있다고 한다. 갓 입학한 스무살 대학생에게 많은 기대를 가지게 했을 교수의 첫 질문은 뻔했다. 교수는 학생들 한명 한명에게 다가가 '자네는 역사가 뭐라고 생각하나? 자네는? 자네는?'하며 묻고다녔다. 지겹도록 부딪혀온 그 질문에 학생들의 기대는 한풀 꺾였으리라. 그 뻔한 질문에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생각합니다'라는 뻔한 대답이 돌아왔다. 강의 첫 시간 내내 교수는 학생들의 역사에 대한 정의를 캐물었다. 그리고 드디어 강의시간이 끝나갈 때 교수는 말했다. '역사란 말일세. 역사라네.'

 그렇다. 역사란 역사라네. 맥이 풀리는 동시에 명쾌한 답변이 아닐 수 없다. 교수는 덧붙여 말했다.
'역사歷史는 인간이 한 곳에 정착해서(止) 집을 짓고 (厂) 쌀을 재배(나무목木 두개가 있는 수풀림林위에 삐침이 두 개 붙으면 곡물을 재배하는 의미가 됨)하기 시작하면서 계층이 나뉘게 되고, 사람이 일어나는 일을 종이에 기록(史)하는 것이라네.'
자의적인 해석인 것 같으나 현명한 해석이기도 하다. 그 역사를 해석하는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사실의 역사와 기록의 역사이다. 사실의 역사가 과학적 고증을 통한 것이라면 사학자 자신이 고증을 통해 사료를 추려내어 주관적으로 정리는 것이 기록의 역사이다. 그렇게 따지고보면 소설 속에 들어있는 이야기 또한 작가의 눈으로 추려낸 기록의 역사가 될 것이다.

 역사를 기록한 책을 보면서 그 책을 기술한 사학자가 누구이고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온 사람인지 살펴보지 않을 수 없는 것 처럼 나는 매번 책을 읽을 때면 작가의 이력을 꼭 살펴보고 그의 책에 녹아있는 의중을 헤아려보려고 노력한다. 자칫 책의 흐름에만 감정을 내맡기면 작가의 눈에 나의 눈이 겹쳐보여 흐려지고 왜곡되기 때문이다. 내가 작가를 보듯 조금 더 객관적인 눈으로 소설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책 속의 모든 에피소드들을 작가의 생애와 연관시키는 의도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 책은 유럽소설을 흥미있게 읽는 나도 생경하게 느껴지는 '체코'의 작가 보흐밀 흐라발의 작품이다. 유럽의 작가라면 체코 보다는 프랑스의 작가가 오히려 더 친숙하다. 그러나 찾아보고자 한다면 체코는 그리 생소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밀란 쿤데라, 산도르 마라이 그리고 카프카도 체코 작가가 아닌가. 이들 작가들을 한꺼번에 떠올려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체코'문학의 체취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문호들 뒤를 잇는 작가가 바로 보흐밀 흐라발이다. 전쟁 때 독일군에 점령 당했던 체코에서 태어난 이 젊은이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경험으로 작가가 될 법도 했다. 명예로운 작가가 된 그는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 세상에 없다. (로맹가리와 더불어 정말 슬픈일이 아닐 수 없다. 더이상 새로 탄생하는 그의 작품을 기대할 수 없으니까. 왜 유럽의 작가들은 하나같이 비슷비슷한 우울증을 앓고 있다가는 돌연 죽어버리는 것일까.)

 책의 제목인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는 병력이나 탄약을 수송하는 경계가 매우 삼엄한 독일군 열차를 의미한다. 이 책은 정치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의와는 관계 없이 역사에 의해 정신없이 사방으로 흔들리는 개개인의 역사를 비추고 있다. 그들의 컴컴한 역사는 우리의 모습과 닮아있다. 독일에 점령당해 엄중히 감시받았던 체코는 일본 점령하의 조선을 떠올리게 한다. 동병상련이라고, 빼앗기고 매맞아보지 않은 사람은 알수 없는 그 무엇을 우리는 경험했기에 저 멀리 떨어진 나라인 체코인의 소설 안의 모습을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내심 책 속에 들어있을 어두운 역사의 뒷통수를 볼 준비를 단단히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상을 깨고 유쾌하고 박장대소 할 수 밖에 없는 주인공들을 만나게 되었지만. 마치 우리의 전통 문학에서 보여지는 한限과 대비되는 풍자와 위트처럼, 체코인들의 피에도 똑같은 울분이 있고, 그것을 웃음으로 승화시키는 재능이 있는 것 같다.

 그들은 그저 평범한 기차역의 직원들이었다. 우리 역사의 테러리스트들이 그러했듯 그저 평범한 아들이자 아버지, 남편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는 개인을 넘어서는 사명감 비슷한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그냥 단순한 소속감일 수도 있고, 언젠가 내팽개쳐질 민족주의이거나 개인적인 애국심이었을 수도 있다.

 전쟁과 관련되어 있는 소설은 유쾌하지 않다. 가스실, 살육, 폭발, 기아, 이별, 보복 등으로 대변되는 이야기들과 함께 당시의 역사를 직접 경험한 사람들은 그 안에서 웃을줄도 알게 된다. 전쟁 속에서도 사랑은 꽃핀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참 후의 현재를 살고 있는 나 또한 그들의 유전자를 물려받아서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게 된다. 그러나 어두운 역사를 경험하지 않은 민족이 느끼는 책의 감동은 아마도 다르리라. 점령당한 조국에서 살고있음에도 그 현실이 익숙해져서 독일군도, 일본군도 그저 하나의 풍경에 지나지 않을 때, 전쟁이 나는 와중에도 연애도 하고 농담도 하게 되어버릴 때에도 주인공들의 마음 속엔 잊혀지지 않는 무언가가 존재했다. 그래서 보잘것 없이 평범했던 체코인 '밀로시'는 폭탄을 끌어안고 숨어서 열차를 기다렸나보다. 자신의 폐가 총알에 찢기고 터져서 제 피로 흰 눈이 모두 붉게 적셔질 것을 알면서도.

 경험하지 못한 과거의 역사를 현재의 젊은 나는 잊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 동질감으로 이 소설을 읽어나갔다. 우리를 괴롭힌 괴물들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어차피 모두 다 사람이 아닌가 하는 결론을 내리게 하는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매우 값지지 않은가 싶다. '저 독일군도 집으로 돌아가면 사랑받는 평범한 가장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겠지. 그리고 그 가족은 그가 무사히 돌아오길 바라고 있을 것이야. 하지만 그는 이제 돌아갈 수 없어.' 라고 함께 죽어가는 적을 보며 연민을 느끼는 밀로시는 전쟁이라는 것이 얼마나 수많은 어리석은 희생을 부르는 것인지 말해주고 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크지도 않은 욕심 때문에 곱절로 되갚아질 못난 짓을 꾸미는 것일까. 역사는 잊혀지지 않은 채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는것을.
 '집구석에 궁둥이나 붙이고 얌전히 앉아들 있을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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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너와 나를 가깝게 할 수 있다면
장폴 뒤부아 지음, 김민정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살면서 느끼는 자잘한 행복만큼 더없는 기쁨을 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계절이 바뀌듯 바람의 냄새도 함께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름은 여름답게 날씨는 푹푹쪄야 맛이고, 초록이 온 세상을 차지하고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겨울은 나름대로 혹독하게 추워야 겨울답다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전에는 이러한 소소한 삶의 빈자리의 값짐을 느끼지 못했었다. 올해들어 비로소 가장 평범한 생활이 가장 행복한 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떻게 보면 텅빈 듯, 무미건조한 일상이 누군가는 몹시도 갈망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빈 공간의 참 맛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여유롭고 삶을 만끽하며 사는 사람이 아닌가 싶다. 아, 가을이구나. 하고 말이다.
나에게 있어서 소소한 삶의 즐거움이란 나의 '빈 공간'들 중에서 가장 크게 자리잡은 것이 바로 책 읽기와 관련된 것이다. 책 읽는 것, 책 사는 것, 책 선물하는 것을 비롯해서 이번 가을에는 뜻밖이고 오래도록 뜻깊을 추억을 남기게 되었다.

 장 폴 뒤부아의 이름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부랴부랴 도착한 어느 서점에서 그를 보고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줄 맨 끝에 섰을 때. 그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오늘 인터넷 뉴스에서 읽은 이지누님의 글 속에 담긴 산골소녀 영자가 이지누님을 처음 보고 남긴 글을 살짝 훔쳐 써보자면,
“오늘은 특별한 날이다. 신이 보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장 폴 뒤부아다."
미리부터 싸인을 받고 얼굴 한번 보고자 찾아가게 되었지만 싸인회장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저 봐도 그만 안봐도 그만인 존재였다. 그의 책 한 권도 아직 읽지 않는 나로서는 그의 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점이 없지 않은가. 이 날의 외출은 순전히 '한 외국 작가에 대한 호기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마침 그날 이전에 선물처럼 내게로 온 이 책이 그나마 우리의 낯선 만남에 동지가 되어주었달까. 하얀 표지의 책을 가방에서 꺼내어들고 줄을 서 있는데 표지가 우글쭈글해질 정도로 두 손에 땀이났다. 어찌나 흥분이 되던지 위가 뒤집힐 것 같아서 눈물을 찔끔 뽑아내도록 크게 헛구역질까지 했더랬다. (본인 비위가 약해;)
드디어 내 차례가 되었으나 이 몸은 이미 흥분의 도가니탕 속에서 지칠대로 지쳐버린데다가 바로 앞 순서의 아리땁고 파리지앵의 냄새를 질질 흘리는 아가씨가 찰스(!)를 닮은 남친과 유창한 불어로 뒤부아씨와 대담을 나누는 모습에 기가 팍 죽어서 내 순서가 되어서도 그가 내 영문이름 철자를 알아보기 쉽게 내 이름 석자만 수줍게 발음해주었을 뿐, 묵묵히 그의 싸인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아무튼간에 말 할 필요도 없이 몹시 매력이 있는 이 작가양반과의 만남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이거야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소박한 즐거움 아니겠는가.

 그 이후 몇번이고 친필 싸인을 들여다보며 흡족해하는 독서가 시작되었다. 마침 책 속 주인공 '폴 페레뮐터'도 작가라서 매 순간 '폴=장 폴 뒤부아'라는 공식을 지워버리려고 어지간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폴의 표현으로는 '여기도 저기도 씨를 뿌리고 다니다가 몰래 여자아이까지 낳아 숨겨두고 호수에 빠져죽은 아버지와 정체모를 남자와 아마도 바람이 난 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엄마에게서 태어난 구실 못하는 불알을 가진, 애도 없고, 얼마전 이혼당해서 부인도 없는 중년의' 우리 주인공은 이런 화려한(?) 인생 경력을 잘 살릴 수 있을법한 소설가가 되었다. 그러나 작가 특유의 소심함도 가지고 있어서 자기만의 세계에 자신의 과거와 현재의 외로움, 고통을 커다란 구멍을 파고 그 안에 모두 집어 넣어 놓았다.

 그 구멍들이 보일 때 마다 그는 괴로워하지만 그때마다 온몸으로 구멍을 꾹꾹 덮어버리기 일쑤였다. 얼핏보면 평화롭고 조용한 작가의 삶이 이어지고 있었지만 외로움이 극에 달하던 그는 뭔지모를 괴로움이 엄습해오는 순간 아버지를 떠올린다. 그 구덩이가 모두 아버지로부터 생긴 것이라는 생각에 갑작스러운 여행을 결심한다. 아버지가 빠져죽은 호수가 있는 곳으로. 그 곳에서 그는 아버지의 옛 친구로 부터 놀라운 사실을 전해듣는다. 같은 아버지를 가진 자기의 이복누이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혼란스러워진다.

 여행의 목적인 호수로 가는 길에서 폴은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겉으로는 순박한 주민같아 보이지만 비열한 인종주의자, 태초의 유전자로 부터 물려받은 야만성을 드러내는 사냥꾼 부부, 물고기라면 사족을 못쓰는 친구 등등... 작가란 직업을 가진 폴의 눈으로 본 여러 사람들의 생활 방식은 놀랍고도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했다. 그러던 어느날 그는 아버지가 빠져죽은 호수에 갔다가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되돌아 올 수 없다는 '더러운 숲'에 가게 된다. 그 안에서 그가 겪는 온갖 야생적인 경험들은 지난날 현실에 안주하고 수수하기만 했던 작가 폴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그는 자연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고, 그 안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느꼈다. 죽고 사는 것이 눈 앞에 있는 와중에는 더이상 사람과 사람의 원한이나 실망, 증오 따위는 큰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 잔인한 사람들 그리고 자기 스스로를 용서한다. 그리고 마침내 늘 외톨이였던 자신에게 피붙이(이복누이의 존재)가 생겼음을 감사한다.

 아마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폴의 여행에서 많은 부분을 공감하며 읽었을 것이다. 특히 '더러운 숲'을 지나는 여정에서 나는 줄곧 외면당했던 짖이겨지고 있는 내 손바닥을 보게 되었다. 나 또한 가시덤불로 가득한 길을 걷던 때가 있었고, 누구에게나 그런 무자비한 여정이 각자의 인생 안에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방 안에서 익숙함에 안도하며 산다. 용기내어 집 밖으로 나섰을 때 너무도 생경하고 차갑고 매말라서 걷고 싶지 않은 길을 보고 겁부터 내기도 한다. 그러나 일단 걷기 시작하면 언젠가는 길의 끝이 보인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알게된다. 아늑했던 그 옛날의 내 집에서 내가 그저 '쉬어터지고' 있었음을 폴이 느꼈듯이 우리도 깨닫는다. 앓고 난 후 더 강해지는 법이다. 나를 벗어나야만 남과 맞닿을 수 있고 진정으로 자신과도 가까워질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 아닐까.

 가시덤불에 찔리고 뜯기는 손이 아물어가는 일은 가시에 찔리기 전에는 있을 수 없다. 오직 뜯기고 할퀴어진 후에야 비로소 그 상처가 아물게 되는 것이니까. 나도 내 안의 고통스러운 구덩이 하나를 덮어버리고 싶다. 내 두 손이 더러워지고 찔리더라도 참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폴과 뒤부아의 응원으로 용기를 내어보기로 한다. 내 안의 '더러운 숲'으로 여행을 떠나볼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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