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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난로 온돌방 - 이화종의 시골집, 열평의 행복
이화종 지음 / 수선재 / 2006년 9월
평점 :
절판
벽난로 온돌방을 읽기로 한 것은 나의 아버지께 큰 선물이 될 것 같아서였다. '귀농'이라는 단어로 요약하기엔 너무 큰 내 아버지의 전원에 대한 향수는 자식에게도 고스란히 묻어나게 되었다. 전원이라기 보다는 '농촌'에 가까운 향수이지만.
촌에서 자란 아버지는 스무살무렵 양은 냄비하나와 이불한채를 둘러매고 상경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여인과 만나 결혼도 하고 자식을 낳고 기르면서도 부족함이 없었다. 넓고 번듯한 집보다는 작고 아늑한 오두막집을 좋아한다며 생전 처음 내 집을 마련한 후 가진 20평짜리 아파트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셨던 분이다. 젊어서부터 흙집 오두막을 짓고 살겠다고 소원이셔서 '전원생활(옛날 '새농민' 이라는 제목)'이라는 전원일기에나 나오는 농사꾼을 위한 잡지를 매달 구독하신 것도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다. 물론 도시생활에 익숙한 가족들은 모두 처음에는 아빠의 귀농을 반대했었다. 이미 아버지 당신도 도시에서 살아온 날들이 쌓이고 쌓여서 시골로 간다고 해도 더이상 옛날의 당신이 아닐것이므로 귀농은 아무나 하냐며 모두 불만이었다. 주변의 응원이 없으니 차선책으로 마련한 것이 바로 화초 가꾸기였다. 그것도 누가 들어도 모를 요상한 이름의 야생화를 데려다가 멋지다 예쁘다 하시니, 꽃도 피지 않고 피어도 금새 지고마는 야생화를 도시에서 나고자란 자식들이 이해할리 만무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 정성이 나에게 미쳤다. 워낙 어려서부터 평소에 아빠와 대화도 많았기에 아빠의 흙집에 대한 소원을 모르지는 않았다. 그런 이해가 관심으로 바뀌고, 드디어는 나도 나이에 맞지 않게 시골을 좋아하게 되었다.
벽난로 온돌방이라는 책이 나왔다고 했을 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아버지였다. 재산이나 명예욕보다는 그저 책읽기나 산에 오르기를 좋아하시는 아빠는 이제 나이가 지긋해지고 삶이 안정을 찾아갈 때 당신의 소원을 풀 날을 고대하고 계신다. 그런 아빠에게 이 책은 좋은 선물이 될 것 같았다.
불치의 병에 걸린 아들을 위해 때묻지 않은 것들을 찾아다니던 작가는 흙집을 짓기 시작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담긴 그 집은 향수에 젖은 도시인에게도 기운을 뻗쳐서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크고 멋진 펜션같은 집은 아니지만 가족의 사랑과 손자국이 가득할 그 집은 할아버지댁에 걸려있던 메주와도 닮아있다. 지금도 푸세식 화장실이 있고, 부엌에는 온수기 하나 없어 손이 얼어붙고, 아궁이에 짚에 불을 넣어 방도 덥히고 솥뚜껑으로 밥을 짓는 나의 친가는 어린아이에게는 더 없는 놀이터와도 같았다. 한쪽 벽에 매달려 있던 곶감과 꽈리와 함께 메주가 있었다. 나름대로 '서울 깍쟁이'였던 나는 메주를 보고 코부터 움켜쥐었다. 손으로 대충 뭉쳐놓은 흙처럼 생긴 메주는 거친 겉모습과는 달리 따뜻한 색을 가지고 있었다. 만지면 거칠거칠하지만 눈으로 보는 아늑한 색과 모양에서 나오는 후덕함에 어렸던 나는 반해버렸다. (물론 냄새가 안 난다는 것이 놀라움이기도 했다^^) 이 책 속의 온돌집도 그 메주같다. 덕지덕지 깔끔치 못하게 발라진 듯 보이는 흙들은 정돈되지 않았으나 푸근한 정감을 준다. 어른이 만든 집인데도 아이가 지점토를 주물럭거려서 빚어놓은 것처럼 앙증스럽기까지 하니 이것이야말로 인스턴트적인 도시가 줄 수 없는 자연의 선물이 아닌가 싶다.
책 속에는 지은이가 직접 짓고 사는 벽난로 온돌방의 집짓기 과정이 간단하지만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집짓기 교본이 아니기 때문에 이 책을 보고 집을 지어보이겠다는 생각은 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도시촌놈이 무작정 시골로 내려가서 벌어질 크고 작은 실수는 줄여볼 수 있을 것 같다. 나도 막연하게 집이나 짓고 살았으면 좋겠다고는 생각했지만 실제로 집을 짓고 살면서 생길 위험이나 터를 잡고 살려면 알아야 할 기본적인 상식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벽난로 온돌방을 짓고 살아본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들려주는 가이드북과도 같다. 거기에 지은이의 삶의 에피소드들이 더해져서 더욱 푸근하게 느껴진다. 아마 이 책을 읽고나서 '이거 보고 집 지을 수 있겠어?'라고 말한다면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집짓기는 책 한권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섬세한 작업이 아닌지. 게다가 집짓는 것을 해본적이 없는 사람이 책만보고 뚝딱뚝딱 집을 짓는다고 기대한다면 잘못이 아닐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집을 짓는 사람의 마음가짐이다. 벽난로 온돌방을 짓는 사람은 그냥 집짓는 일꾼이 아니라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그 집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넓고 시원한 풍경이 보이는 조그마한 집에서 흙냄새 맡으며 소박하게 살고싶다'는 생각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동물적인 본능과도 같다. 사람은 본래 땅을 밟으며 물 소리, 새소리를 들으며 사는 동물이 아닌가. 흙집을 짓는다고 해서 아무나 소박한 삶을 살며 행복해질 수는 없다. 이미 더러워지고 굴곡진 현대인의 삶은 지워지고 씻겨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정 전원생활을 즐기는 사람은 마음이 평온하고 즐거운 사람이 아니겠는가 싶다. 바닥이 절절 끓는 방구들에 배를 깔고 누워있는 것도, 장작을 태워가며 고구마나 감자따위를 그을려 먹는 것도 순간의 향수에 지나지 않는다. 누군가는 전원이 그리워 긴 여행을 떠났다가 외롭고 심심해서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고도 말했다. 그만큼 우리는 현대인의 편리한 생활에 길들여져 있다. 상상력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장작을 태워서 고구마를 구워먹으려면 장작을 패야한다. 겨우내 얼어죽지 않기 위해서도 노곤한 월동준비가 필요하고, 외따로 떨어진 시골의 흙집은 여러가지로 불편한 것 투성일 것이다. 슈퍼도 병원도 놀이터도 가깝지 않다. 힘들여서 지은 흙집에 들어가서 살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이거 완전히 원시인 아니야?'하고 자조할 수도 있다. 나는 그런 귀농은 싫다. 충분한 준비를 한 후의 귀농이어야 좌절하지 않는다. 향수를 느껴서 돌아간 고향에서 '내가 생각한 귀농은 이런게 아니었어'라고 좌절한다면 너무 안타깝지 않은가. 귀농은 도피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이 책이 나만의 땅에서 맨발로 두 팔 걷고 집을 짓고 살겠다는 나의 아버지와 소박한 도시인의 소망에 박수쳐주는 응원가가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