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브 스토리 1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해용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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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판타지 소설이라면 국내에 한창 붐이 일었을 때 '드래곤 라자'를 본 것이 최대의 독서였지 싶다. 그 후로 해리포터 등의 작품도 영화로만 접했으니 나와 판타지는 그리 가깝지 못했던 것 같다. (영화로 보는 것은 정말 좋아했다) 인간이라는 일종의 동물(?)로 태어나서 가지는 각종 마법 중에서 어른이 될수록 빼앗기는 것 중에 하나가 '상상력'이 아닌가 싶다. 나의 상상력도 점점 깎이고 깎여서 이제는 판타지를 문자로 읽는 것에는 성에 차지 않는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야 느낌이 오는 것이다. 그 점은 상당히 아쉽다. 분명 나도 어린시절에는 작은 단어 하나에 소스라치며 놀라고 기뻐했던 경험을 했기에...

 미야베 미유키

일본소설을 즐겨 읽는다고는 해도 소수 작가를 편독했기 때문에 사실 이전부터 미야베 미유키의 명성은 익히 들었으나 작품을 읽어볼 기회는 없었다. 그래서 이번에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적잖이 기대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건 작가의 팬으로서가 아니라 유명세에 대한 호기심에 가깝다. 그래서인지 소설의 도입부에서 약간 실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브레이브 스토리 1

브레이브 스토리는 초등학교 5학년생인 와타루와 그의 친구들이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또래보다 성숙하다 할 수 있는 와타루는 어느면에서는 판타지적인 것은 그저 게임 속에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면에서는 아직도 그 판타지를 믿고 있는 요즘의 아이들과 닮아있다. 어느날 와타루는 마을의 신사 귀퉁이에 있는 짓다만 건물의 괴담을 듣게 되고 그것을 확인해보려고 들어갔다가 만나는 판타지 세계의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단순히 '판타지 소설'의 요소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한 평범한 아이가 마법의 힘을 타고 나서 마법의 세계로 들어가 갖가지 모험을 하게 된다는 영웅적인 소설들과 비교하면 이 책은 현실을 적절히 반영하고 있다. 초등학생 아이들의 입장에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소재들, 이를테면 맛있는 간식, 친구들, 불량학생, 학교, 여름방학 등등... 그리고 여기에서는 지금의 일본사회(우리사회도 반영하겠지만)도 반영하고 있다. 갑작스런 부모님의 이혼과 거기서 오는 어른들의 갈등, 그밖의 사회 문제들을 아이들과 연결지어서 이런 문제들은 어른들만의 것이 아니라 아이들도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현실에서는 아무리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서 지난 순간을 다른 방향으로 돌이킬 수 있다고 해도 분명 불행한 일은 불행할 것이지만, 아이들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아직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는 그곳으로 비춰지고 있다는 것에 감동했다. 어른이 된 나는 판타지에서만 멀어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던 '좋은 것'들에게서도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 슬펐다.

 충분히 아이답고, 충분히 어른스러운 와타루는 영웅적이라기보다는 지극히 인간스러워서 더욱 정이 간다. 가족의 운명을 바꾸어 줄 기대를 안고 '비전'으로 가는 문에 들어선 와타루의 다음 여행이 궁금해진다.

 미야하라처럼 평판이 좋고, 가 짱처럼 재미있는 친구라면 좋을텐데. 하지만 그런 친구가 있을 리 없다. 손님으로 가득한데다 시끄럽기까지 하지만 놀이기구 타는 데 한 시간이나 두 시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도쿄 디즈니랜드 같은 곳이 있을 리 없다.-97

깨끗한 걸 좋아하는 어머니가 청소를 한 바닥과 벽을, 아주머니가 아무도 부탁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청소를 하면 안 되지 하며 자기 마음대로 더러운 걸레를 가지고 닦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99

없는 것도 있다고 말하면 있는 거야. 있는 것도 없다고 말하면 없는 게 되고. 너는 너의 중심이며, 너는 세계의 중심이니까.-108

노력은 보수를 얻기 위해 하는 게 아니야. 자기 자신을 위해 하는 거지.-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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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 콘서트
데이비드 나이븐 지음, 임성묵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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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웰빙이 신선한 단어이던 시절이 있었다. 웰빙은 이제 많은 사람들의 생활속에 크고 작은 방식으로 익숙하게 자리잡고 있다. 나는 웰빙(참살이)이라는 말이 없던 시절에도 그런 종류의 일에 관심이 많았던터라 소소하게 실천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편리함을 추구하는 동시에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쪽으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늘 하곤했던 것이다. 이를테면 종이 한 장을 쓰더라도 재활용하는 것을 생각하고 물건 하나를 사용해도 낭비하지 않도록 신경썼다. 음식을 먹을때도 되도록 자연적인 것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그렇다고 해서 앓는 사람처럼 꼼꼼히 신경쓰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나는 환경론자도 무엇도 아니지만 되도록 그런 모든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기를 좋아하는 편이다. 낭비하지 않고 적당히 쓰고, 최대한 자연에 가까이 사는 삶이야말로 웰빙이라는 것을 일찍부터 실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는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니다.

 

 건강 콘서트라는 제목의 이 책에는 건강해지자 라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참살이를 실천하는 삶을 살 수 있는가에 가깝다. 건강과 웰빙을 다루는 책답게 활자의 크기도 보기 편하게 되어있고 구성 또한 깔끔하다. 100가지의 건강콘서트 제목만 읽어도 대강 이 책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다. 그 내용 또한 어렵지 않고 충분히 실천 가능한 것이며 우리 생활에서 매우 작은 부분을 변화시키고 강화하면 되는 것들이기에 누구나 읽을만 한 책이다. 다루고 있는 100가지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음료수는 다른 것 말고 물을 마시는 것이 좋다던가 운동을 할 여유가 없다면 계단을 오르라는 것, 스트레스를 조절하라는 것, 비타민을 먹되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것, 카페인, 햇볕, 피로 등의 주제가 그렇다. 그러나 어떠한 일이든 주제만 알고 있을 때와 그것이 왜 그런지 이유를 알고 있을때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의 차이가 크다. 책에 나온 내용 중 놀랐던 것은 ‘감기가 걸렸을 때 코를 풀지 말고 그냥 흐르게 놔두고 불편하다면 그냥 닦아내라.’는 내용이었다. 이유를 읽으니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었다. 세균을 피하지 말라는 것 등은 나의 생각과 일치했다. 환자를 대하는 직업을 가진 나조차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팁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책의 내용은 매우 유익하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을 관리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날이 늘지만 오히려 몸을 움직이는 시간은 줄어드는 것 같다. 따로 하지 않는 운동과 날이갈수록 쌓이는 피로, 스트레스 따위를 풀지 않으면 이것이 병의 원인이 되고 늙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이라 무리가 있었던 일 때문에 지친 나의 몸과 마음, 그리고 이사 때문에 온갖 나쁜 먼지와 화학성분을 들이마셨던터라 책 속의 내용을 응용할 수 있는 것이 많았다. 특히 페인트 냄새를 제거하기 위해 차 티백을 이용하는 것은 한번쯤 해볼만 하다. 그리고 하루에 과일을 꾸준히 먹고 처음엔 의식적으로 걷고 물을 마시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정보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사람의 기억력도 상기시키지 않으면 잊기 쉬우므로 한 두개씩 실천해보기로 한다. 한 번 읽은 후 필요한 부분은 목차를 읽어보거나 아니면 소제목이 끝날 때 마다 요약형태로 되어있는 한 두줄씩의 'in number' 부분을 읽으면 될 것 같다.

 

 한가지 아쉬운 것은 매 소제목당 실려있는 에피소드가 빈약하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하면 좋다는 소제목에 그에 맞는 주장과 이유를 예를 들면서 설명을 해주면 더 신뢰를 하고 실천하게 만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순히 ‘누가 이런 일이 있었다‘는 에피소드만 서술해 놓은 부분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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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평전 - 세계적인 석학 자크 아탈리의
자크 아탈리 지음, 이효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사상이나 철학서를 읽을 때 가장 난감한 것이 독자로서의 무지이다. 그런점에서 아주 어린 나이부터 철학서를 읽고 어떤 감명을 받았다는 위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놀라울 따름이다. 위인들이란 하나같이 누구의 책을 읽고,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연대순으로 읊고 다니지 않는가. 이번 마르크스와의 만남은 나에게 또 한번의 좌절을 가져다 주었다. 더불어서 경외심과 호기심까지 함께.

 1818년, 그리고 2007년을 맞이하는 지금.
그 사이의 무수한 시간들을 어떻게 매꿀 수 있을까. 마르크스가 탄생하기 이전에도 있었을 사회적 변동과 내가 태어나기 이전까지의 역동의 시기들은 서로 연결지어져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재를 살고 있는 나는 아직 그 틈을 알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그리고 궁금해진다. 2006년을 있게한 모든 역사적 사실과 사상들, 그리고 사람들을..
 
 소위 '민주주의' 또는 '자본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는 여타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국가들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여러가지의 것들 중에서 손에 꼽히는 것은 단연 '분단의 역사'이다. 사상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사상이 종교보다, 인간애보다 투철해질 때 사람이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우리는 몸소 경험하고 있다. 대립, 투쟁, 전쟁이후의 분단의 상황을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와 '사회주의'는 비인간적이고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으로 치부되는가 하면, 그것을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쥐구멍에 들어앉아 죽은듯이 살아야하는 사회. 그래서 통일이후에도 사상적 통합이 어려울 것이라고 하는 말이 나오고, 일본이나 미국보다도 반대 체제 또는 북한에 대한 연구가 미흡해서 현재의 대북정책에도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또 한번의 격동의 시대를 예견하고 있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마르크스는 더 이상 죽은 사상이 아니라 재해석되어야 하는 미래지향적 사상일지도 모른다.

 민주주의의 승리.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이미 자본주의가 승리했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유용한 사상은 민주주의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양면적인 것을 담고 있다. 아무리 좋은 약도 분명 하나씩의 부작용을 가지고 있는 것 처럼 말이다. 이제 우리들 눈을 가리고 있던 검은 천을 풀고 세상 밖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상은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겠으나 적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사상이 적이 되었을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 이미 알지 않는가?

 70년대의 금지곡들을 기억하는가. 금지곡과 같았던 사상적 노래인 마르크스에 대해 비교적 사회주의에 관대해졌다는 젊은세대의 한명인 나조차도 어느정도의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나는 아직 기본철학에 대해서도 무지한 상태이기 때문에 어느 쪽이 어떻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걱정되는 것은 자꾸 머리가 굳어가고 어려운 말이 나오면 이해가 힘들어진다는 것 ㅠㅠ)

 마르크스에 대한 평전이 나온 것은 지금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우리에게도 젊음은 곧 혁명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에 비하면 너무도 유약해진 지금의 젊은이들은 어찌보면 사상이나 철학에 대해 무관심해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또한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든것일지도 모른다. 사상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은 접어두고, 먹고 살 궁리나 해야하는 현실이 그렇다.

 마르크스는 매우 단단하다.
1인지 0인지 이야기 하기 위해서는 1이라는 혹은 0이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그냥 0.5를 하면 안될까 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이다. 1이라거나 0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힘든가. 어떤 사람의 주장이라는 것이 그러하다. 그리고 그 주장은 이론이며 사상이다. 하물며 100분 토론에 나오는 사람들끼리도 울그락 붉으락하며 감정컨트롤을 해야 하는 것이 논쟁이라는 것인데 사상가가 되기 위해서는 평생을 그런 논쟁에 대응하는 철학적 가치관이 강하게 정립되어있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마르크스는 매우 단단한 사람일 것이다.

 이 책에는 마르크스에게 깊이 영향을 주었던 그의 아버지 부터 조명하기 시작한다.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그의 아버지가 걸었던 길에 대해서, 그리고 유태인이라는 민족적 운명에 대해서도 이야기 한다. 그가 아버지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또한 그의 혈통이 그의 삶이 미친 영향은 무엇인지도 알 수 있다. 그가 감명받았던 철학가들과 동시대를 살았던 위인들 또한 그러하다. 그러고보면 사람이란 남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맞는 것 같다.

 1800년대를 살았던 마르크스는 얼마나 오래전의 사람인가. 그런데 그가 영향을 받은 여러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훨씬 이전의 사람이었을테니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철학과 사상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할지 겁부터난다. 지금은 비록 마르크스를 전부 이해하기 어렵지만 노력해보기로 했다. 그를 포함한 여러 위인들을 만나보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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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만 알고 나는 몰랐던 자산관리법
김춘호 외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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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리다 난리.
'너만 잘사냐 나도 잘살자'는 부자되기 열풍과 10억만들기 미션수행이 유행이었던 것도 옛날이다. 이제는 좀 더 현실적인 시각에서 돈을 굴리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바로 재테크이다.
벼락부자라는 말도 옛말이고, 이제는 내 능력대로 투자해서 돈을 불릴 수 있는 시대가 왔다.

 그렇다면 어떻게 돈을 불려야할까.
작은 땅 안에서 돈을 모으기란 쉽지 않다. 경쟁사회라는 말로도 부족한 요즘 사회는 그야말로 전쟁터를 방불케한다. 직장도 더이상 안전하지 못하고 젊으나 늙으나 좌불안석이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어딜보나 막혀있는 벽에 좌절하다가 발견한 출구가 부동산이다. 여기저기서 뉴타운이라는 이름으로 개발을 시작하고 그에 맞추어 전국의 국민들은 시선을 떼지 못한다. 부동산업자나 개발지역, 서울근교, 투기꾼만의 이야기인가? 아니다. 지금 대한민국의 눈은 부동산에 꽂혀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이미 알고 있다. 부동산에는 거품이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거품을 감당하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는 것도 알기 때문에 '서민'들은 얼씨구나하고 덤비지 못하고, 박탈감과 상실감만 커질 뿐이다.

 부동산만이 길인가.
이 책에서는 선진국과의 비교를 잠깐 언급하면서 멀리 내다보면 부동산은 곧 가라앉을 배와 같다고 말하고 있다. 금융과 부동산을 비교했을 때 다른 나라의 경우 금융의 비중이 훨씬 높은 반면에 한국의 경우는 부동산에 크게 치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부동산 거품은 여러 선진국에서 이미 겪은 병적인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 책에서 제시하는 것 처럼 금융쪽으로 재테크의 방향을 잡는 것이 장기적으로 바람직한 것일지 모른다.

 '부자만 알고 나는 몰랐던 자산 관리법'
제목만 보고 어떤 점에서는 내용을 미리 짐작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미 '부자되기, 10억 만들기' 등의 책에서 익히 보았던 내용이 아닐까 싶었다. 이 책은 무조건 '부자가 되야한다. 부자가 되라 부자가~'라고 강요하거나 현혹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가 재테크에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노후설계 등의 인생계획을 생각하고 있다면, 내가 선생님이 되어주겠다'는 자세로 쓰여졌다. 숫자개념이나 어려운 용어에 대해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이라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리고 하나부터 열까지 이렇게 저렇게 해보라고 방법을 제시하고 있어서 따라하기 수월할 것 같다. 책 속에 실려있는 '실전 재무설계' 등의 부분에서는 직접 빈칸에 자신의 상황을 적어볼 수 있어서 유익하다.

 특히 내 경우에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짧은 직장경험과 적은 경제관념 때문에 고민이 적지 않았는데 거기에서 오는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을 것 같아서 좋았다.

 요즘 모 방송사에서 진행하는 프로에 보면 연예인의 집에 가서 불필요한 것을 수거하고 그것에 값을 정해보는 것이 있다. 진행의 마지막에는 설계사가 투자자에게 권하는 재테크 방법을 한가지씩 소개하는데, 그 때마다 강조되는 것이 '위험부담이 따른다'이다. '투자'라는 것 자체가 100% 안전을 보장할 수 없기에,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인 것 같기도 하다.  섣불리 뛰어들었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재테크라는 것은 도박이 아니다. 요행을 바라거나 벼락이 떨어지길 바란다면 부자가 될 수 없다. 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 수많은 땀과 좌절을 겪어야 하듯이 노후설계나 재태크도 꾸준히 공부하고, 정보를 찾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며 어느정도의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나와있는 유익한 정보나 큰 틀은 표시를 해 두어서 필요할 때 마다 꺼내어 보기로 했다. 아무리 좋은 교과서라도 한번보고 만다면 소용이 없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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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의 연인
플로리앙 젤러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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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프랑스 소설은 나를 힘들게 한다.

처음 느꼈다. 프랑스 소설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한국소설을 멀리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할만큼 나는 외서를 많이 읽는다. 특히 유럽소설과 일본소설을 즐기는데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두 국적의 소설을 읽는 것은 책 이외의 것에도 변덕을 부리는 내 성격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소설은 가벼움, 현실도피로 대변된다면 유럽소설은 그에 비해 무겁고 음울하고 현실의 아픔을 잘 표현한다. 아름다운 사랑 조차도 유럽 작가의 눈에는 런던의 날씨처럼 음울하게 비치는 것 같다.

내가 한국소설을 등한시 하는 이유는 나의 내면의 우울함 때문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정도는 가지고 있을 우울성은 한국현대소설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처럼 폭발해버린다. 그래서 힘들었다. 난쏘공을 읽고 난 후 오는 감동과 함께 그 우울하고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식민지 이전의 해학과 풍자는 식민지 이후의 우울과 도피로 변화했다. 얼씨구 절씨구 노래하던 우리 고유의 정서는 어디로 간 것인가, 왜 이렇게 어두워지는 것일까.. 그 흑빛 감동을 이겨낼 수 없어서 한국 소설을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예 가벼운 한국 소설을 읽는 것도 싫어서 흔히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책을 쓴 작가들은 나에게 혐오 대상에 속하기도 한다.)

한국 소설 특유의 어두움에 좌절할 때 즈음 축축한 빗소리가 나는 비냄새 가득한 유럽소설을 만났다. 도서관에 가득 있는 유럽소설들을 분류별로 읽어보겠다고 다짐했었다. 덜 우울하고 덜 가벼운 소설들이었다.

유난히 일본소설 강세인 요즘에 함께 주목받고 있는 것이 유럽소설이다. 그 덕분에 나는 그동안 몰랐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몇 안되는 책이지만 그 중 프랑스 소설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몇 권을 읽고 나니 촉촉하다 못해 눅눅해질 정도로 프랑스 소설의 분위기에 젖어버렸다. 무엇이든 과하면 못쓰는 것 같다. 점점 소설의 압박에 짖눌리고, 결국 읽은 후에 남겨지는 독후감도 그리 밝지 못하다.

올해는 프랑스 소설이라면 마무리 짓고 싶다. 2006년 겨울의 시작에서 거의 마지막이 될 프랑스 소설 '누구나의 연인'이다. 제목만이라면 나긋나긋하구나.

이야기 해 볼까, 나의 독후감.

질린다. 힘들다.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두 가지 생각이다.

첫번째로 질린다고 표현한 것은 남녀상열지사를 꼼꼼히 철학적이고 심리분석적으로 짚는 소설은 몇 권 읽어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마치 공부 잘하는 비법이 딱 정해져있듯이 말이다. 달리말하면 우리는 이미 누가 '이런게 바로 사랑이야'라고 말해줘도 이제는 별로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만큼 모든 인간관계의 진리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굳이 주인공의 사랑과 애증, 이별을 풀어쓰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관계를 좀 더 지속시킬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하는게 이별, 이혼으로 가는 급행열차인지 이미 알고 있다.

두번째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절대 서로 만날 수 없는 남녀의 수평선이란 영원하다는 진리 때문이다. 바람둥이의 기질은 주인공 말고도 남자라면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여자도 그 기질은 가지고 있으나 '인내'를 조금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남자의 바람기에 마음 졸이는 여자 또한 일명 '여자의 일생'이라 불릴 정도로 흔한 것 아닌가. 불쑥 튀어나온 이야기도 아니려니와 이야기 속에서 전해져오는 남녀의 수평선을 마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란 노래도 있잖은가. 아무리 서로에게 너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느니, 왜 너는 나와 다르냐느니 해봐야 다른 남자 만나도 똑같고 다른 여자 만나도 지내보면 다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사랑 이후엔 이별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기도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아니면 서로 인내하며 사는 수 밖에.

어느쪽이 현명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연애 혹은 인간관계란 늘 '나를 지키느냐 포기하느냐', '나를 드러내느냐 양보하느냐의 문제' 아닌가. 

나는 여자고 그는 남자이다.

나는 남자고 그녀는 여자이다.

이 간단한 명제로 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과 여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 까지 왜 너는 나와 다르냐며 고통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타고난 운명처럼 남과 여는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두개의 칼과도 같다. 오래 부딪히면 무뎌지기도 하는 칼...

이 책은 연애소설 치고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잘생긴 '프랑스 작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세밀한 심리 묘사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사랑의 양날을 보여주고 그 속의 아픔을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마치 한 편의 심리학 책을 보는 듯한 시간이었다.

 글 다듬기는 생략합니다.

보통 편지를 쓰건 일기를 쓰건 글을 쓸 때는 연습장에 쓴 것을 고치거나 하는 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냥 즉흥적으로 주절거리는 편이라서 글이 길어질 때가 많다. 지리멸렬해질 때도 있고. (그래서 앞으로의 목표는 독후감 짧게 쓰기이다.) 감정이 가라앉는 때에 읽은 책이라서, 게다가 프랑스 소설에 짖눌리고 있는 때라서 독후감도 어렵게 쓰여졌다. 이 독후감만은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며칠을 그냥 두고 있었는데 손대기가 싫고 겁난다.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해야할지도, 어디서부터 다시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독후감도 매우 즉흥적인 글이 되어버렸다. 나의 글의 특징이야. 즉.흥.적.이.다.

+ 작가의 외모에 대한 예찬(혹은 평가?)은 이미 많은 독자가 해주었으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작가의 얼굴과는 다르게 맘 편히 읽기는 쉽지 않은 소설이라고만 말해두겠어요.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보이는 여자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 (55)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힘이나 순수함의 정도에 상관없이 은밀하게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내면의 힘에 굴복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치 몸을 낮출 때 비로소 자신이 서 있고 싶었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환멸이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그런 행위에 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76)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일생의 여인이라고 속으로 되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사실이 그녀를 그의 유일한 여자가 되게 해 주지는 못한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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