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의 연인
플로리앙 젤러 지음, 박명숙 옮김 / 예담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프랑스 소설은 나를 힘들게 한다.

처음 느꼈다. 프랑스 소설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을.

한국소설을 멀리하는 것이 아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할만큼 나는 외서를 많이 읽는다. 특히 유럽소설과 일본소설을 즐기는데 어떻게 보면 상반되는 두 국적의 소설을 읽는 것은 책 이외의 것에도 변덕을 부리는 내 성격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본 소설은 가벼움, 현실도피로 대변된다면 유럽소설은 그에 비해 무겁고 음울하고 현실의 아픔을 잘 표현한다. 아름다운 사랑 조차도 유럽 작가의 눈에는 런던의 날씨처럼 음울하게 비치는 것 같다.

내가 한국소설을 등한시 하는 이유는 나의 내면의 우울함 때문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얼마정도는 가지고 있을 우울성은 한국현대소설을 읽으면 미쳐버릴 것 처럼 폭발해버린다. 그래서 힘들었다. 난쏘공을 읽고 난 후 오는 감동과 함께 그 우울하고 아픈 마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식민지 이전의 해학과 풍자는 식민지 이후의 우울과 도피로 변화했다. 얼씨구 절씨구 노래하던 우리 고유의 정서는 어디로 간 것인가, 왜 이렇게 어두워지는 것일까.. 그 흑빛 감동을 이겨낼 수 없어서 한국 소설을 가까이 할 수 없다. (그렇다고 아예 가벼운 한국 소설을 읽는 것도 싫어서 흔히 베스트셀러로 불리는 책을 쓴 작가들은 나에게 혐오 대상에 속하기도 한다.)

한국 소설 특유의 어두움에 좌절할 때 즈음 축축한 빗소리가 나는 비냄새 가득한 유럽소설을 만났다. 도서관에 가득 있는 유럽소설들을 분류별로 읽어보겠다고 다짐했었다. 덜 우울하고 덜 가벼운 소설들이었다.

유난히 일본소설 강세인 요즘에 함께 주목받고 있는 것이 유럽소설이다. 그 덕분에 나는 그동안 몰랐던 여러 작가들의 작품을 읽을 수 있었다. 몇 안되는 책이지만 그 중 프랑스 소설이 단연 압도적이었다. 몇 권을 읽고 나니 촉촉하다 못해 눅눅해질 정도로 프랑스 소설의 분위기에 젖어버렸다. 무엇이든 과하면 못쓰는 것 같다. 점점 소설의 압박에 짖눌리고, 결국 읽은 후에 남겨지는 독후감도 그리 밝지 못하다.

올해는 프랑스 소설이라면 마무리 짓고 싶다. 2006년 겨울의 시작에서 거의 마지막이 될 프랑스 소설 '누구나의 연인'이다. 제목만이라면 나긋나긋하구나.

이야기 해 볼까, 나의 독후감.

질린다. 힘들다.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두 가지 생각이다.

첫번째로 질린다고 표현한 것은 남녀상열지사를 꼼꼼히 철학적이고 심리분석적으로 짚는 소설은 몇 권 읽어보면 다 거기서 거기였다는 이유 때문이다. 마치 공부 잘하는 비법이 딱 정해져있듯이 말이다. 달리말하면 우리는 이미 누가 '이런게 바로 사랑이야'라고 말해줘도 이제는 별로 신선하게 다가오지 않을만큼 모든 인간관계의 진리를 꿰뚫어보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굳이 주인공의 사랑과 애증, 이별을 풀어쓰지 않아도, 우리는 어떻게 하면 관계를 좀 더 지속시킬 수 있는지 혹은 어떻게 하는게 이별, 이혼으로 가는 급행열차인지 이미 알고 있다.

두번째로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절대 서로 만날 수 없는 남녀의 수평선이란 영원하다는 진리 때문이다. 바람둥이의 기질은 주인공 말고도 남자라면 조금씩은 가지고 있는 것이고 (여자도 그 기질은 가지고 있으나 '인내'를 조금 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남자의 바람기에 마음 졸이는 여자 또한 일명 '여자의 일생'이라 불릴 정도로 흔한 것 아닌가. 불쑥 튀어나온 이야기도 아니려니와 이야기 속에서 전해져오는 남녀의 수평선을 마주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치가 않았다.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란 노래도 있잖은가. 아무리 서로에게 너는 왜 내 마음을 몰라주냐느니, 왜 너는 나와 다르냐느니 해봐야 다른 남자 만나도 똑같고 다른 여자 만나도 지내보면 다 거기서 거기다. 그래서 사랑 이후엔 이별이라는 공식이 성립되기도 하는 거 아닌가 말이다. 아니면 서로 인내하며 사는 수 밖에.

어느쪽이 현명하다고는 말 할 수 없다. 연애 혹은 인간관계란 늘 '나를 지키느냐 포기하느냐', '나를 드러내느냐 양보하느냐의 문제' 아닌가. 

나는 여자고 그는 남자이다.

나는 남자고 그녀는 여자이다.

이 간단한 명제로 부터 우리는 많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과 여는 근본적으로 같지 않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른 것 까지 왜 너는 나와 다르냐며 고통을 주고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마치 타고난 운명처럼 남과 여는 서로 사랑하기도 하지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두개의 칼과도 같다. 오래 부딪히면 무뎌지기도 하는 칼...

이 책은 연애소설 치고는 유쾌하지 않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잘생긴 '프랑스 작가'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세밀한 심리 묘사를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드러내어 사랑의 양날을 보여주고 그 속의 아픔을 수용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마치 한 편의 심리학 책을 보는 듯한 시간이었다.

 글 다듬기는 생략합니다.

보통 편지를 쓰건 일기를 쓰건 글을 쓸 때는 연습장에 쓴 것을 고치거나 하는 작업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냥 즉흥적으로 주절거리는 편이라서 글이 길어질 때가 많다. 지리멸렬해질 때도 있고. (그래서 앞으로의 목표는 독후감 짧게 쓰기이다.) 감정이 가라앉는 때에 읽은 책이라서, 게다가 프랑스 소설에 짖눌리고 있는 때라서 독후감도 어렵게 쓰여졌다. 이 독후감만은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며칠을 그냥 두고 있었는데 손대기가 싫고 겁난다. 어디서부터 다시 생각해야할지도, 어디서부터 다시 써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그래서 이번 독후감도 매우 즉흥적인 글이 되어버렸다. 나의 글의 특징이야. 즉.흥.적.이.다.

+ 작가의 외모에 대한 예찬(혹은 평가?)은 이미 많은 독자가 해주었으니 생략하겠습니다만,

작가의 얼굴과는 다르게 맘 편히 읽기는 쉽지 않은 소설이라고만 말해두겠어요.


 
우리는 사랑받을 자격이 있어 보이는 여자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그 여자를 사랑할 수는 없다. (55)
 
누구든지, 가지고 있는 힘이나 순수함의 정도에 상관없이 은밀하게 자신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내면의 힘에 굴복할 때가 있는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치 몸을 낮출 때 비로소 자신이 서 있고 싶었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에 대한 환멸이 느껴질 때에야 비로소 그런 행위에 제동을 걸게 되는 것이다. (76)
 
그는 그녀가 자신의 일생의 여인이라고 속으로 되뇐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사실이 그녀를 그의 유일한 여자가 되게 해 주지는 못한다.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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