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루브르 박물관 마로니에북스 세계미술관 기행 6
알레산드라 프레골렌트 지음, 임동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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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 도착하자마자 이 미술관 안의 작품들이 담겨 있는 책을 어떻게 읽어야할까 고민했다.
도록을 보듯이 봐야하는지 눈에 띄는 작품 위주로 봐야할까, 아니면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읽듯 꼼꼼히 읽을까. 문득 루브르를 떠올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정리해야지 했던 일기장과 사진들은 아직도 그대로 박스에 담겨있었다. 그게 몇해 전이더라.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나는 친구와 단 둘이 유럽여행을 가게 되었다. 뭐랄까. 계획에 없던 게릴라식 여행이었다. 유럽에 간다는 친구의 말에 나도 갈까, 부터 시작해서 일단 비행기표 부터 사고나니 그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통장에 있던 돈을 탈탈 털어내서 숙소도, 루트도, 비행기편도 모두 우리 스스로 결정했다. 학생 신분이라 비교적 저렴하고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물론 하루에 한끼만 밥다운 밥을 먹고 나머지는 굶거나 집에서 꾸역꾸역 싸간 초코바와 미니 소시지로 연명했다. 하루 종일 걸었고 비를 맞았고 배가 고파서 갈비뼈가 쿡쿡 쑤시고 어지러웠지만 그게 배가 고파서인지, 미술 작품 때문인지 모르겠다며 황홀히 돌아다녔었다. 거지꼴이었지만 우린 즐거웠다. 나는 이런 여행을 일기로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가기 전에 미리 손바닥만한 수첩을 사들고 갔다. 그랬던 것이 현지에서 사서 쓴 수첩까지 해서 총 세 권이 된다. 이 책 덕분에 여행 후 몇년만에 일기를 펼쳤다.

 

1월 28일
오르세, 루브르, 리옹역 부근 
눈내림. 아침에 일어나니 눈 내리고 있음. 귀덮이는 모자 쓰고나감.
1. 리옹역에서 쿠셋예약
2. 루브르 : 기념품 (고흐 그림 엽서세트, 클림트 등의 엽서, 여행 일기장으로 쓸 수첩)

여기는 (내셔널 갤러리에 비해) 그림은 그냥 그렇고 제목이나 사람이름 읽기도 어렵지만 ROOM마다 있는 화가들이 그림을 보고 캔버스에 따라 그리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부분 노인인데 도구들도 신기하다. 그림을 그려서 팔아버리고 생계 유지를 하는지, 취미인지는 모르겠다.

 루브르에는 그 큰 건물에 그 많은 전시물들 중 진짜 세계인들이 모두 알고 있는 그림만 보고 와도 되겠더라. 나머지는 다 그냥 그랬음. 워낙 그림이 많은 나라여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루브르는 그저 그런 박물관 같았던 듯하다. 그때는 다빈치 코드도 없었고 루브르는 그냥 '프랑스에 가면 당연히 거쳐야 할 장소' 중에 한 곳이었다. 미술 구경을 좋아하는 나는 유명한 미술관은 빼놓지 않고 들렀다. 그리고 하루 중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루브르는 영국의 대영박물관 같은 곳이었다. 거창하지만 아기자기한 맛이 없는 곳. 너무 유명한 것들이 모여있지만 이곳은 미술관이라기 보다는 이름 그대로 '박물관'에 가까웠다. 우리나라 국립중앙 박물관에도 그림이 있듯이 말이다. 나는 오르세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미술관에 갈 때는 몇몇 유명 작품에 현혹되어 그건 꼭 보고 와야지 하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직접 눈으로 작품을 구경하게되면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생소한 작품에 반하게 되는 것이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알지 못하는 생소한 화가의 그림에 반해서 전시관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아 몇분이고 그림을 보았다. 의미를 몰라도 눈에 담고 싶은 욕심이랄까.

확실히 루브르를 다녀온 후의 일기는 너무 짧다. 오르세의 일기에는 온통 감동한 그림과 화가의 이름으로 도배가 되어있는데 말이지.


대신 루브르에서는 이것이 있다. 바로 그림 그리는 화가들이다. 물론 다른 미술관에도 있겠지만 나는 루브르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라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조용히 그림을 응시하며 붓을 드는 화가들. 배껴그리는 것이지만 구경하는 것이 참 즐거웠다.

 루브르에 대한 책을 읽기 위해 읽은 읽기장 덕분에 책 읽는 노선이 명확해졌다. 책 표지를 장식한 모나리자.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서 감동이 솟아오르는가.
하지만 직접 본 나의 '모나리자'는 기대했던 것 만큼 감동적이지 않았다. 그때 나는 <어쩌면 나는 어떤 그림을 '해석'해놓은 것에 감동을 받곤 했던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림을 보는 눈과 마음이 아닌 누군가의 해석으로 오염된 그림 말이다. 그래서 이 책만큼은 내가 눈여겨보았거나 잊어버렸지만 책에서 눈에 띄는 작품을 위주로 읽기로 했다. 그리고 살면서 내 마음에 쏙 든 그림이 생기면 그걸 다시 찾아보는 것으로 책의 의미를 새기기로 했다. 애당초 내가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에도 맞아떨어진다. '루브르에서 본 그림을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도록' 이것이 이 책을 읽게 된 이유이니까.

 루브르가 아니어도 좋으니 교실 뒤에 붙인 아이들의 그림만 보아도 얼마나 즐거운지 느껴보시라. 그건 진짜 짜장면과 모형 짜장면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물론 루브르의 그림은 혼자 해석하고 혼자 즐거워할 수 있는 추상화가 아니기에 그림이 그려진 배경과 그림 속의 의미를 알고 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림과의 첫 만남은 벌거벗은 아이처럼 아무 선입견 없이 보고, 그 다음에 해석을 알고 다시 보고, 또 다시보는 사치를 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의미에서 원한다면 얼마든 루브르의 쌩얼을 볼 수 있는 프랑스인들이 부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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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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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새벽과 닮아있다.

 아직 어둑어둑하여 몇미터 앞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여름에는 새벽4시에서 5시만 되어도 밝은편이다. 겨울이 되면 6시가 훨씬 넘어야 해가 뜨고 시야가 밝아진다. 그시간에 집을 나서면 꿈을 꾸는듯한 느낌이 든다.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이 되지 않을만큼 몽롱해지는 새벽. 공기는 눅눅하고 밝은 것도 어두운 것도 아닌 상태. 하루에 한번 다시 태어나는 듯 둘러보아도 고요한 도시의 새벽. 걷다보면 지난밤 취객들이 쏟아낸 토사물과 아직 치우지 않은 쓰레기가 굴러다닌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은 유흥객들은 여태 비틀거리며 허리를 부여잡고 흔들거린다. 첫차를 타고 가만히 둘러보면 다들 큼지막한 가방 하나씩을 들고 있다. 하루를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 아직 고요한 이 시간에 그들은 가장 먼저 하루를 시작한다.

 사흘동안 책을 읽은 후의 감상을 저 한 문장으로 책의 맨 앞장에 적어두었다. 엄마와 장을 보러갔다가 난데없이 누군가에 의해 납치당한 남매는 약 일주일의 시간을 남겨두고 죽음을 기다린다. 사방은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있고 빛이라고는 구석 스탠드의 노란불빛 뿐. 대소변도 화장실로부터 흐르는 구정물에 대고 해결해야하는 상황에 몸집이 작은 남동생은 구정물에 몸을 담그고 작은 하수구멍을 통해 옆방으로 들어간다. 거기에는 여자가 한명씩 들어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영문도 모른채 납치되어온 상태. 하루에 한 사람씩 로테이션으로 살해된다. 비워진 방은 말끔하게 청소한 후 새로운 사람으로 채워진다. 남은 시간은 하루씩 줄어든다. 납치범의 손에 죽기로 예정되어 있는 날 소년과 소녀는 꽤를 부린다. 소년은 몸을 숨겨 누나가 납치범을 속이고 있을 때 탈출한다. 손목부터 잘려나가는 누나의 모습이 소년이 본 누나의 마지막 모습이다.

 ZOO는 공포소설일까. 무엇일까. 처음부터 끝까지 전혀다른 잔혹한 이야기로 사람을 몰입하게 만들면서도 마음 한 구석을 짠하게 만드는 이 소설. 여기에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가장 어두운 잔혹성과 가장 밝은 내면이 모순되게 녹아있다. 해가 뜨는 동시에 어둠도 존재하는 새벽. 서늘하지만 빛 때문에 따스한 신생아같은 모습의 새벽은 그래서 이 책과 닮아있다.

 처음 책을 받았을 때 표지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다 읽은 후 책의 표지가 책과 너무 닮아있어 섬뜩했다. 회색빛 도시의 새벽을 창살을 사이로 바라보는 나. 소설 속 인물들은 모두 허구이며 동시에 우리 안에 갖힌 타인이라는 존재이다. 창살 밖에 있는 나는 몰래 그들을 훔쳐보면서 잔혹해서 눈을 돌리기도 하고 나의 내면에 있는 잔인함까지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비가 오는 날 혼자서 책을 읽고 있으면 다리 한쪽이 서늘해져서 집안의 문은 모두 닫아놓기도 했다. 나는 일본적 공포에 익숙하지 않다. 일본적인 공포는 너무나 잔인하고 이해를 뛰어넘는 장르이다. 그래서 읽는 도중에 구역질이 나기도 하고 일본 작가의 시선이 사람을 향해 있는건지, 횟감으로 잡은 생선을 향해 있는건지 모를 정도로 헷갈린다. 하지만 이 책 ZOO는 일본소설의 잔혹성이 지닌 신선함(?)을 가지고 있지만 구역질 날 정도로 혐오스럽지는 않다. 그래서 시종일관 눈을 떼지 못하고 아픈 눈에 안약을 넣으면서까지 결말을 읽고자 했던 것이다.

 이런 짓은 나라면 절대로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각 줄거리마다 나오는 등장인물들을 이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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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내몸 사용설명서 내몸 시리즈 1
마이클 로이젠.메멧 오즈 지음, 유태우 옮김 / 김영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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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에서 가정/건강/요리 주간베스트 1위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책이다.
내 몸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주겠다는 흥미로운 제목 때문에 읽기로 했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소에 건강 관련 정보를 눈여겨 보는 편이다. 웰빙의 바람을 타는 때문이기도 하고 워낙 이런거에 관심이 많았다.

웰빙을 넘어서 '건강강박증'까지 온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요즘 건강관련 한 것이 유행이다. TV에서는 연일 몸에 좋은 음식, 운동, 여행 등을 소개하고 몸짱 열풍까지 불어서 외적 요소까지 '필수'가 되어버린 시대. 오늘 모 포털 사이트의 베스트글 중에 '최초로 대한민국이 세계 미인대회 1위를 했다'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그 글을 읽는 당신! 어린 아이부터 성형을 하고, 성형을 하기 위해 부도덕하고 불법적인 일이 자행되고 있고, 보통이 아닌 그 이상의 외모를 원하는 외모지상주의에 살고있는 우리 모두가 사실은 제일의 미인이라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어쩌면 가장 올바른 웰빙의 방법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면서 난생처음 '제목에 낚이고도 기분좋음'을 경험했다.

 

 어쨌거나 건강한 것은 좋은 것이다. 그리고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아는 것도 좋은 것이고 중요하다. 일선 병원에서도 일방적인 정보의 보유가 아닌 정보의 공유, 나아가서 정보의 제공과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가장 크게 기여하는 것은 역시 메스컴과 사람들 스스로이다. 어떤 진단에 대해서 왠만한 지식은 꿰뚫고 있는 일반인들. 사람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 물론 여기에는 잘못된 의학 상식이나 비 과학적 상식을 동반하는 경우, 혹은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분분한 이론에 대한 문제를 잘못 알고 있는 경우 등 부작용도 보인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기대한 내용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이 책은 전공서의 축소판이다. 건강 혹은 의학에 대해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독자에게는 큰 영양제가 될 책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첫번째로 백과사전식 지식이 과연 유용한가 의문이 든다. 뇌의 구조와 기능, 호르몬의 종류와 타겟 기관과의 관계, 음식에 들어있는 영양소의 이름 등등. 이런것들이 과연 유용한 정보인가 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오히려 조금 지루했다. 교재 요약도 아니고 정신적 웰빙을 위해 선택한 책에서까지 이런 내용을 봐야하나 싶었다.) 두번째로 '재미있는' 책이 되기 위해 무리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테스트와 건강 상식, 종종 등장하는 유머가 그것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재미있고 실천할만한 것들만 발췌독을 했다. 다 읽고 나니 잘한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몸 사용 신드롬을 일으킨 화제의 책'이라 함은 조금 과장된게 아닌가 싶은데. 건강하려는 노이로제에서 벗어나자. 스트레스는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조절하는 것이 훨씬 쉬운 것 처럼 건강 또한 100% 건강하다는 것은 무리이다. 로봇이 아닌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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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01 2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보고 끌려서 보관함에 넣어놨는데 별로인가보군요. 베스트셀러는 일단 의심하고 봐야.

길고양이 2007-07-02 12:39   좋아요 0 | URL
호르몬, 뇌의 구조, 위장기관의 기능, 위장의 구조, 소화과정 등등을 알기쉽게(?) 서술해놓았어요. 대부분의 내용이 이것이고, 중간중간에 tip 형식으로 건강을 위한 상식이 들어있어요. 권하는 음식은 '비타민' 같은 프로에서 주구장장 말하던것과 비슷하고, 책 안에서도 비슷한 내용이 계속 반복되는듯 합니다. 그래도 베스트셀러인 이유가 있을테니 한번 읽고 확인하심이^^
 
빨간 공책
폴 오스터 지음, 김석희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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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지난해의 어느 전시회장에서 였다.
그날, 흠모하는 열린책들 출판사의 부스는 화려했다. 국제도서전 첫 방문이었고 나는 백수라는 신분도 잊은채 달아올라 있었다. 그래서 그 다음해인 올해는 책에 눈길도 주지 않겠다는 다짐도 했지만 당연히 실패다.

이지적이고 이국적인 외모의 사진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열린책들 부스에서 단연 인기가 높은 그의 책은 한켠에 섬을 쌓고 있었고 두툼한 책을 만지작거리다가 미리 구입하고자 결심했던 도스토예프스끼의 빨간전집만 몇권 집어들고 온 기억이 난다. 서운함을 감출길이 없었는데 마침 부스 귀퉁이에 엽서와 스탬프가 놓여있었다. 개미로 유명한 베르베르를 비롯한 열린책들의 작가를 대표하는 소설과 이미지를 엽서에 찍어서 기념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이었는데 나는 유독 폴 오스터의 이미지 캐릭터가 파여진 도장이 마음에 들어서 말라붙은 잉크를 고집스럽게 도장에 쳐발라가며 몇장이고 찍어서 가지고 왔다. 그렇지. 그의 프로필 사진만 보아도 여성독자라면 마음이 설렐만하지 않은가. (아니면 할수없고.) 좋아하는 배우의 사진을 본 것처럼 그의 얼굴을 묘사한 그림이나 프로필 사진을 보면 마음이 두근거린다.(외모와 문체가 닮은 얼마 안되는 작가랄까.) 그래서 그 후 그의 책을 한 권 구입했다. 그것이 바로 '달의 궁전'이다. 


 지난번 <왜 쓰는가> 서평에서의 표현을 반복하자면,
'달의 궁전'은 그가 쓰고 내가 산 첫번째 책이고
'왜 쓰는가?'는 그가 쓰고 내가 읽은 첫번째 책이다.


 조금만 두꺼운 책에도 놀랄 정도의 새가슴인 나. 그래서 미안하지만 달의 궁전은 조용히 장식용 책이라는 사명을 다하고 있다. '왜 쓰는가'와 마찬가지로 오늘 읽은 '빨간공책'은 소설이 아니다. 그의 일상과 경험에서 비롯된 에피소드와 생각들이 적힌 책이다. '빨간공책'은 폴 오스터의 글쓰기에 영감을 줄만한 이야기들을 모은 책인듯 하다. 그가 아는 친구와 지인에게 얻은 믿기 힘든 우연에 관한 이야기를 비롯한 에피소드들은 그 흔한 액자식 소설처럼 "이건 내 친구가 겪은 일인데" 혹은 "이 이야기는 내가 열두살 때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든 것이다"를 사칭한 사기극을 보는 듯 놀랍기도 하고 감동적이기도 하다. 폴 오스터의 책이라고는 읽었다고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얇은 이 두 권의 책 뿐이지만 나는 이것으로 그를 전부 알았다고 할 정도로 그에게 반했다. 담담한듯 하면서도 마음을 후비고 들어오는 어린아이같고, 냉소적인듯, 관심없는 듯 하면서도 자상한 그의 문체에 반해버린 것이다. 이런 것을 영미 소설의 원형이라고 하는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일본작가들의 문체와 유럽작가들의 문체, 한국 작가들의 문체에 대해서는 조금씩 파악하고 있지만 미국 작가에 대해서는 금붕어도 웃고 갈 정도로 무식하니까.

 

 문체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 해준다. 작가의 심리 상태, 그의 무의식, 그가 살아온 배경은 기본이고 폴 오스터로 치면 그가 지낸 뉴욕이라는 도시를 보는 듯한 착각을 할 정도로 문체는 '장소'와도 연결된 것 같다. 그곳의 공기, 도시의 음침한 정도, 소음들, 음식냄새 등등... 이를테면 하루키하면 그가 쓴 소설의 문장 몇개를 떠올리는 것 보다는 재즈나 고양이, 위스키, 마라톤 등을 연상하는 것이 수월하듯 말이다.

 

헬렌 한프의 <채링 크로스 84번지>에는 이런 내용이 나온다.
 [여행자들은 늘 자기가 무얼 보아야 하는지를 미리 정하고 오기 때문에 진정 여행지를 느끼고 갈 수 없다는 누군가의 말에 헬렌은 그동안 읽은 책 속에 나오는 장면들을 확인하려고 영국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서 되돌아온 대답은 '그럼 거기에 있어요' 였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강 그런 내용 이었다. 그가 말했듯 내가 상상하는 폴 오스터 속의 뉴욕을 보려면 영원히 이곳에서 그의 책 속의 뉴욕만 구경해야할지도 모르겠다.

 

 또 한명의 사랑하는 작가를 맞이하는 기쁨. 나는 애정을 듬뿍 담아 폴 오스터를 '2007년 나의 작가'로 임명한다. 누군가 '폴 오스터를 좋아합니다'라고 말한다면, 그게 여자건 남자건 나는 분명 질투를 할게 뻔하다.

 

 '빨간공책'에서 가장 좋았던 내용은 42~43쪽에 있는 것이었다. 아쉽게도 도서관에 앉아 읽은 책이어서 발췌하지 못했다. 연필과 연습장이 있었음에도, 옮겨 적어오려고 연습장 두장을 뜯어서 옆에 두기까지 했으면서도 적지 않았던 것은 나의 게으름 탓이다. 언제라도 누군가가 이 서평을 읽고 "당신이 좋아하는 그 문단들이 바로 이것이에요"라면서 42~43쪽의 내용을 발췌하여 선물로 주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다는 것을 밝히면서 서평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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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이런곳 와 보셨나요? - 파리에서 파리지엔처럼 즐기기
정기범 지음 / 한길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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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미리 말해 두지만 이 책은 에펠 탑과 루브르 박물관 등 파리의 일반적인 관광 명소를 다룬 여행서가 아니다.
낯선 도시의 뒷골목에서 길을 잃더라도 조급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데서 여행의 묘미를 찾는 사람, 진심으로 파리지엔들의 삶에 다가서고 그들이 사랑하는 공간을 찾아 함께 호흡하길 원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길잡이이다. -007


 

 들어가기에 앞서 독자에게 당부하는 글 중에 유난히 눈에 띈 구절이다. 첫 파리 여행을 하면서 다음에는 꼭 '현지인이 되어보기'를 해야지 마음먹었었다. 숙소에서 3일간 아무데도 안나가고 뒹굴어보기도 하고, 관광지는 내비두고 동네나 한바퀴씩 돌아다니면서 지내보는 것이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랑스어가 남발하는 TV를 보면서도 다 알아듣고 깔깔대고 웃으면서 신기해 했던 프랑스에서의 며칠. 이렇게 외국어를 배우는거구나, 하고 신나했었다. 하루 종일 TV만 보라고 해도 재밌을 것 같았던 그 때. 나는 나에게 그런 약속을 했었다. 다음엔 여행자로 와서 현지인으로 있어보자고. 그런 나에게 이 책은 관광명소를 다룬 보통의 여행서가 아니라며 단호하게 선을 긋는 정기범님의 글은 일종의 전기충격 같은 것이었다. 이 다음에 있을 나의 두번째 파리 방문의 길잡이는 이 책이 될거라고 믿게 되었다. 파리 여행의 유일한 바이블이 될 책. <파리의 이런 곳 와보셨나요?>이다.

 

 여행을 다녀온 후 지도를 가지고 찾아간 곳의 경치보다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이 '뒷골목'이라는 것을 알았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 겨울에 도착지까지 가는 길을 지도를 봐도 모르겠어서 가방에 쑤셔넣고 무작정 걸었다. 그 때 나의 여행의 여정은 대부분 지도가 아닌 두 다리와 여자의 직감이었다(^^;;). 무조건 걸었다. 15분이면 갔을 곳을 골목이 워낙 많다보니 이리저리 빙빙 돌면서 찾아갔다. 당연히 원래 일정대로라면 한시간을 구경했어야 할 목적지는 사진 찍느라 바빴다. 아, 여기가 에펠탑이구나, 하고 사진찍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 이런 식이었으니 에펠탑의 엘리베이터가 어떻게 생겼는지보다 파리 구석구석의 골목이 어떤 분위기인지 더 잘 기억할 수 있다. 그리고 냄새. 파리의 냄새는 절대 잊지 못한다. 노스텔지어랄까.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는 그렇게 아름다운 도시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낡고 더럽지만 그곳을 오고 간 사람들의 정성이 묻어있는 도시가 파리이다. 낡음의 아름다움이란 바로 유럽을 말하는 것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아무튼 걷느라, 빡빡한 일정 소화하느라 정작 숨어있는 장소는 들러보지 못해서 아쉬웠다. 대형 마트나 기념품 파는 곳이 아닌 동네 문방구 같은 곳에 가서 볼펜과 여행일기를 사고 싶었다. 결국 문방구라는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채 기념품 파는 곳에서 살 수 있었지만.

 

 이 책은 사진만 보고 지나가도 충분히 즐겁다. 잘 찍힌 사진 한장은 여러말 할 필요 없이 그저 보고만 있어도 '아하'하고 알수 있는 법이니까. 게다가 글을 다 읽기에는 글 자체가 조금 딱딱하고 무거울 수 있다. 개인이 쓴 여행기가 아니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이 책을 기분좋게 읽은 이유는 구구절절 여행의 처음부터 끝까지 있었던 일을 일기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좋지만 담담하게 파리의 숨은(?) 명소를 소개하는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어떤 여행기보다도 파리에 가고 싶은 충동을 불러 일으킨달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여기는 꼭 가봐야지 하는 곳이 생기기 때문일 것이다. 보통의 가이드 북에는 나와있지 않은 곳 말이다.

 

 이렇게 재미있는 곳들이 어디에 숨어있던 것일까.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법한 '여행 후의 후회 목록' 중 당당히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을 바로 그것. "왜 그때는 몰랐을까" 리스트이다. 지난번 여행 갔을 때 가볼걸 왜 그걸 몰랐지? 이런 것 말이다. 나 또한 매번 알찬 여행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서툴고 98% 부족한 여행을 했기 때문에 책 속의 장소들을 눈을 크게 뜨고 구경했다.

 

 어떻게 보면 가난한 배낭 여행자에게는 너무 화려한 곳이 아닌가 싶은 장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런 장소도 '의미'가 있기에 한번 쯤 책으로나마 구경할 수 있음을 기뻐했다.

  

 '과거는 풍화하여 잊혀지고 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의 세계에 침전하여 사소한 감각적 경험을 계기로 되살아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말처럼 나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파리로 떠나야겠다. 언젠가 마들렌이라도 잔뜩 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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