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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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이걸 정말 17살 때 썼다는 건가!
어제 새벽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를 엎드려 읽는 내내 등 뒤에서 서늘함을 느끼고 몇번이고 발끝을 돌아보고 또 돌아봤다. 이야기를 다 읽은 후에는 새벽의 어둡고 고요함 속의 공포를 견딜수 없어서 이불로 발끝을 덮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안심이 되었다. 잠을 자려고 형광등의 스위치를 누른 후에도 한참을 휴대폰을 만지작 거리면서 작은 불빛이라도 보여야 마음이 놓일 정도였다. 30분 정도 휴대폰으로 '부루마블'을 한 후에야 잠이 들었다^^

 

 에이리언 영화 시리즈가 한창 여름밤을 장악했을 때 마침 집에는 동생과 나 단둘 뿐이었다. 아직 어린 두 아이는 부모님이 자리를 비운 그날 밤 시끌벅적 분위기를 잡아가며 먹고 싶은 간식도 챙겨두고 밤새도록 공포영화를 볼 생각에 들떠있었는데 에이리언 입 속에서 또 다른 아기 괴물이 튀어나올 때 나도 모르게 꺄악 비명을 질렀던 기억이 난다. 어린 동생도 아무렇지 않게 보던 영화인데 말이다. 훨씬 더 어렸을 때는 공포의 '빨간 마스크' 이야기가 유행이었는데 친구들끼리 집에서 무서운 이야기를 하다가 벌벌 떨면서 할머니께 전화를 했고 펑펑 울면서 무섭다는 나를 위해 할머니가 집까지 오신적도 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서운 것을 못 견디는 건 여전하다. (징그럽고 잔인한건 괜찮은데 '왁!'하고 튀어나오는 공포는 정말 무섭다ㅠㅠ)

 

 여름엔 공포물을 읽는 것이 낙일터인데 나는 공포영화도 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책을 미리 읽어본 사람들이 엄청 재미있다고 해서 가을이 시작되려는 어제 겨우 읽은 것이다. 이제는 가만히 있으면 찬바람이 솔솔 부는 계절인데 거기에 얼음을 들이부은 격으로 책을 읽었다.

 

 오츠이치의 소설은 얼마전 출간된 'ZOO'를 통해 알게 되었다. 간결하지만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팍! 치는 듯한 깔끔한 공포. 굳이 상상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책을 읽다보면 어느새 글자들이 영상처럼 머릿속에 그려진다. '신선한 공포'로 기억되는 그의 다음 번역작은 바로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였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렇게 오싹할줄 몰랐다. 대강의 스토리 라인을 알고 있었지만 전혀 색다른 이야기는 아닌듯 했다. 하지만 읽는 내내 재밌고 무서워서 혼났다.

 

 어린 아이들은 순수하다고 생각해야 마땅하지만 가끔 어린 아이이기 때문에 그 애들만이 가질수 있는 잔인함에 놀랄때가 있다. 아이들의 순수함이 대부분 긍정적인 의미의 것들이지만 '순수한 잔인함' 또한 존재한달까. 그런것을 발견할때에는 소름이 끼친다. 그래서 안되는 줄은 알지만 '아이들의 영악함이 때로는 어른의 것보다 잔혹하다'고 생각한다. 그럴때마다 인간이란 어쩔수 없는 잔인한 존재일까 싶기도 하다.

 

 이 책에도 아동의 잔인성이 등장한다. 악마의 자식 처럼 잔혹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난 듯한 소년과 소녀. 보통의 아이와 비슷한 질투심을 가졌을 야요이는 자기가 좋아하는 친오빠를 친구 사쓰키도 좋아한다는 고백을 듣고 사쓰키를 나무 위에서 밀어버린다. 사쓰키는 나무에서 떨어져 관절이 뒤틀린채로 죽는다. 찰나의 질투심에 친구를 죽게 한 야요이는 무서움에 떨지만 오빠인 켄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재미있는 놀이를 하듯 시체를 처리한다. 켄이 본래 못된 아이, 문제아였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그렇기에 전혀 의심할 수 없는 순결한 아이에게서 잔인함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것이다. 죽은 사쓰키는 귀신이 되어 자신의 시체가 치워지는 과정을 담담하게 관찰하고 독자에게 이야기한다. 소설의 안에 순식간에 죽어버린 아이의 비명도, 분노도 없기에 더욱 놀랍다.

 

 뒤에 실린 단편 [유코]도 일본 특유의 공포(링 같은 공포?)를 요소요소 넣어두고 섬뜩한 반전도 함께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츠이치의 ZOO를 읽었을 때 신선하다는 첫인상을 가졌기에 어쩌면 이번 작품은 조금 실망스럽지 않을까 했었다. 더욱이 이 책은 작가가 17살 때 쓴 소설이라고 해서 잘 써봐야 얼마나 썼겠냐고 생각했던게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이 책은 ZOO 만큼 재미있다. ZOO보다 더 재미있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오츠이치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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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어수첩을 공개합니다
오자키 데쓰오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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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어 공부라고 하면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숨을 쉬는 것 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진지 오래이다. 이미 '외래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으로 사용되는 외국어가 많이 있으니 더이상 외국어는 낯설지 않다. 다만 유독 '영어'에 대해서는 안하면 죽을 것처럼 매달리고 있는 현실이 늘 안타깝다. 물론 외국어를 적절하게 쓸 수 있다면 치열한 삶에 있어서 큰 무기가 될것은 분명하지만 지금의 영어왕국은 어쩐지 탐탁하지 않다.

 

 영어를 공부하는 것이 '취미생활'이 아닌 '의무'가 되어버려서일까. 자유 의자와는 관계 없이 의무적으로 영어는 꼭! 할줄 알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영어'하면 회화도 공부(study)로 생각하기 쉽다. 그래서 외국인을 만나게 되면 그냥 손짓 발짓으로 하면 될것도 괜히 겁부터 먹고 시험을 보는 사람처럼 '아다다'가 되는 것이다. 펜팔을 하면서 놀랐던 것 중 하나가 '일본 사람은 영어를 잘한다'는 것이었다. 일본인은 발음하기가 어려워서 영어를 못한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는데 일본 친구와 통화를 할 때 아다다가 되는 것은 한국인인 나였다. 동양인 펜팔 중에서도 일본 아이들은 유독 영어를 잘한다. 특히 문법적인 것과 회화적인 것, 구어체적인 표현도 능숙하게 쓰는 친구들이 많이 있다. 이는 일본과 한국의 영어교육에도 차이가 있을테지만 영어를 대하는 '개인'의 태도에도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일단 해외펜팔이라는 것이 한국보다 일찍부터 시작된것 같고, 일본에 대한 세계적인 인지도가 높아서 일본 아이들은 굉장히 많은 펜팔친구를 가지고 있다. 학창시절에도 학교에서 해외여행을 곧잘 가기 때문에 외국과 영어에 대해 좀더 친숙할 것이다. 어설프게 알고 있기로는 일본인들은 서양인에 대한 동경이 크다고 하는데 이 또한 그들이 영어를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 '우리 나라에도 영어 숙어 책 쯤이야 쉽게 쓸 수 있는 사람이 많은데 영어권에 사는 외국인도 아닌 생뚱맞은 일본인인가' 의아했다. 책을 읽기 시작하니 일본인 특유의 섬세함을 통해 재미있게 숙어를 익힐 수 있도록 수첩 형식으로 편집해 둔 것이 인상적이었다. '수첩'이라는 제목을 들으니 정형화 된 방법이 아닌 자신만의 영어공부 방법을 가지고 연습하는 것이 영어 잘하는 일본인들의 비법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이 책은 이미지 형상화를 이용해서 숙어의 구성요소인 in, out, of, for, under, to, up 등을 그림을 그려서 미리 '느낌으로' 익숙하도록 하고 시작한다. 책의 대부분의 내용을 차지하고 있는 숙어 정리 부분은 일반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숙어집과 비슷하게 꾸며있다. 뒷 부분의 경우는 독특하게도 영어 간판, 표지판, 도로판 등을 그려서 설명했고 상황별 영어나 단어처럼 쓰이는 관용구, 한 단어가 지니는 이미지에서 파생적으로 사용되는 숙어를 설명하고 있어서 쉽고 재미있게 숙어를 익힐 수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책에서 다루는 숙어의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라는 것이다. '시험 영어'에 익숙해진 탓일까? 내가 지금까지 공부해온 단어, 숙어 교재들의 경우는 '수능을 위한', '토익을 위한', '회사원을 위한', '여행자를 위한' 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런 책들은 소제목에 집중하여 단어와 숙어를 소개하고 있기 때문에 읽는이는 안심하고 선생님을 만난 듯 책을 읽을 수 있다. [내 영어수첩을 공개합니다]는 다른 책들에 비해 어떤 특별한 주제가 없이 영숙어를 소개하는 교재라서 이 책을 어떤 사람이 활용하면 좋을지 너무 광범위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영어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다소 뭉뚱그려진 책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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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술, 사고치다
공성수 지음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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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술 시대에 입시를 거쳤지만 논술 시험을 볼 기회는 없었다. 당시에는 친구들이 논술학원에 다니면서 걱정하는 것들에 대해서 해방되었다고 여겨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논술 시험은 비단 입시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자기 PR 시대도 한참 지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사회는 개개인에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라고 부추길 것이다. 입시 때 논술의 산을 잘 지나쳤다고 해도, 졸업 후 당장 '면접'이라는 구술시험이 기다리고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늙어 죽을 때까지 투표를 하거나 크고 작은 의사결정 과정 중에 '논술'은 또다른 얼굴을 하고 우리를 괴롭힐 것이다.

 

 나처럼 책을 읽고 서평을 남기거나, 일기라도 쓰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면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을까'하고 고민 해본적이 있을 것이다. 이미 입시를 한참 지나온 지금도 글로 표현/주장하기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고있어서 이 책은 수험생 뿐만 아니라 나와 같은 일반인이 읽어도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을듯 하다.

 

 [논술, 사고치다]의 저자 공성수는 현재 조인스 닷컴에서 논술 칼럼을 게재 중이며, 학생들에게 강의도 하고 있단다. 논술 입시의 일선에 있는 그가 논술을 준비 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조언을 책 한 권에 담아놓았다. 논술을 준비하면서 어떤 것에 중점을 두어 공부해야 하는지, 논술학원 선택, 주요 대학의 논술채점 기준, 출제된 문제 보기, 어떻게 사고하고 써야하는지, 여러가지 주제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기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앞 부분에는 주로 논술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 현재의 입시제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다른 논술 책과 비슷하지만 뒷 부분에 있는 [꼭꼭 씹기, 생생한 주제를 사고하라]에서 '세계화와 서구화의 차이'와 같이 논술에서 다룰 수 있는 크고 작은 소재를 어린 학생들도 흥미를 가지고 읽고 생각할 수 있도록 풀어놓은 것이 눈에 띈다. 또한 함께 읽으면 좋을 책도 논술 주제별로 추천해주고 있어서 가이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논술 입시생이 아닌지라 입시 가이드에 대한 것은 공감하기 어려운점도 있었다. 부록으로 독서 일기를 쓸수 있는 다이어리가 함께 왔는데 '수험생이 읽으면 좋은 책 목록'과 비슷하지만 어떤 책을 읽으면 좋을지 고민하고, 책 읽을 시간을 계획적으로 쓰고 싶은 사람들에게 유용하게 쓰일 것 같다. (부록은 본인의 아버지께서 이미 찜하셨다.)


 사실 논술을 준비해본적이 없기 때문에 관련 책을 읽는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학교다닐 때만 해도 논술은 선택적인 것이었기에 절반정도의 수험생이 학원에서 수업을 받았고 대부분은 혼자 논술 준비를 하는 정도였다. 학교에서는 자체적으로 신문 사설을 이용하여 매일 스크랩 후 자신의 주장을 글로 표현하는 연습을 시켰다. '5줄 이상' 이라는 기준만 있을 뿐 '매일 한다'는데 의의가 있던 연습이었으나 한자 연습까지 매일 할 수 있어서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던것 같다. 학원수업이나 독학도 좋지만 각 학교에서 적절한 수업을 개발해서 학생에게 제공하는 것이 중요할것 같다.

 

 글을 쓴다는 것은 비단 논술이 아니더라도 상당히 어려운 것임을 알고 있다. 단어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순한글과 한자 중에 적절한 것을 선택하고, 뉘앙스도 파악하여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의 분위기를 만드는 것도 중요할것 같다. 특히 요즘은 어릴적부터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 문화로 자리잡고 있어서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기에 단순히 평균적으로 글을 잘 써서는 '튀는 글'을 쓸 수 없다.

 

 또한 누가 어떻게 글을 쓰느냐도 중요하지만 '누가 어떻게 글을 읽는가'도 중요하다. 현재 논술에 대한 채점 기준이 대학별, 채점자별로 모호하기 때문에 어떤 글을 쓰는 것이 좋은지 또한 모호하다. 그래서 논술이 입시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수능에 비해 작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학생들에게 글을 잘 써야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 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쓴 글을 어떻게 읽고 판단하고 있는지도 항시 점검해야 할것이다.

 

 수험생이 아닌 일반인으로서 이 책의 '논술'의 의미를 '글쓰기'로 확대하여 읽어보았다. 글쓰기라는 것이 그리 만만한게 아니고 '내공'이 필요한 것이기에 당장 길게는 3년 이상, 짧게는 몇달 안에 논술을 끝장내야 하는 수험생들에게는 다소 광범위하고, 급하게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해결책이 되지는 못할 것 같다. 다만 시간을 넉넉하게 두고 논술을 준비하거나, 대략적으로 논술이 무엇이고 어떻게 시작해야하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둘 만한 책이다. 학원 수업이나 책 속에 있는 가이드도 중요하지만 스스로 철학적 사유를 하는 연습을 하고, 다양한 방면에 관심을 보이는 것이 가장 기본이 아닐까 싶다. 아무리 좋은 약도 먹는 사람에 따라 달고 쓴 법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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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에스프레소 꼬레아노 - 이탈리아 여자 마리안나와 보스턴에서 만나 나폴리에서 결혼한 어느 한국인 생물학자의 달콤쌉쌀한 이탈리아 문화 원샷하기
천종태 지음 / 샘터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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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edi napoli e poi muori

나폴리를 보고나서 죽어라!

베디 나폴리 에 포이 무오리



20년간 이탈리아에서 살면서 이탈리아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룬 천종태 님.

몇 해 전 영국에서 시작해서 프랑스를 거쳐 이탈리아 로마를 마지막으로 한 짧은 여행. 이탈리아를 꼭 여정에 넣어야 했던 것은 소설 ‘냉정과 열정사이’를 느껴보고자 함이 컸다. 하지만 그 책을 읽은 것도 한참 전이었으니 여행을 하면서 대체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를정도로 감흥이 없었던게 사실이다. 여행 루트를 짜면서 영국, 프랑스는 수도인 런던과 파리 외에 한곳씩의 외곽을 정해서 다녀온 것이 전부였지만 이탈리아는 각 도시별로 워낙 유명해서 손에 꼽은 도시 중에 3곳을 고르는 것이 힘들었다. 최종적으로 베네치아를 과감히 포기하고 밀라노와 피렌체, 로마를 가기로 했다. 물론 이 루트는 ‘냉정과 열정사이’의 두오모의 탓이 컸다.



여행을 마치고 집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참 생각에 잠겼다. ‘왜 여행을 갔던 것일까. 기대했던 만큼 감동으로 부르르 떨리지 않았고, 마치 옛날부터 그곳에 살았던 사람인냥 그저 편안하기만 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지금도 왜 아쉽지 않은것일까. 마치 다시 내 집인 유럽으로 돌아갈것이라는 듯 아쉽지 않은 이유가 뭐지?’ 여행을 가기 위해 쏟아부은 시간과 돈이 아깝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날씨가 쌀쌀해지면 유럽 생각에 밤잠을 설친다. 비수기였던 겨울에 방문한 이탈리아였기에 찬바람이 불거나 흐린 날이면 어김없이 그곳이 떠오른다. 그곳의 하늘, 그곳의 냄새, 그곳의 햇살. 이탈리아는 건물이 낮은 편이라서 어디서나 하늘이 보인다. 피렌체의 붉은 지붕과 어울리는 태양이 비치는 곳. 이탈리아는 그런 곳이다.



로마 여행 때는 한국인 가이드와 함께 여행을 했다. 자유배낭여행이지만 가이드 신청을 하면 현지에서 소규모로 가이드업을 하는 사람이 나와서 바티칸과 로마를 가이드해준다. 깃발을 들고 다니는 패키지 여행의 가이드와는 다르기 때문에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아저씨는 이탈리아에 온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가끔 아이가 이탈리아 사람처럼 엄청 오버하는 제스쳐를 써가며 이야기 할 때 ‘아, 내가 정말 이탈리아에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구나. 내 아이는 이탈리아에 살고 있구나.’하고 느낀다고 했다. 당시 나는 유학이나 이민에 대한 동경이 있었는데 아저씨에게 고달픈 이민 생활을 듣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었다. 민박촌 주변에는 주로 이민자들이 많이 사는 거주지가 많았는데 그곳에서도 이방인으로서 터를 일구고 사는 것은 어렵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고 느꼈다. 20년간 이탈리아에서 살고 이탈리아인 아내를 만나 가정을 이룬 천종태 님의 책을 읽으니 문득 그 가이드 아저씨가 생각났다.



나폴리는 이탈리아를 그리워하는 나에게도 생소하게 들린다. 나폴리는 어떤 곳일까 궁금했다. 책을 읽다가 근래에 읽은 여행기와는 무언가 다름을 느꼈다. 가볍고, 일기같이 쓴 여행기와는 달리 이 책에는 저자의 삶이 묻어있다. 말 그대로 ‘문화기’라고 해야할 것 같다. 외국인과 결혼해서 사는 것도 문화차이 때문에 어려움이 있을법한데 고국을 떠나 홀로 터를 일구고 살았을 저자의 삶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책 속에는 저자의 외로움과, 그리움, 아내와 가족에 대한 사랑, 한국과 이탈리아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겨있다. 단기 여행자가 아닌 ‘이탈리아인’으로서 사는 저자의 모습을 담은 책이어서 또 한번 여행 중 만난 한국인들을 떠올렸다. 나는 여행자로서 잠시 다녀간 곳이기에 내가 보고 싶었던 것만 보고 돌아왔는지도 모른다. 온전히 토박이만이 느낄 수 있는 것을 나도 공감하고 싶은 욕심을 가지기도 했다. 그래서 여행 후에 돌아오는 걸음이 허전했는지도 모른다.



메리 미, 나폴리. 그는 나폴리와 사랑에 빠졌다. 마여사와 사랑에 빠졌고 사랑하는 나폴리에서 살고 있다.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고 한다. 그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사랑이 녹여버렸으니 맞는 말같다. 그에게서 이탈리아의 진한 에스프레소 향이 나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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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가의 석양 - Always
야마모토 코우시 지음, 한성례 옮김 / 대산출판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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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랏빛, 그리고 자줏빛의 표지를 들여다볼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렸다. 제목 속의 '석양' 두글자만으로도 설레이는 책이었다. 다양한 소재를 보여주는 소설, 그중에서도 지극히 미래지향적(?)이라 생각했던 일본소설 중 요근래 '향수(노스텔지어)'를 소재로 한 소설이 속속 번역되어 나온다. 릴리 프랭키의 [도쿄타워], 쇼지 유키야의 [도쿄 밴드 왜건]을 이은 [Always 3번가의 석양]은 50년대 일본의 따뜻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근 숨이 차도록 바쁘고 마음도 불안정해서 책을 읽기가 힘들었다. 혼이 빠진 사람처럼 있다가 일요일이라 책을 한 권 읽기로 하고 새벽 길을 나설 때 차 안에서 읽으마하고 가방에 한 권을 넣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집에 오는 길은 정오를 갓 넘긴 시각이라 아직 햇살이 뜨겁고 밝았지만 오랜만의 드라이브라서 그런지 멀리 보이는 하늘에 석양이 드리워진 것같다고 멋대로 상상했다. 그러다가 피곤한 나머지 뒷좌석에서 잠이들었고 차 안에서 읽으려고 가져간 책은 그냥 가져오고 말았다. 이른 저녁을 먹고 부랴부랴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는데 책을 덮었을 때는 이미 석양이 진 후였다. 며칠동안 계속 흐린날씨가 계속되었고 고속도로에서 부터 상상하며 기다렸던 석양을 보지못해서 아쉬웠지만 책 속에서 아스레한 석양을 12번이나 감상했으니 미련이 없다.



 이 책은 1958년 전후 일본에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4월부터 다음해 3월까지 한달에 한가지씩의 따뜻한 이웃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떤이는 부자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산을 기워서 쓰고 한겨울 난로없이 지낼정도로 가난했던 시절. 하지만 그들 모두는 '이웃'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다독여가며 살고 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어린시절이 떠올랐다. 개발되지 않은 주택가에는 아이들이 많이 있었다. 오래된 주택에는 주인과 세를 든 사람들이 섞여 살았고, 겨우 빌라 한 두채가 새로 지어지거나 작은 주택이 새로 지어질 뿐인 동네였다. 작은 동네에서는 이웃끼리 말그대로 숫가락 숫자까지 알 정도로 친했다. 이웃사촌이라는 말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 낮동안 조용했던 동네는 석양이 질 무렵부터 골목마다 아이들이 깔깔거리는 소리가 울렸다. 다다다다- 하며 작은 발을 타닥거리며 달리는 아이들 소리가 골목에 울렸다. 놀이터가 없었기에 공사장이 놀이터였고 내 무릎엔 언제나 시뻘건 피가 흘렀지만 흙이 잔뜩 묻은 상처 따위는 아랑곳 없이 이 골목에서 저 골목으로 정력있게(?) 뛰어놀았다. 해가지고 잠잘시간이 되면 주인집 아주머니가 나와 동생을 돌봐주셨다. 부모님이 장사를 마치고 돌아올때 까지였지만 우리는 참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와 엄마가 있는 가게로 손을 꼭 잡고 달렸다. 아주머니의 부름을 뒤로하고 달리는 동안 어두운 골목길이 무서웠지만 '꺄악~꺄악~' 일부러 소리를 지르면서 발소리를 크게 하고 둘이 달리면 무서움이 줄었다. 숨이 차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면 막 정리를 끝낸 엄마가 반겨주곤 했다. 퇴근하는 아빠를 기다리던 골목에서는 석양이 지면 꼭 아빠가 멀리서부터 보였다. 타고온 씽씽카는 내버리고 아빠에게 달려가면 목마를 태우고 집까지 함께 돌아갔다. 당시 아이들은 고작 피아노학원 다니는 정도였기에 학교가 끝나면 학교 앞에서 불량 쫀드기를 연탄불에 구워먹으며, 흙먼지가 뒹구는 바닥에 기어다니는 지네를 발로 꾹꾹 눌러보곤 했고, 오줌싸개였던 나는 집에 오다가 뉘집 담장 아래에서 노상방뇨를 하곤 했다. 아파트로 이사오고 난 후 골목도 없고, 페인트 냄새나는 놀이터 뿐이어서 재미가 없었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예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 가자고 해서 다시 찾아가보니 고향에 간 기분이었다. 난생 처음 먹어본다는 친구에게 불량식품 전도(?)도 했다. 노상방뇨를 했던 담장 위에는 여전히 개나리가 피어 있었다. 그로부터 십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그곳은 여전히 그대로 있다. 요즘 개발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해서 그 전에 다시 찾아가 추억의 장소를 사진으로나마 남겨두기로 했는데 좀처럼 다시 가기가 어렵다. 그동안 얼마나 변했는지, 어릴적 있었던 미용실과 쌀집, 약국이 아직도 있는지, 씽씽카를 멋지게 몰고 내려오던 언덕은 아직 그대로인지 보고싶다.



 이 책에는 내 어린시절의 추억들이 하나씩 담겨있었다. 지금의 아이들에게는 낯설 옛날이야기가 내게는 추억이 되어 아련하게 느껴지니 나도 나이를 먹었나보다. 고리타분하다고 잊혀지던 추억의 이야기들이 속속 다시 선보이는 것을 보니 나처럼 어린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나보다. 누구나 사람과 사람이 내는 따뜻한 냄새와 힘을 경험한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정'이라고 이야기 한다. 날이 갈수록 삭막해진다는 요즘 소설에서나마 남은 정을 느낄수 있어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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