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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의 탑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한동안 ‘한국 문학의 위기’라는 기사도 많이 뜨고, 그 동안은 일본소설이 와르륵 쏟아져나왔다. 책을 많이 읽지 않는다는 젊은층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일본의 문학이다. 젊은이의 감각을 자극하는 노곤하고 말랑한 일본소설. 나도 한때 그런 매력에 빠져 일본소설을 즐겨 읽었지만 그런 감성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매일매일 달달한 케이크를 먹고 살수는 없는 것처럼 내 감성의 주식은 역시 밥이라는 것 말이다.
지난 9월에 읽은 모리미 도미히코의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기억하고 있다. 달달한 일본소설을 읽는 것이 지겨워지던 때이다. 비슷한 내용과 같은 느낌의 반복. 가장 큰 문제는 묵직한 주제의 부재였다. 뚜렷한 주제 없이 감각과 상상력만으로는 내 목마름을 채우기 부족했다. 이렇게 일본소설 자체를 의심하게 된 상태에서 손에 쥔 책이 예상 밖으로 재미있었다. 일본작가가 가진 강점인 상상력을 중심으로 가볍지만 뼈대있게 건들여지는 유머덕분이었다. 그 책을 다 읽고 나서 ‘모리미 도미히코’라는 이름을 기억해두었다.
한국문학의 위기, 그 후에 한국의 젊은 작가들이 중심이 되어서 소설의 무게중심이 조금 가벼운 쪽으로 넘어가면서 젊은층에서도 한국소설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며칠 전 한 해를 정산하는 ‘TV 책을 말하다‘에서 한 패널도 비슷한 말을 했는데 소위 칙릿이라는 장르도 그렇고 판타지도 그렇고 ‘아류’ 그 이상을 뛰어넘는 것이 과제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무슨 책이든 읽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것은 반가운 소식이지만 인기 소설들 중 일부는 ‘함량미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형편 없어 보이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 소설은 그동안 순수문학 밖에 있는 ‘장르소설’ 등을 등한시하거나 지원을 많이 해주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독자층도 다양해지고 있고 순수문학 이외의 것을 탐닉하는 사람들도 많다. 비록 이제 시작이지만 토대를 잘 닦아서 좀 더 섬세하고 다양한 아이디어로 깜짝 놀랄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가와 문학이 탄생했으면 한다.
생각나는대로 적다보니 이야기가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 이야기를 벗어나버렸다. 이 작가의 책은 호불호가 비교적 명확히 갈리는 편인듯하다. 오타쿠 같은 남자 주인공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 시시콜콜 설명하고, 주면 인물의 우스꽝스럽고 귀엽기도 한 모습을 묘사하고, 주인공 혼자서 말도 안되는 공상에 빠지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 망상은 어느 햏자(DC 폐인이라든지...)의 말투와도 닮았고, 여느 청년의 모습과도 닮았다. 끝없는 혼잣말 같으면서도 슬며시 입을 가리고 큭큭 웃게 되는 이야기가 꽉 차있다. <태양의 탑>은 모리미의 데뷔작이라고 하는데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와 일부 엮이는 내용이 있다.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거의 비슷하고, 남자 주인공이 졸졸 따라다니며 ‘연구’하는 여자주인공도 같은 여자가 아닌가 싶다. ‘태양의 탑’은 처녀작이라서 그런지 ‘밤은 짧아...’보다 묘령의 여인으로 등장하지만. 대학 동아리에서 사귄 첫 여자친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네키네코’를 사주었다가 ‘쓸데없는 것으로 방이 지저분해지는 것이 싫다’는 말을 듣고 버림 받은 남자. 엑스포에 데이트를 하러 갔다가 본 ‘태양의 탑’에 반해서 매일 밤 전차를 타고 탑을 보러 다니는 여자. 마네키네코로는 갑자기 차인 것을 인정할 수 없기에 주인공은 전여친의 뒤를 밟으며 일거수일투족을 연구한다. 이 책은 그 수상한 연구 도중에 일어나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이다. 중심내용은 마네키네코를 선물하고 돌연 차인 남자가 실연당한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여자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차차 정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런 내용은 맨 뒤에 가야 정리가 되고 90퍼센트 이상은 주인공의 상상력과 엉뚱함에 의해 진행된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 읽는 사람도 배경과 인물, 사건을 상상하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결말 부근에서 헤어진 여자친구에 대해 회상하는 한 페이지 분량의 내용을 읽을 때는 왠지 뭉클했다.
‘태양의 탑’으로 검색해보니 재미있게 생긴 탑의 사진이 나온다. 책 표지에 그려진 탑의 모습과 꼭 닮았지만 실제 사진으로 보니까 또 다른 느낌이다.
느끼한 감성은 쏙 빼고 담백하고 즐거운 상상이 가득 담긴 책이었다.
엑스포 홈페이지 http://park.expo70.or.j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