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말해줘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은행나무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

 

 유령은 아니었을까. 외원에서의 우연한 첫 만남을 지켜보면서 이 여자, 유령은 아닐까 했다. 늦은 시간, 책을 읽느라 혼이 쏙 빠졌던 하야카와는 공원지기의 문 닫을 시간임을 알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공원지기의 목소리가 향하는 곳은 찬 바위 위에 걸터앉은 여자 쪽이었는데 여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있다. 하야카와가 자전거를 끌고 다가가서 다시 한 번 공원지기의 말을 반복해보지만 여자는 햐야카와의 입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 조용하다. 자전거가 요란하게 쓰러질 때에도 여자는 놀라지 않는다. 무척이나 조용한 여자여서 ‘알고 보니 유령이었다.’로 끝나는 전설의 고향이 떠올랐다. 첫 데이트 때 두 사람은 식사를 하면서 종이 냅킨에 짧은 글을 주고받는다. 헤어질 때 다음 만남을 기약하면서도 글로 약속시간을 정했다. 그제야 나는 여자가 듣지 못하는 게 아닌가 의심하고 다시 맨 앞 페이지의 두 사람이 만나는 장면부터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디에도 뚜렷하게 여자가 듣지 못한다는 것을 알리는 곳은 없다. 두 사람의 만남이 그랬듯이 여자가 그렇다는 것도 마치 하야카와 혼자 알고 넘어가듯 조용했다. ‘교코’라고 적어준 이름 하나로 고요한 사랑에 빠진 하야카와. 서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 조금 어색할 뿐 큰 불편함 없이 잘 지낼 수 있다. 듣지 못해서 위험에 빠질 때나 곤란함을 겪을 때에도 교코와 오래 무리 없이 사귈 수 있을지 걱정하지 않았다. 매우 조용하지만 샛길로 가지 않는 정직한 사랑이랄지, 그런 느낌이 강했다. 기다리지만 기다려주기를 바라지 않고, 그 자리에 없어도 다시 만날 거라고 믿는 모습이 인상 깊었다. 바쁘더라도 며칠이나 연락이 없었다면 나는 하야카와가 만났던 여자들처럼 화를 냈을 것이다. 교코는 소리를 지를 수 없지만 화를 낼 수는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교코가 갑자기 사라졌을 때에도 하야카와는 화를 내지 않았다. 처음 두 사람이 만났을 때 무심코 큰소리를 내거나 목소리를 내어 이야기를 하던 하야카와는 어느새 말이 없고 듣지 못하는 교코와 가까워져 있었다. 종이에 적어서 마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꼭 필요한 말을 적당한 표현을 써서 해야 했다. 그래서 처음에 하야카와는 주절주절 말로 설명하면 쉬울 것을 글로 짧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매곤 했다. 그리고 사라졌던 교코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여러 말을 문자로 썼다가 모두 지우고는 ‘보고 싶어’라고만 적었다. 문득 살면서 얼마만큼 해놓고 후회할 말을 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하고 들어놓고도 속 시원하지 않았었는지를 떠올렸다. 전하고 싶은 말을 콕 집어서 말해도 그 안에 담긴 말이면 충분한 그런 말을 두 사람은 서로에게 들려주고 있었다. 여기에는 ‘사랑해’라는 공식 같은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지극히 일상적인 말이 간단히 오고갈 뿐이다. 그런데도 책을 읽다보면 뭉클한 마음에 목에 무언가 잠기는 기분이다.


 

 커다란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만큼이나 일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지극히 소소하고 조용한 일상을 정말 리얼하고 정갈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해내는 일본작가들이 눈에 띈다. 이번 소설을 읽고 나서도 너무 단출해서 쉽게 질려하곤 했지만 쉬어가는 마음을 원한다면 언제나 낮잠 같은 휴식을 주는 일본소설의 매력을 느끼면서 조금 질투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