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에 비가 잠깐 왔나 보다. 5시에 자전거를 타니 길이 젖어 있었다. 거의 이주일만에 내린 비라, 좀더 오기를 바랬다. 흙만 조금 적시고 간 비. 텃밭에서 고추 모종에 끈을 더 묶었다. 지지대에 끈을 묶을 때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묶는 방식을 달리 해본다. 아직 제대로 끈조차 못 묶는 초보자란 생각에 웃는다. 고추 크기도 제각각, 열무 크기도 제각각 크기도 다르고 간격도 다르다.
어렸을 때는 슈퍼맨처럼, 원더우먼처럼 살기를 원했다. 어수룩한 사람도 변신하기만 하면, 놀라만한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을 가진 존재가 되기를... 그것이 내 꿈이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 남동생과 빨간 보자기를 묶어 망토 대신 휘날리며 경사진 언덕을 뛰어 내려 보기도 했었다. 잘하거나, 아예 못하거나. 그래서 무엇인가를 보여줄 때는 최대한 준비된 모습을 보여주기를 원했었나 보다.
하루하루를 살다보니 매년 내가 예상했던 것과 다른 곳에서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실패하는 법을 배우고 산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임을 깨닫는데는 오래걸렸다.
옥수수 잎에 달린 빗방울을 보니 어렸을 때 읽었던 도종환님의 시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모든 것이 불확실했었다. 20년도 더 된 그 때, '접시꽃 당신'이란 시가 나와 베스트셀레가 되고 동명의 영화도 있었던, 그 어느 여름날 시골 민박집에서 노란 옥수수를 먹으면서 이 시를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지금도 비가 내린 옥수수잎을 보면 이 시를 떠올리는 것보니 시 한 줄의 기억은 얼마나 강한가.
그런 시 중에 이성복의 '남해 금산'이 있다. 남해 금산에 가면 그 시가 생각나서 보리암의 둥근 돌들을 한 번 더 바라보게 된다. 시 한 줄의 힘은 얼마나 큰가.
접시꽃 당신 /도종환
옥수수잎에 빗방울이 나립니다
오늘도 또 하루를 살았습니다
낙엽이 지고 찬 바람이 부는 때까지
우리에게 남아있는 날들은
참으로 짧습니다
아침이면 머리맡에 흔적없이 빠진 머리칼이 쌓이듯
생명은 당신의 몸을 우수수 빠져나갑니다
씨앗들도 열매로 크기엔
아직 많은 날을 기다려야 하고
당신과 내가 갈아엎어야 할
저 많은 묵정밭은 그대로 남았는데
논두렁을 덮는 망촛대와 잡풀가에
넋을 놓고 한참을 앉았다 일어섭니다
마음 놓고 큰 약 한번 써보기를 주저하며
남루한 살림의 한구석을 같이 꾸려오는 동안
당신은 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일 줄 모르고
약한 얼굴 한 번 짖지 않으며 살려했습니다
그러나 당신과 내가 함께 받아들여야 할
남은 하루하루의 하늘은
끝없이 밀려오는 가득한 먹장구름입니다
처음엔 접시꽃 같은 당신을 생각하며
무너지는 담벼락을 껴안은 듯
주체할 수 없는 신열로 떨려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우리에게 최선의 삶을
살아온 날처럼, 부끄럼없이 살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함을 압니다
우리가 버리지 못했던
보잘 것 없는 눈 높음과 영욕까지도
이제는 스스럼없이 버리고
내 마음의 모두를 더욱 아리고 슬픈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날들이 짧아진 것을 아파해야 합니다
남은 날은 참으로 짧지만
남겨진 하루하루를 마지막 날인 듯 살 수 있는 길은
우리가 곪고 썩은 상처의 가운데에
있는 힘을 다해 맞서는 길입니다
보다 큰 아픔을 껴안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엔 언제나 많은데
나 하나 육신의 절망과 질병으로 쓰러져야 하는 것이
가슴 아픈 일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콩댐한 장판같이 바래어 가는 노랑꽃 핀 얼굴보며
이것이 차마 입에 떠올릴 수 있는 말은 아니지만
마지막 성한 몸뚱아리 어느 곳 있다면
그것조차 끼워 넣어야 살아갈 수 있는 사람에게
뿌듯이 주고 갑시다
기꺼이 살의 어느 부분도 떼어주고 가는 삶을
나도 살다가 가고 싶습니다
옥수수잎을 때리는 빗소리가 굵어집니다
이제 또 한 번의 저무는 밤을 어둠 속에서 지우지만
이 어둠이 다하고 새로운 새벽이 오는 순간까지
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당신 곁에 영원히 있습니다
남해 금산/이성복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 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