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스터가 주홍글자를 가슴에 수 놓아 다니는 모습은 어느 순간 마을 사람들의 눈에 익게 되었고 맹목적으로 헤스터를 증오하는 시선도 거두어졌다. 헤스터는 싸우지 않았다. 세상의 편견에 맞서지도 이웃의 폭력에 항거하지도 않았다. 따가운 시선에 스스로를 담금질하며 묵묵히 하루 하루를 살았다. 스스로를 가여워하며 사람들에게 동정을 구하지도, 자기변호를 하지도 않았다. 부정한 낙인을 가슴에 새긴 채 주홍 글자를 증오하는 사람들을 이웃 삼아 지냈을 뿐이다. 세상이 헤스테에게 준 것은 무자비한 폭력이었지만 헤스터는 원망도 자기연민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힘든이들을 돕기까지한다. 헤스터의 선행은 세상에 진 빚을 갚으려는 부채의식에서 비롯된 게 아니었다. 주홍들자와는 별개인 헤스터 삶의 일부일 뿐이다. 물론 선행은 헤스터를 더욱 가치있게 보여주지만 세상의 편견을 극복한 건 헤스터의 인고의 삶을 통해서였다. 토지의 한복이가 생각났다. 거복이의 동생 한복이는 살인자의 아들로 마을에서 쫒겨나다시피 외가로 피해가지만 곧 돌아와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 한복이가 생각났다. 제 잘못도 아닌 일로 평생을 속죄하며 살아야하는 처지. 부모의 죄를 대물림할 수 밖에 없는 인간세상의 편견은 가혹한 것인었다. 한복의 형 거복은 이름마저 바꾸고 새 곳에서 새 생활을 했고 그렇게 김두수라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이거복은 세상에서 잊혀져야할 이름이었던 것이다. 반면 연좌죄라는 부채의 상속을 피하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정착한 이한복은 숱한 멸시와 천대를 받아내며 살아가고 결국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주홍글자를 마을 사람들의 의식에서 떼어낸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인 이한복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한복이와 헤스터는 대중에게 용서 받기 위해 애쓴게 아니었다. 그들은 스스로를 지키고자, 자기를 잃지 않으려고 힘겨운 싸움을 했었던 것이다. 세상 사람들의 폭력은 적의 도구일 뿐이다. 진정한 적은 윤리라는 세상의 질서였다. 질서에 순응한 세상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폭력을 묵묵히 견뎌 냄으로서 윤리라는 거대한 질서의 흐름에서 자기를 지킬수 있었던 헤스터라는 이름의 주홍글자를 품은 여인과 살인자의 아들 이한복. 그들은 질서(시스템)에 맞서 싸운 것이다. 나다니엘 호손의 주홍글자를 읽으며 여러 주제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만, 나는 헤스터라는 여인이 도덕이라는 이름의 폭력에 맞서는 모습을 보며 토지의 이한복이 떠올렸다. 주홍글자를 처음 읽었을 땐 헤스터의 기구한 운명과 유약한 목사의 고뇌에 대해서 생각했었지... 이번에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독후 느낌을 되살리기 위해 다시 읽은 책이었는데 난데없이 이한복이라니... 뜬금없지만 이 또한 독서의 즐거움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