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리나의 영화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늑대 여인에게 키스를 하면 그 여인이 늑대로 변해 키스한 남자를 해친다는 기괴한 영화 이야기. 자기가 늑대 여인이며 그래서 괴롭다는 이레나. 그 이레나의 망상에 연민을 느낀 한 남자. 늑대 여인이라 믿는 여인과의 결혼 그리고 예정된 비극... 몰리나의 이야기는 재밌었다. <거미 부인의 키스>는 아직 낮설었지만 책 속 영화인 -늑대 여인의 키스-에는 금새 빠져들고 말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 받는다. 몰리나와 발렌틴. 누가 이야기 하는지, 누가 듣는건지 자꾸 헷갈렸지만 엿듣는 기분으로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긴다. 캄캄한 곳에서 들리는 두 사람의 대화. 나도 눈을 감는다. 보이질 않으니 어두운 곳으로 따라갈 수 밖에... 나는 전지적 독자시점을 버렸다. 그리고 몰리나의 이야기를 듣는다. -늑대여인의 키스-이야기가 끝날때 쯤 상황 파악이 되었고 다시 <거미여인의 키스>를 읽는다.. 대화를 하는 그 곳은 감방이었고, 발렌틴과 몰리나는 남자였다.(여자 이름이잖아~) 영화이야기를 하는 몰리나는 스스로를 여자라 생각하는 동성애자이며, 발렌틴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정치범이라는 사실은 이 책을 읽은지 한참이 지나서야 알 수 있었다. 아동 성추행범 게이와 사회주의 혁명을 꿈꾸는 젊은 좌파 운동가는 세상 한 켠 가장 깊숙한 그 곳에서 서로의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 곳 그 깊은 곳이 아니었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둘만의 대화. 둘밖에 없으니 서로의 목소리를 피할 수 없다. 서로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해보다 실체가 더 간절한 곳이니까... 함께 있으나 다른 세상에서 왔으니 각자의 경험도, 마음 속 생각도 소통의 도구로서 도움이 되질 않는다. 둘이 아닌 또 다른 세상의 이야기 그러니까 곧 영화가 이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유일한 소통의 도구이다. 몰리나가 들려주는 여러 영화이야기를 들으며 사회주의자 발렌틴은 몰리나와는 다른 시선으로 영화를 해석하고 그 때문에 다툰다. 몰리나는 그의 사회 비판적 사고에 동의할 수 없다. 발렌틴이 몰리나의 성정체성을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처럼... 두 남자는 다툰다./ 그녀는 그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해준다./ 남자는 남자를 이해 못한다./그녀의이야기는 계속된다. 몰리나가 교도소장과 대화를 한다. 몰리나가 프락치였다. 나는 소장과 몰리나의 대화를 읽으며 다시 독자가 되어 냉정하게 책을 읽는다. 소장:몰리나. 뭐, 알아낸 거 없어? 피고:아직은요. 하지만 곧 이야기할 것 같아요. 소장:그래 몰리나만 믿어. 가석방 돼서 엄마 보러 가야지. 피고:그럼요 저만 믿으세요. (본문 발췌 아님) 다시 발렌틴과 몰리나의 공간이다.그리고 영화이야기. 또 다시 영화 이야기 엿듣는 멍청한 독자 하나. 책 속 이야기들의 풍성함에 즐거움은 의외로 컸다. 몰리나가 들려주는 영화이야기들은 그 자체로도 매력적이다. 작가 마누엘 푸익은 원래 시나리오 작가였다고 한다. 어쩐지 천명관이 생각나더라... <고래>를 읽을 때도 이야기의 풍성함에 감탄했었지~ 감옥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나누는 대화이기에 쉽게 몰입할 수 있었다. 어두운 감옥의 구속상태의 수인들이지만, 영화이야기를 통해 공감각적 인식의 경계 허물어지고 사상과 성에 대한 인간 보편적 탐구의 무한한 팽창이 이루어진다. 3류 소설 같은 싸구려 시나리오라 할지라도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거미여인의 거미줄이었다. 발렌틴이 그랬던 것처럼 나도 거미부인에게 키스를 해주고 싶었다. 몰리나가 가석방 된다. 이제 몰리나의 이야기는 끝난다. 나도 냉정한 독자로 돌아온다. 세상으로 나온 몰리나와 그를 추적하는 하나의 시선. 무한한 세상을(이야기) 만들어 내던 몰리나가 이제 이야기에 갇힌다. 몰리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몰리나를 이야기한다. 난 끝까지 작가의 거미줄 안에서 놀아난 건가? 나는 텍스트를 벗어나기도 빠져들기도 했다. 소설이 끝날 때 쯤 마누엘 푸익이 날 놓아준 것일까? 마누엘 푸익은 이제 내 거미줄 안에 있다. 내 거미줄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난 거미줄로 이 작품을 잡으려 해보지만 표면적인 스토리 외에는 분명한 게 하나도 없어 결국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 다시 마누엘 푸익의 거미줄에 잡혀보고 싶다. 그의 다른 거미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