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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에서 춤추다 - 서울-베를린, 언어의 집을 부수고 떠난 유랑자들
서경식 & 타와다 요오꼬 지음. 서은혜 옮김 / 창비 / 2010년 2월
평점 :
경계에서 춤추다
“디아스포라가 뭐야?”
“유태인 집단 거주지.”
몇 달 후
“디아스포라가 뭐야?”
“유태인 집단 거주지.”
잊어버리고 자꾸 묻는 아내나
그것도 모르고 구박 않고 꼬박꼬박 대답하는 저나
디아스포라가 아니라서 그런 것 같습니다.
“<경계에서 춤추다> 읽어봐.”
“산이 아빠도 읽었어? 서문에 본인들이 디아스포라라고 썼어. 유태인 집단 거주지 말고 다른 뜻은? 이방인, 다른 민족, 별난 사람, 뭘까?”
“서경식 님 본인이 디아스포라에 거주한다고 비유하는 거야, 재일교포니까. 이방인이라는 뜻이지,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아마 그럴 거야.”
설마... 이번에는 잊어버리지 않겠지요.
지난 주말 현대무용을 봤습니다. 홍대입구에 있는 포스트 극장이었는데, 신인무용인을 발굴하고 격려하고 널리 알리기 위한 무대인 것 같았습니다. 제목도 모르고 내용도 모르고 시작하기만을 기다리며 앉아 있으려니 머리가 긴 여자 무용수가 나와 준비운동을 하더군요. 관객 중 지인들이 있는지, 일찍 오셨네요, 인사도 하고 방긋방긋 웃기도 하면서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극의 한 부분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아무튼 머리가 긴 무용수는 은박종이를 군데군데 펼쳐 놓고 그 위에서 춤을 춥니다. 잠시 후 머리가 짧은 여자 무용수가 나와 하얀 종이를 펼쳐 놓고 그 위에다 무언가를 씁니다. 머리가 긴 무용수가 관심을 가지고 보려 하지만, 머리가 짧은 무용수는 쓰다가 마음에 2들지 않는지 찢어 구겨서 던져 버리고 또 쓰고 또 찢어 구겨서 던져 버리고... 머리가 긴 무용수는 버려진 종이들을 주워서 펼쳐 조각을 맞춰 읽어보려 하지만 잘 되지 않는지 그냥 내버려두고, 다시 자기가 깔아 놓은 은박종이 위를 돌아다니며 춤을 춥니다. 머리가 짧은 무용수는 머리가 긴 무용수를 노려보며 그 무용수에게 종이 뭉치들을 집어던집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하얀 종이들을 군데군데 깔더니 춤을 춥니다. 그러고 보니 종이들은 모두 한쪽은 은박 다른 한쪽은 흰색이었네요. 머리가 긴 무용수는 종이들을 모두 은박으로 해 놓으며 춤추고, 머리가 짧은 무용수는 그 뒤를 쫓아다니면서 종이들을 모두 흰색으로 뒤집느라 춤출 여유도 없습니다. 급기야 적대시하는 듯한 춤사위가 벌어지는데... 마지막에는 뭐... 화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같이 보았던 친구가 무슨 내용이야, 라고 묻는데 현대무용을 처음 접한 저로서는 무엇을 표현하려는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저 입속으로만 의사소통의 부재, 의사소통의 돌파구를 찾으려고 애쓰는 몸짓들 아니야 웅얼거렸습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시도는 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라 금방 포기하고 내것만 옳다 우기고 나와 같지 않다고 미워하고 상대방을 내 식으로 바꾸려 하고... 그러한 춤 동작 하나하나가 의미하는 것이(순전히 저 혼자 의미부여한 것입니다만) 다 우리네 삶 같아서 가슴이 아리기도 했습니다. 함께 살고는 있지만 아내와 아이들과 얼마나 깊이 마음과 생각을 주고받고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함께 일하고 함께 노는 동료들과 친구들이지만 얼마만큼 행복과 아픔을 나누고 도닥여주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디아스포라이건 아니건, 각 사람은 홀로 떨어져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태어나서 가족 속에서 살아가고 커갈수록 마을과 보다 더 큰 지역들 속에서 친구로 스승과 제자로 이웃으로 무리짓고 살아가지만, 문득문득 홀로라는 느낌이 서늘하게 가슴을 훑고 지나갈 때가 있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관계를 맺어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더욱더 내 마음이 이렇게 생겼거든요, 당신의 마음은 어떻게 생겼나요 하면서 발버둥을 치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야기를 많이 하면 할수록 어라, 이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할 때도 생겨서 그 발버둥이 무모하고 허무할 때도 있지만요.
추사도 김정희도 벗 이재 권돈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또다른 벗 황산 김유근의 죽음을 애도하며 이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더라구요. <주역>에 글로는 하고픈 말을 다 표현할 수 없고, 말로는 마음속 깊은 뜻을 모두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글은 말을 표현하는 수단이 아니고, 말은 마음속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도구가 아닐 것입니다. 하물며 말로는 마음속의 뜻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고, 글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표현할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 한 마디 덧붙이신 말씀이 외람되지만 잘 헤아려 주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의 우정을 석교(石交)라고 할 만큼, 그리고 하루라도 보지 않으면 문득 슬퍼하며 실성한 듯하였다고 할 만큼, 또한 옛 그림 하나를 구하면 오른쪽 왼쪽 여백에 모두 두 사람(황산 김유근의 글- 추사와 이재를 말합니다)의 도장을 찍어 얼굴을 대신하여 만나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다고 할 만큼 끈끈한 관계를 갖고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글과 말로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충분치 못하다고 했으니 다른 관계들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편지를 주고받으며 의사소통하던 서경식 님과 타와다 요오꼬 님도 같은 고민을 나누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저는 그 책을 읽으면서 두 분의 “편지극”에서는 의사소통이 잘 되어 즐거웠습니다. 서경식 님이 서문에서 밝혔듯이 타와다 요오꼬 님과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재일조선인과 일본인. 남자와 여자. 일본(과 한국을 오고가며)에서 살고 독일에서 살고. 교수와 작가 등등. 서경식 님이 “서로의 대화는 정해진 목적지에 안전하게 도착하기보다는, 오히려 서로의 관심이나 감각의 미묘한 어긋남을 도드라지게 만들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라고 했는데, 오히려 저는 그러한 어긋남의 도드라짐이 이 편지극의 재미라고 생각합니다. 서경식 님의 글사위는 좀 강인하고 투박하고 활기찬 느낌이 있고 타와다 요오꼬 님의 글사위는 부드럽고 섬세하고 오밀조밀한 느낌입니다. 지명에 매혹되신 일이 없으셨나요, 하고 말을 던지면 집은 역사를 조망하는 전망대 같아요, 하고 집에 대해 한바탕 글춤을 추고, 어쩌면 저는 개일지도 몰라요, 하면 모차르트는 예민한 귀로 인해 고생했을 겁니다, 하며 목소리에 대해 또 한바탕 노는 두 사람의 편지극. 이 신명나는 열 마당의 놀이극들은 제가 어렸을 적 연애편지나 대필해주고 친구들과 편지지에 신변잡기로 떠들던 것들과 참 많이 달라 보입니다. 은근히 지식인들의 대화들은 이런 거야, 부럽기도 하고 나도 이렇게 해봐야지 쓸데없는 계획도 세워보고 그렇습니다. 제가 이렇게 던져드리는 글을 잘 받아주셔서 다시 제게 던져주시면 우리도 나름대로의 놀이극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욕심을 부려봅니다. 겨울도 아니고 봄도 아닌 날씨들 속에서 강건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