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고 캠핑여행지를 찾아라 - 캠핑 전문가들이 직접 뽑은 베스트 캠프장 완벽 가이드
한형석 글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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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들이 추천하는, "우리나라 각 지역을 대표할 만한 명품 캠프장"

 
저에게도 자랑하고 싶은 캠프의 추억이 있습니다. 제가 중학생이던 시절 여름방학 때면, 우리 가족은 관악산으로 들어가 짧게는 1주일 길게는 2주일 정도 '살다' 오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곳에서 출퇴근을 하셨고, 우리는 계곡에서 수영도 하고 책도 읽으며 하루 종일 여름을 만끽했습니다. 2주일 동안 TV를 전혀 보지 않고 산 속에서 생활했던 경험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문명과 완전히 단절된 채, 자연과 교감하는 야생생활은 한 없이 여유로운 마음과 시간을 선물해주었고, 우리는 몸도 마음도 정신도 완전한 휴식 속에 잠겨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TV, 핸드폰, 컴퓨터가 없어도 지루함 따윈 느낄 새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캠프가 끝나면 우리는 일상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습니다. 복잡하게 돌아가는 이런 저런 세상 뉴스를 들으면 어디 별세계에 다녀온 기분에 젖어들 정도였으니까요. 

언제부터인가 유행이 지났다고 생각했던 '텐트'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조트나 펜션으로 휴가를 떠나는 것이 대세인 시절에 다시 등장한 텐트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복고적인 향수인가,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런데 본격적으로 캠프를 즐기는 캠핑 마니아들이 많다는 사실이 저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우리 가족이 간직한 특별한 캠프의 추억에 감사하면서도, 그것은 편리한 숙박시설이 없었던 지나간 날의 추억 정도로만 여겼던 마음이 오히려 얼마나 뒤떨어진 생각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대세(!)만 따라가는 제 삶이 얼마나 진부한 것이었나 하는 반성과 함께 생각이 깨어나는 기분입니다.

캠핑 여행에 다시 도전해볼 용기(!)가 생긴 것은, 반복되는 여행의 패턴이 지루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진 찍고 출발하고, 사진 찍고 출발하는 '보는' 여행이 '반복'되면서 여행 자체가 지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보다는 나를 짓누르는 문명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연의 소리에 잠겨들 수 있는 시간을 갖고 싶습니다. TV의 방해가 없고, 즐거운 놀이를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 한밤중에 모닥불에 끓여 마시는 커피의 향을 느긋하게 음미하고 싶습니다.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치밀하게 계획한 이동 스케줄에서 벗어나, 게으르게 흘러가는 구름을 할 일 없이 감상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여기까지는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바람일 뿐이고, 캠핑은 초보에게 그리 만만한 여행이 아닙니다. 잘못하면 캠핑은 자연과 동화되는 환상적인 여행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환상'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캠핑은 생 고생으로 끝나버리고 말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캠핑의 낭만을 그렇게 누려보고 싶으면서도 선뜻 캠핑 여행을 떠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안전'에 대한 두려움 때문입니다. 편리한 샤워시설, 안락한 침대를 포기하는 것도 아쉬운 일이지만, 그보다 야생에 내던져지는 것에 대한 (이율배반적인)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대한민국 최고 캠핑여행지를 찾아라!>는 초보 캠퍼들에게 '캠핑 바이블' 같은 책입니다. 이 책을 보니 캠핑이 그리 만만한 여행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또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고 싶을 만큼 캠핑의 매력에 푹 빠져들게 만들기도 합니다.

<대한민국 최고 캠핑여행지를 찾아라>의 가장 큰 장점은 대한민국 최고의 캠프장을 서로 비교해가며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년간의 경력이 있는 캠핑여행의 달인 20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여, 그들이 추천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캠프장을 각 지역별 랭킹순으로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여행지 소개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꼼꼼하게 챙겨주는 여러 가지 캠핑 '팁'을 보며, 생각했던 것보다 체크하고 챙겨야 할 것이 많다는 것을 알고 놀랐습니다. 초보들이 너무 쉽게 도전했다가는 큰 고생을 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할 것은 없습니다. <대한민국 최고 캠핑여행지를 찾아라>는 참으로 알뜰하고 살뜰하게 '캠핑'에 대한 알찬 정보와 함께 큰 그림과 세세한 그림을 꼼꼼하게 그려주고 있으니까요. 캠핑의 목적을 분명히 하라는 충고에서부터, 캠핑 여행을 위한 이미지 트레이닝, 지도, 정보 구하는 법, 기본 장비, 기타 장비, 캠프장에서 멋낼 수 있는 코디 방법, 짐 줄이는 노하우, 캠프 사이트 구축법, '이장 집을 찾아라, 중국집을 찾아라' 등 고수만이 전수해줄 수 있는 '이건 몰랐지 베스트 5'까지 '캠프 여행'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입니다. 게다가 꼭 캠핑이 아니어도 즐기고 싶은 '캠핑 요리 레시피'는 정말 최고입니다!!!

"어른들을 위한 장난감 가게"(20)라고 하는 캠핑 장비 매장에 한 번 들러보고 싶습니다. 캠핑용 의자와 탁자를 방에 두고, 방 침대를 야전 침대로 바꾸고 싶은 (다소 오버스러운) 충동도 느낍니다. 따뜻한 침낭 속에서 아침을 만끽하다가 건너편에 있는 "화장실에 들러 독한 암모니아 향기를 느끼며" 바라보는 캠프장의 아침, 그 불편하지만 상쾌한 운치를 가슴 가득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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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강사 유수연의 원 포인트 잉글리시
유수연 지음 / 살림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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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학문이 아니다"(5).

 
영어 때문에 '미칠고 팔짝 뛸' 때가 있다. 단어도 다 알겠고, 문법도 어려울 게 없는데 도무지 해석이 안 될 때이다. 짧고 간단한 문장일수록, 스트레스는 반비례로 상승한다. 서울대에서 주관하는 TAPS 시험을 본 적이 있다. '실용영어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만든 시험이라는데 듣기 평가 배점이 높아 걱정은 되었지만, '비교적' 쉬운 어휘와 지문이 나온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런데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일은,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면) '실용 영어'는 '학문 영어'에 비해 '논리적'이지 않다는 거였다. 회화는 물론이고, 독해 실력을 평가하는 '일상적인' 지문도 학문적인 문장에 비해 문법이 비교적 '자유로웠다'. 회화도 일상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표현'을 익히지 않은 탓에, 정말 뜻도 다 알고 문법이랄 것도 없는 간단한 문장조차 해석이 되지 않는 사태에 직면하고 말았다. 전공서적 독해에만 매달린 영어 실력의 한계를 그대로 드러내고 만 것이다.

<스타강사 유수연의 원 포인트 잉글리시>는 영어 실력을 향상시키려면 "이미 알고 있는 영어를 써먹는 비법"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비법은 한마디로 "자주 쓰는 쉬운 단어들의 1퍼센트 뉘앙스"잡는 것! 기본 어휘들의 숨은 1퍼센트 뉘앙스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해진다고 지적한다. 'go'나 'come'처럼 쉬운 단어들을 적합하게 활용할 수 없다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바로 이 1퍼센트의 간극 때문에, 뜻을 알고 있어도 해석이 되지 않고 단순한 문장조차 만들어내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나는 것이다.

결론은, 어려운 단어 말고 쉬운 단어를 '제대로' 공부하라는 것! 그렇다면, 쉬운 단어를 '제대로' 공부한다는 것을 영어를 어떻게 공부한다는 뜻일까? "어려운 단어를 외우려고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기본적인 단어의 뉘앙스에 집중하라는 뜻이다"(133). 그것은 바로 영어의 발상과 감을 익히는 것이다. 단어의 뜻을 단편적으로 무조건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원어민들의 '감각'을 이해하고 익히는 것이다. 

단어 하나에 뜻 하나만 외우는 습관이 왜 위험할까? '스타강사 유수연'이 제시하는 다음의 문제를 풀어보라.
Q1) It's your (1) option / (2) choice!
Q2) I can't withdraw money because I can't remember the (1) password / (2) PIN number.
Q3) I have (1) a promise / (2) an appointment at 7 tonight.
Q4) What (1) had / (2) possessed them to act like that?

위의 문제를 쉽게 풀 수 있는 정석은 문장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단어가 가지고 있는 '뉘앙스'를 분명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뜻은 같지만 뉘앙스가 다른 option과 choice, promise와 appointment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아무리 익숙한 단어도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스타강사 유수연의 원 포인트 잉글리시>는 쭉쭉 읽어나가는 책이다. 어려운 단어나 지루한 문법적 설명도 없고, 머리 싸매고 암기해야 하는 것도 아닌 '원 포인트'가 간단 명료해서 더 재밌게 읽힌다. 잘 알고 있던 단어들의 '미묘한' 차이를 명확하게 알게 되는 쾌감도 있다. 어느 정도 실력은 되는데, 아무리 공부를 해도 더 이상 수준이 향상되지 않고 있다면 이 책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안다고 착각하는 기본 어휘들의 숨은 1퍼센트 차이를 정리해서 2-3시간 만에 토익 점수를 100점 이상 오르게 만들었던 검증된 사례"가 있다는데, 그 말이 실감이 된다. "영어의 기본기를 확실하게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주장에 동의한다.

"영어를 잘하기 위한 답은 간단하다. 처음부터 기본 어휘들을 철저하게 제대로 습득하면 된다. 몇 가지 용례나 그런 뜻을 갖게 된 원리만 알면 그 뒤로는 거칠 것이 없다. 스피킹과 라이팅의 기본이 열리기 때문이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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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 지음 / 프리윌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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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_ 예수님이 물으셨다.

D.L. 무디 목사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군인들은 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범법자로 보았다. 여자들은 슬퍼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보았다. 예수의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며 그리스도를 아들로 보았다. 제자들은 난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꺾인 소망으로 보았다. 고침 받은 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은인으로 보았다. 백부장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권세자로 보았다. 제사장들은 조소하면서 그리스도를 협잡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천사들은 놀라며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보았다. 마귀는 당황하면서 그리스도를 여자의 씨로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을 품으시고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아들로 보셨다. 지나가던 사람은 무관심하게 그리스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요?"

 
"예수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라 했는가?" _ 칼릴 지브란이 답하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이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 결심했던 것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시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존경해마지 않는 함석헌 선생이 "칼릴 지브란의 복음서"라 이 책을 극찬했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은 "지브란이 오히여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고 있다는 점은 놀랍다. 그가 높은 믿음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거기서 만족을 아니하고 낮은 현실로 내려와 믿음의 구체적인 삶을 예수에게서 찾고 있다"고 이 책을 평했다.

'역사적 예수'라는 신학 주제가 익숙하고, 맥스 루케이도의 작품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칼릴 지브란의 이 책이 그리 새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상당히 센세이션한 충격을 몰고 왔으리라 짐작된다. 칼릴 지브란은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재구성한다.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 속에는 "예수의 대적도 있고 친구도 있다. 시리아 사람, 로마 사람, 유대 사람, 그리스 사람, 페르시아 사람, 가지가지의 사람들이 예수를 말한다. 제사장, 철학자, 제자, 세무관리, 이웃, 매춘부, 시인 등이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5). 칼릴 지브란의 문학적 상상력과 사상가적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누구는 "2천 년 전, 유대 땅에 살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예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예수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 2천 년 전, 유대 땅에 실재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그분을 3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고, 우리의 뜬눈으로 그것도 환한 대낮에 날마다 그분을 보았으니까요. 우리는 그분의 손을 직접 만져보았고, 이곳저곳으로 그분을 따라다녔지요.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행적을 두 눈으로 목격했죠.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그냥 사유 끝에 찾아낸 이념, 혹은 꿈이나 꿈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23, 여성 제자였던 라헬) 

2천 년 전, 유대 땅에 실재했던 사람의 아들 예수의 말이 도시를 깨우고, 그가 한 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달리는 말과 전차를 갖춘 강력한 군대가 되었으며, 도끼나 창 없이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로마의 카이사르를 정복하고(90),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계시의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대적자들은 예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기도 한다. "그는 (...) 산헤드린 회당 앞에서는 우리의 고귀하신 제사장들을 비난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위를 끌고 자신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33, 가버나움의 젊은 제사장). 칼릴 지브란의 상상력이 재미있다. 그들이 입장에 서서 보니 과연 예수가 그렇게 비쳐졌을 법도 하다. '각각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예수 상(像)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진리의 빛은 하나이건만 '사람'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의 파장은 참으로 다이내믹하다.

어떤 증언들의 칼릴 지브란의 신학사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디옥 사바의 입을 빌어 '다소의 사울에 관하여' 증언한 그의 생각이 새롭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를 열정과 환희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한 반면 다소의 사울은 사람들을 옛날의 책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에 구속되어 살도록 인도했습니다. 예수는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속박의 사슬을 풀고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쳤지만, 사울은 율법으로 오히려 자신의 미래를 얽어맬 사슬을 만드는 법을 가르칠 뿐이었습니다"(217, 안디옥의 사바).

오타와 띄어쓰기 실수가 많은 것은 아쉽지만, "가톨릭 관점에서 단순 직역한" 것이 아닌 "개신교적 입장에서 야곱의 심장으로" 새롭게 번역한 역서를 만난 것은 기쁘다. 시적인 상상력 안에서 '사람의 아들' 예수가 추구하고 걸었던 '삶'과 '죽음'의 생생한 궤적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_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이 지배하는 혁명적인 왕국을 건설하라 명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의론자가 되기 위해 왕국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왕국을 만들기를 열망합니다"(171, 예루살렘 외곽에 사는 유다의 친구).

"로마인들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죄악이 그분을 언덕 위 십자가 고통 위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그분의 보혈의 은혜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209, 삭개오).

누군가 "빌 게이츠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를 거부할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적인 성찰에 의해서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무지의 어둠을 뚫고 침투한 강렬한 계시의 빛 가운데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 신앙을 갖게 된다.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세상과 소통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에 대해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답해본 적이 있는가? 칼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는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더불어,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에 대해 묵상해볼 수 있는 '진지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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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웃고나서 혁명
아지즈 네신 지음, 이난아 옮김 / 푸른숲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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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시민이여, 모든 불의에 혁명적 유머로 답하라!"


<일단, 웃고 나서 혁명>이라는 이 책의 제목 위로 무수한 인터넷 댓글들이 겹쳐졌다. 분노에 차서 비난하고, 조롱하고, 저주하고, 욕설을 퍼붓는 대중들의 '화', 그 화의 기운에서 혁명의 싹이 태동하는 것이 아니었는가? <일단, 웃고나서 혁명>하자는 저자의 발상이 신선하다. "서슬 퍼런 계엄령 하에서도 권력의 압제에 굴하지 않고 글로써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간" 터키 문학사의 거장다운 '여유'가 속된 말로 "쩐다!" 풍자소설의 해학을 극대화한 제목이겠지 생각했는데, 아니다! 이 사람, 정말 웃으며 혁명한 것은 아닐까. "세계 시민이여, 모든 불의에 혁명적 유머로 답하라"는 표지의 빨간 글귀가 마음을 지옥으로 만들었던 내 안의 화를 좀 누그러뜨리고, 건설적인 혁명의 기운을 부여하는 듯 하다.

<일단, 웃고나서 혁명>은 마치 <이솝 우화>를 읽은 듯한 기분에 젖게 만든다. '교훈적'인 성격 때문일까. 이 책은 정치 사회의 부조리, 결점, 모순, 불합리 따위를 검은 웃음으로 그려내며 조롱한다. 신랄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화살은 정치세력을 향해서가 아니라, 대중을 향해, 바로 나를 향해 날아들고 있다는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다. '나'를 겨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심은 마지막 이야기 <황소가 승자다>에서 확신으로 바뀌었다.

첫 이야기를 보자. <우리는 외메르 영감을 뽑지 않겠다>고 수없이 약속하고 서로 굳은 결의를 다졌으면서도, 결국은 약삭빠른 외메르 영감에게 넘어가 외메르 영감을 다시 이장에 선출하고 만 마을 사람들이 바로 우리가 아닌가! 외메르 영감은 자신의 작은 이익을 위해서라면 공익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마을 사람들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었을 뿐이다. <일단, 웃고나서 혁명>은 위정자, 국가 관료와 공무원들, 언론의 코미디 같은 행태를 코믹하게 풍자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런 비상식적 행위가 용납되어지는 것은, 끊임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절되지 않는 것은 바로 우매한 '나' 때문이라는 자각이 화들짝 나의 뇌리를 강타한다.

마지막 이야기 <황소가 승자다>를 보자. "동물들 사이에 빨리 달리기 대회가 열릴 참이었습니다. 동물들은 저마다 자기가 가장 빨리 달린다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는 거북이조차 말이지요.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발이 가장 빠른 동물은 사냥개와 토끼라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지요. 그러나 모든 동물들의 마음속에는 항상, 어디서나 그렇듯이, 가장 뛰어난 강한 존재를 질투하는 누를 수 없는 적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냥개와 토끼가 가장 빨리 뛴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느 누구도 이 둘이 대회에서 우승하기를 바라지 않았지요"(183).

맞수에 대한 적의, 가장 뛰어난 존재에 대한 질투는 '그들'의 것이 아니라, 바로 모든 동물, '우리'의 감정이다. 이러한 감정은 합리성을 마비시키고, 판단력을 앗아가버린다. 그리하여 우리는 내가 싫어하는 그 사람만 우승하지 않는다면, 아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는 '황소'가 우승을 해도 상관이 없게 된다.

"모든 동물둘이 왕이 될 자격도, 능력도 없으면서 저마다 동물의 왕이 되고 싶어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 뛰어나고 능력을 갖춘 이들은 질투의 대상이 되는 법입니다. 모든 동물들이 사자와 호랑이를 질투했고, 곱게 보아 넘기지 못했지요. 그렇게 해서 동물의 왕 후보로 황소가 지목되었습니다"(191).

작가는 분명 터키 상황의 체험을 글로 풍자한 것일텐데, 이 책의 말대로 "오늘 대한민국의 9시 뉴스"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사회의 부조리를 조롱하는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리 '통쾌'하지 않은 것은 시대와 문화와 국가를 초월하여 가진 자들의 횡포와 기득권층의 부조리와 결점과 모순이 바뀌지 않는 사회를 통탄함이며, 그들을 용납하는 비겁하고 우매한 시민이 바로 '나'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풍자가 필요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옮긴이의 말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잃어버릴 것'이 족쇄만이 아닌 우리에게 '혁명'은 이미 낡은 이슈일지도 모르고, 귀찮은 주제일지도 모르고, 맥이 빠져버린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좀 더 어린 시절(?)에 이 책을 읽었다면 지금처럼 한숨보다 이를 악물고 토해내는 뜨거운 결의가 더 힘차게 터져나왔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일반 풍자소설과는 달리 '그들'을 향한 비판적인 조롱보다 '나'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일단, 웃고나서" 내 안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혁명"을 조용히 되새겨보면 어떨까. 성공하지 못한 혁명이라 해도, 아무도 모르는 혁명이라 해도, 가능성 없는 혁명이라도 해도, 그래도 언제나 존재해왔던 저항 세력의 작은 정의가 이만큼이라도 우리 사회를 지탱해왔는지도 모를 일 아닌가. 이 참에 "모든 불의"에 파괴적인 분노만이 아니라, 좀 더 유연하고 활기찬 "혁명적 유머"로 대응할 수 있는 내공을 기르는 것도 뜻깊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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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 - 왜 그곳에만 가면 돈을 쓸까?
크리스티안 미쿤다 지음, 김해생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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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감을 연출하라!"
일곱 가지(영예로움, 환희, 파워, 탁월함, 열망, 황홀감, 여유) 감정 연출법!

 
혹시 자주 가는 '나만의' 카페, 쇼핑센터, 휴식공간, 특별한 장소가 있는가? 우리는 왜 그곳에 자주 가게 되는 것일까? <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에 의하면 우리는 그곳에서 "영예로움, 환희, 파워, 탁월함, 열망, 황홀감, 여유"라는 일곱 가지 행복감 중 적어도 하나 이상의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호텔이나 대형 백화점을 자주 찾는다면, 신전의 출입문을 옮겨 놓은 듯한 거대한 입구를 통과하면서부터 그 장엄함이 선사하는 '영예로움'을 나도 모르게 즐기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안락한 의자가 있는 편안한 휴식 공간을 자주 찾는다면, 그곳에서 맛볼 수 있는 '여유'를 충분히 즐기고 싶기 때문일 것이다. 다채롭고 풍성한 음식은 '환희'의 감정을 자극하고, 한정판으로 나온 특별한 물건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사냥 욕구는 그것에 대한 강한 '열망'을 낳는다.

이 책의 대전제는 "인간은 아름다운 것, 인상 깊은 체험, 조형의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행복감을 갈구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만도 '호모 루덴스'만도 아니다. 우리는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인간은 생각할 줄 알고 놀줄 아는 존재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것, 인상 깊은 체험, 조형의 세계가 불러일으키는 행복감을 갈구하는 존재다. 호모 에스테티쿠스는 미학적인 자극을 수동적으로 받기만 하지 않고 그 자극을 자신의 행동으로써 더욱 강화한다. 이와 같은 증폭 행위는 인간에게는 진정으로 미학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우리는 자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자극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 감정을 이입하며, 자극에 대한 반응을 행복감으로 승화시킨다"(292).

인간이 "호모 에스테티쿠스"라는 대전제가 어떻게 "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과 연결되는가? 그것이 이 책이 논하고자 하는 본격적인 물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책의 대답은 한마디로 이렇다. "인간은 소비만을 위해 구매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매하는 것은 행복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구입하는 고객은 차뿐만 아니라 그 차로 인해 누릴 수 있는 행복감도 함께 산다는 것이다(17).

세계적인 공간연출 전문가이자 트렌드 연구가이며, 브랜드 마케팅 및 무드 매니지먼트 컨설턴트라는 저자 '크리스티안 미쿤다'는 이를 논증하기 위해 유명 브랜드 매장이나 백화점, 놀이동산, 레스토랑 등에 숨어 있는 "정교하고 치밀한 심리적 연출"을 7가지 범주 안에서 분석하고 있다. 인간은 감정, 즉 행복감을 구매하는 존재이고, 이러한 인간을 유혹하기 위해 우리가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여러 장소들에 '감정 연출법'이 숨어 있음을 밝힌다.

<마음을 훔치는 공간의 비밀>은 인간이 느끼는 행복감을 총 7가지 범주로 구분하여 정리했다. 그 일곱 가지 행복감이란 "영예로움, 환희, 파워, 탁월함, 열망, 황홀감, 여유"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일곱 가지 행복감의 모태가 '죄악'이라는 저자의 견해이다. 저자는 4세기 가톨릭 수사 에바그리우스 폰투스가 '중죄'로 정죄한 일곱 가지 마음과 우리가 느끼는 행복감을 연결짓고 있다. 저자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품고는 싶지만 매우 저열한 마음 각각을 그에 상응하는 고상한 마음가짐으로 대체"(19)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 영예로움은 오만을, 환희는 탐식을, 파워는 분노를, 탁월함은 시기심을, 탐욕은 열망을, 황홀감은 음욕을, 여유는 나태를 그 모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곱 가지 중죄의 바탕이 되는 욕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일곱 가지 행복감은 일곱 가지 중죄에 버금가는 욕구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영예로움, 환희, 파워, 탁월함, 열망, 황홀감, 여유를 경험하고 싶어한다. 수준 높은 감성문화, 삶을 바꾸는 생태 체험, 상품을 생생한 체험과 결합하는 일상 연출 등은 경제가 어려운 때일수록 구매자의 만족도를 높여준다"(49).

가게를 오픈하는 동생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본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은 직접적인 인테리어 노하우라기 보다는 공간을 연출하는 '이론적인 큰 틀'을 제시한다고 볼 수 있겠다. 저자의 다채로운 직함이 말해주듯이, 공간연출, 트렌드 연구, 브랜드 마케팅, 무드 매니지먼트 컨설턴트 등에 관심이 있는 독자가 읽으면 좋을 책이다. 일상적인 공간에 숨은 '감정 연출법'의 비밀을 알게 되는 재미도 솔솔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흥미롭기는 한데 서론격(대전제)으로 다루어지는 '일곱 가지 행복감'이라는 주제가 나머지 장들의 '예'를 통해 무수히 반복되는 내용전개가 다소 지루함을 느끼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행복감은 세상 모든 사람들이 공감하는 체험 연출, 즉 가치를 높이 끌어올리는 연출의 구성요소라는 것과 그 행복감이라는 감정이 죄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저자의 논제가 시시하는 바는 무엇일까? "은밀하게 연출하라"는 암시일까? 다시 말해, '드러내놓고' 연출하지 말고, 죄악을 모태로 하고 있는 감정을 은연중에 적절하게 자극해야 한다는? 아무튼 인간이 느끼는 일곱 가지 감정이 죄악을 모태로 하고 있다는 저자의 분석은 흥미로웠지만, 그것이 '공간 연출'에서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과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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