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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 예수
칼릴 지브란 지음 / 프리윌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_ 예수님이 물으셨다.
D.L. 무디 목사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묵상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군인들은 잔인한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범법자로 보았다. 여자들은 슬퍼하며 그리스도를 주로 보았다. 예수의 어머니는 가슴 아파하며 그리스도를 아들로 보았다. 제자들은 난처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꺾인 소망으로 보았다. 고침 받은 자들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은인으로 보았다. 백부장은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권세자로 보았다. 제사장들은 조소하면서 그리스도를 협잡하는 사람으로 보았다. 천사들은 놀라며 그리스도를 사랑으로 보았다. 마귀는 당황하면서 그리스도를 여자의 씨로 보았다. 하나님은 사랑을 품으시고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아들로 보셨다. 지나가던 사람은 무관심하게 그리스도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보았다." 이어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당신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는 어떤 분이신가요?"
"예수 당시 사람들은 예수를 누구라 했는가?" _ 칼릴 지브란이 답하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이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꼭 읽어야겠다 결심했던 것은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은 아주 작습니다"라는 시를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존경해마지 않는 함석헌 선생이 "칼릴 지브란의 복음서"라 이 책을 극찬했기 때문이다. 함석헌 선생은 "지브란이 오히여 '사람의 아들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고 있다는 점은 놀랍다. 그가 높은 믿음의 세계를 가지고 있지만, 거기서 만족을 아니하고 낮은 현실로 내려와 믿음의 구체적인 삶을 예수에게서 찾고 있다"고 이 책을 평했다.
'역사적 예수'라는 신학 주제가 익숙하고, 맥스 루케이도의 작품에 익숙한 현대인에게는 칼릴 지브란의 이 책이 그리 새롭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책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상당히 센세이션한 충격을 몰고 왔으리라 짐작된다. 칼릴 지브란은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예수가 아닌,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사람의 아들'로서의 예수를 재구성한다.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사람들 속에는 "예수의 대적도 있고 친구도 있다. 시리아 사람, 로마 사람, 유대 사람, 그리스 사람, 페르시아 사람, 가지가지의 사람들이 예수를 말한다. 제사장, 철학자, 제자, 세무관리, 이웃, 매춘부, 시인 등이 예수를 증언하고 있다"(5). 칼릴 지브란의 문학적 상상력과 사상가적 통찰력이 빛을 발한다.
누구는 "2천 년 전, 유대 땅에 살다 십자가에 달려 처형된 예수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예수 신앙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사람의 아들로 2천 년 전, 유대 땅에 실재하셨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우리는 그분을 3년 동안이나 알고 지냈고, 우리의 뜬눈으로 그것도 환한 대낮에 날마다 그분을 보았으니까요. 우리는 그분의 손을 직접 만져보았고, 이곳저곳으로 그분을 따라다녔지요.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행적을 두 눈으로 목격했죠. 그런데 어떻게 그것을 그냥 사유 끝에 찾아낸 이념, 혹은 꿈이나 꿈의 일부라고 말할 수 있겠어요?"(23, 여성 제자였던 라헬)
2천 년 전, 유대 땅에 실재했던 사람의 아들 예수의 말이 도시를 깨우고, 그가 한 말들은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달리는 말과 전차를 갖춘 강력한 군대가 되었으며, 도끼나 창 없이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과 로마의 카이사르를 정복하고(90), 지금 여기 우리에게까지 계시의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의 의미를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대적자들은 예수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기도 한다. "그는 (...) 산헤드린 회당 앞에서는 우리의 고귀하신 제사장들을 비난함으로써 사람들의 주위를 끌고 자신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33, 가버나움의 젊은 제사장). 칼릴 지브란의 상상력이 재미있다. 그들이 입장에 서서 보니 과연 예수가 그렇게 비쳐졌을 법도 하다. '각각의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예수 상(像)은 얼마나 다채로운가. 진리의 빛은 하나이건만 '사람'이라는 스펙트럼을 통과한 빛의 파장은 참으로 다이내믹하다.
어떤 증언들의 칼릴 지브란의 신학사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안디옥 사바의 입을 빌어 '다소의 사울에 관하여' 증언한 그의 생각이 새롭다. "나사렛 예수는 우리를 열정과 환희 속에서 살아가도록 인도한 반면 다소의 사울은 사람들을 옛날의 책 속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에 구속되어 살도록 인도했습니다. 예수는 복음으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속박의 사슬을 풀고 자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지 그것을 가르쳤지만, 사울은 율법으로 오히려 자신의 미래를 얽어맬 사슬을 만드는 법을 가르칠 뿐이었습니다"(217, 안디옥의 사바).
오타와 띄어쓰기 실수가 많은 것은 아쉽지만, "가톨릭 관점에서 단순 직역한" 것이 아닌 "개신교적 입장에서 야곱의 심장으로" 새롭게 번역한 역서를 만난 것은 기쁘다. 시적인 상상력 안에서 '사람의 아들' 예수가 추구하고 걸었던 '삶'과 '죽음'의 생생한 궤적이 새로운 의미로 되살아난다.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 _ 이제 우리가 답해야 할 차례이다.
사람의 아들 예수는 우리에게 새로운 가치관이 지배하는 혁명적인 왕국을 건설하라 명하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속하고 우리의 구세주가 되셨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정의론자가 되기 위해 왕국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사람은 모든 사람이 왕으로 살아갈 수 있는 왕국을 만들기를 열망합니다"(171, 예루살렘 외곽에 사는 유다의 친구).
"로마인들도 예루살렘의 제사장들도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죄악이 그분을 언덕 위 십자가 고통 위에 매단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온 세상이 그분의 보혈의 은혜 아래에 서 있는 것입니다"(209, 삭개오).
누군가 "빌 게이츠를 좋아할 수도 있고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를 무시할 수는 없다"고 했다. 우리는 "예수를 거부할 수도 있고 따를 수도 있다." 다만 어떤 방식으로든 응답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철학적인 성찰에 의해서 신앙인이 되지 않는다. 경험적으로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무지의 어둠을 뚫고 침투한 강렬한 계시의 빛 가운데 예수를 주로 시인하고, 예수 신앙을 갖게 된다. "내가 믿는 예수는 누구인가?"를 주제로 세상과 소통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에 대해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답해본 적이 있는가? 칼릴 지브란의 <사람의 아들 예수>는 "예수는 누구인가"에 대한 생생한 증언과 더불어, "나에게 예수는 누구인가? 나는 예수를 누구라 하는가?"에 대해 묵상해볼 수 있는 '진지한'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