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 마로니에북스 아트 오딧세이 7
스테파노 추피 지음, 하지은.최병진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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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은 역사다!

 

인간 사회를 읽어내는 많은 '코드'가 있겠지만, 미술만큼 종합적이면서 또 예언적이고 심미적인 것이 또 있을까 싶다. 특히 그림 한 폭에 담긴 내용이 어찌나 많은지 '그림을 읽어주는' 책을 만나면 보면서도 알지 미처 읽어내지 못했던 숨은 그림의 이야기가 경이롭기까지 하다. 책을 통해 '그림'을 알아갈 때마다, 정말이지 그림에 "눈뜬다"는 표현이 안성맞춤이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르네상스 미술>은 미술에 눈을 뜨게 해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라는 찬란했던 한 시대를 우리 앞에 그려준다. 

<르네상스 미슬>은 위대한 예술과 문화가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사회적, 사상적, 국제적 '배경'을 설명해주며, 그것에 미술에 어떻게 반영되고 표현되었는지를 읽어준다. "'르네상스'라는 단어는 실제 위대한 예술과 문화가 찬란하게 빛나던 시대,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 신세계 발견, 유럽의 수많은 정치, 종교 조직의 접합면과 같은 다양한 의미들을 담고 있다"(8)는 그 르네상스의 역사가 입체적으로 복원된다. 궁중의 세계가 압축된 고딕 말기부터 인문주의를 바탕으로 성장, 발전한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지나, 바로크의 시작에 이르는 반 종교개혁 시기까지 르네상스 시대의 명작을 탐구하며 약 200년 간(1390-1606)의 유럽 미술 역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르네상스 미술>에는 사상과 예술, 그리고 사회를 지배했던 '신'과 만물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새로운 깨우침의 긴장이 공존하고 있다. 가장 질 좋고 귀한 재료로 군주의 화려함과 우아함을 전달할 책무가 주어진 궁정 화가들의 이야기에서 인문주의가 탄생하고 르네상스라는 한 시대가 화려하게 꽃피는 과정과 그 시대의 특징이 압축적으로 요약된다. 가장 흥미롭게 읽혔던 주제어 중 하나는 바로 '비율'이다. 잘 계산된 비율은 15세기 피렌체 미술의 미천이었으며, 조형예술 분야에서 진정한 혁명이었다는 원근법이 탄생하고, 이후 이탈리아의 수많은 화가 겸 인문주의자들은 미(美)를 수학적으로 정의하는 '황금비율'을 찾으려고 애썼다는 점이 흥미롭다. 건축물이나 인체의 균형을 토대로 한 이론은 르네상스 시대에 비율 연구의 중요한 기준이 된다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르네상스 문화의 번영기 유럽에는 여러 가지 질병, 전쟁, 빈곤과 무질서, 알지 못하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만연했다"(256)는 설명이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가 예술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어 있는지 읽어내는 일은 마치 추리 소설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듯한 재미가 있다.

<르네상스 미술>을 통해 다시 한 번 더 확실하게 깨달아지는 명제는 "미술은 역사"라는 것이다. 미술은 단지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단순한 그 무엇이 아니라, 사상과 문화와 시대상이 투영되어 탄생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다. 그림에 눈뜬다는 것은 이전까지 보지 못했던 그 무엇을 보게 되는 것처럼,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신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인간 이성(수학적 지식의 과학)과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르네상스 미술>, 우리가 지나온 역사를 다시 되새기며 그 문화 유산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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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영원한 안식 - 리처드 백스터의
리차드 백스터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평단아가페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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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안식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행복한 상태다"(19).

 
천국을 간절히 사모해본 적이 언제인가? 몇 년 전, 사랑하는 대상을 잃었다. 내가 사랑했던 한 존재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생명을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절실한 질문에 매달리게 되었다.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토록 간절히 천국을 소망해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때부터 천국은 내게 구체적인 실체가 되었다!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비로소 조금 알 듯 했다. 천국에서 다시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면 당장 죽어도 좋겠다고, 아니 오늘이라도 당장 이 세상을 떠나 천국에 가고 싶다는 열망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 불꽃에 휩싸일수록 내 마음에선 회개의 기도가 터져나왔다. '하늘 소망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절실해질수록, '그동안 나는 도대체 무엇을 목표로, 무엇을 소원하며 신앙생활을 해온 것인가' 하는 깨달음이 내 영혼을 울렸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천국과 지옥을 이야기하는 것은 굉장히 촌스러운 일로 비춰진다. 그래서인지 교회가 천국을 잊어가는 듯하다. 강단에서도 천국과 지옥을 설교하는 일이 줄어들고 있으며, 성도들 사이에서도 내가 어렸을 때만큼 천국을 소망하는 찬양들이 많이 불려지지 않는 듯하다. 예배 중에 '천국'에 관한 찬양을 순서에 넣었다가 '장례식 때나 부르는 찬양'이라며 핀잔을 듣기도 했다.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천국은 실재하는가?"를 물으며 시작했던 존 로빈슨의 <신에게 솔직히>만큼이나 강렬하게 다가온다.

리처드 백스터의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먼저 이 책을 추천한 거장들의 이름이 눈에 들어온다. 존 파이퍼, 제임스 패커, C. S. 루이스와 같은 쟁쟁한 거장들이 극찬하고, 마틴 로이드 존스도 백스터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하니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는 책이다. 게다가, 이 책은 1650년에 출판된 이후로 지금까지("천 년이 흘러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뛰어난 영감과 통찰을 주는 고전으로 사랑받고 있다고 한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건강이 악화되어 죽음 앞에 서 있는 한 젊은 목회자가 삶과 죽음을 헤매면서 어느 때보다 절실히 '천국'을 묵상하며 쓴 글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원수를 이기는 것보다 안식을 믿는 일을 훨씬 더 어려워했다"(17)는 첫 장의 가르침에서부터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날카로움이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메시야를 통해 기대했던 것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늘리는 것이었다"는 그의 지적은 현대 사회에도 여전한 현상이며, 어쩌면 이전보다 더욱 뻔뻔해지고 대담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소유를 다 팔아 천국을 사야 한다는 말씀을 알면서도, 우리는 오히려 천국을 팔아 이 땅의 소유를 더욱 늘리기 위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자본주의에 물들고, 자본주의에 타락한 단체가 교회라는 비난이 서슴없이 행해지고 있으니 말이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성도가 끝까지 흔들리지 않고 향해가야 하는 '푯대'가 무엇인지 가르쳐준다. 영원한 안식, 그것이 우리의 삶의 목표이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 결론은 모든 성도가 위로를 받을 근거이며, 그들의 모든 의무와 그들이 당하는 고난이 지향하는 목표다. 또한 모든 약속의 핵심이며 그리스도인의 모든 특권의 요약이다." 그런데 왜 많은 그리스도인이 안식을 즐기지 못하고 있을까? 왜 영원한 안식을 잊은 채, 마치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아갈까? 우리는 왜 그처럼 영광스럽고 놀랍고 소중한 천국을 소홀히 하며 살아갈까? 백스터는 이렇게 가르친다. "하나님에게서 멀어지려는 마음을 꾸짖고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생각에서 돌아서서 영원을 연구하고 내세를 생각하며 천국을 묵상해야 한다. 그것도 자주 깊게 해서 우리의 영혼에 하늘의 즐거움으로 가득 차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시고 약속해주신 영원한 안식을 강렬하게 바라며, 그것에 대한 생각을 즐겨야 한다!

영원한 안식을 소망하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백스터는 "자신의 행복을 위해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택할 때 그는 안식을 얻을 자격을 상실"하게 된다고 경고한다. 하나님을 즐거워하는 것이 성도의 천국이듯, 하나님을 잃는 것은 불신자들의 지옥이다!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복음의 진수를 보여준다. 복음의 선언은 강력하다. 가르침은 순수하고 정결하여 빛이 난다. 모든 것의 동인(動因) 되시는 하나님만 철저히 의지하고 순종하도록 이끌면서, 동시에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으로 경주에서 승리하기까지의 긴장을 팽팽하게 유지시켜준다.

"네가 받은 이 면류관을 보며 자격이 되지 않는 네 자신에게 감사하지 마라. 오직 영원토록 영광 받으실 여호와 하나님과 어린양께 감사하도록 하라"(31). 자격이 되지 않는 내 자신으로 인한 감사가 아니라, 오직 이 모든 것의 동인 되시는 하나님과 어린양으로 인해 감사하라는 말씀에서, 얼마나 철저히 하나님만 바라보아야 하는지 다시 깨닫는다. 동시에 "우리가 주께 드릴 수 있는 것은 그 선물을 감사함으로 받는 것 외에는 없다"는 한 선언에서 우리가 누리는, 그리고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 그 무한한 은혜의 참 행복을 깊이 깊이 새겨준다! 혹시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서도 천국을 한 번도 진지하게 묵상해보지 못했다면, 성도로 살면서도 행복하지 못하다면, 이 책을 읽으며 깊이 묵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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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타고 떠나는 낭만여행 - 아름다운 풍경이 있는 추억 만들기 여행 100
랜덤하우스코리아 편집부 지음, 김미경 사진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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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10개 철도 노선을 중심으로, 여행하기 좋은 곳 100곳!

 
아직 운전면허가 없다. 그래서 차도 없다. 차를 좀 오래타면 멀미도 한다. 태어나 처음 시골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가는 길에 갓난아이가 까무러치는 바람에 부모님도 혼비백산하시고, 할아버지는 아이가 좀 자랄 때까지 오지 말라 하셨단다. 내가 생각해도 참 촌스러운 사람이다. 사람이 촌스러우니 인생도 촌스러운가. 밋밋하고 단조로운 일상이 스스로도 갑갑하여 여행이라는 탈출구 앞을 서성이면서도 한 걸음 떼기가 이렇게 힘이 든다. 기동력도 떨어지지만 겁이 많은 탓이다. 얼굴이 무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남동생의 격려(?)에도 불구하고 낯선 세상은 언제나 두려움이다.

그래서인가.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살 수 없다는 저항이 밀려올 때면, 난 항상 기차여행을 꿈꾼다. 목적지를 향해 가는 버스와 달리 언제라도 내릴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어디라도 닿을 수 있다는 것, 야간 열차를 타면 잠잘 곳을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래서 무박 여행이 가능하다는 것이 돌발 여행에 대한 부담을 줄여준다. 커다란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도 좋고, 경쾌하게 달리는 속도도 좋도, 버스처럼 자주 신호등에 멈춰서지 않아도 되고, 길이 밀릴까 염려할 필요도 없다.

처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 몇 년 동안은 1년에 한 번 있는 휴가 때마다 죽은 듯이 잠만 잤다. 그러던 어느 해, 다시 휴가를 받았고, 미친 듯이 잠을 자다 문득 눈을 떴는데, 이렇게 살다가는 질식해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비명이 소리없는 눈물이 되어 흘렀다. 그날 난 가방을 쌌다. 그리고 청량리로 갔다. 몇 해 전, 정동진을 가기 위해 친구와 나섰다가 청량리역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는 바람에 그냥 돌아와야 했던 날을 기억했다. 해가 뜨는 걸 봐야겠다는 생각에 막차표를 끊었다. 문제는 그날 나의 일탈(?)이 의도치 않게 소문이 났고, 막차 시간 즈음에 친구 둘이 양손에 어린 아이들을 하나씩 데리고 나타나는 바람에 가족여행(!)으로 방향이 바뀌었다는 것! 게다가 부슬부슬 비까지 오는 바람에 고생을 좀 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는지 친구들은 요즘도 그때 이야기를 한다. 그렇게 문득 떠나보자고 말이다. (아이들도 다 커서 이젠 데려가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구슬리며!!!) 



 

 <기차타고 떠나는 낭만여행>, 제목만 들어도, 표지만 보아도 설레이게 하는 무엇이 있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철도 저 끝에 옛사랑이, 새로운 사랑이, 잃어버린 꿈이, 새로운 꿈이 동시에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울렁임이 있다. <기차타고 떠나는 낭만여행>은 "전국 10개 철도 노선"을 따라 "관광지 100곳"을 안내하는 책이다. 험준한 산을 넘기 위해 기차를 기계로 끌어올리는 인클라인 방식이나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스위치백 선로를 타고 달리는 재미가 있는 영동선 열차, 막힘 없이 드넓은 곡창지대를 풍요러베 달리는 호남선, 중, 남부의 대도시를 두로 관통하는 경부선, 터널과 다리가 많은 중앙선, 호남평야를 가로질러 동부 산간지방을 달리는 전라선, 수학여행의 추억이 깃든 동해남부선, 충청도 특유의 소박한 즐거움이 있는 장항선, 충북선, 도시인들(서울)에게 하루의 일탈을 선물하는 경의선, 경춘선, 이렇게 10개의 철도 노선을 따라 추천하는 여행지 100곳의 사진과 여행에 필요한 정보가 간략하게 수록되어 있다. 


 





전문 사진 작가가 담아낸 풍경들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탁 트이게 하는 창량감이 있고, 지금이라도 당장 사진의 풍경 속으로 풍텅 뛰어들고 싶을만큼 어딘지 고즈넉한 매력이 있다. <기차타고 떠나는 낭만여행>의 가장 큰 장점은 사진으로 미리 맛보는 여행지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철도 노선별로 가장 먼저 가보고 싶은 곳, 꼭 가보고 싶은 곳, 선뜻 떠날 수 있겠다 싶은 곳, 부모님과 같이 가면 좋을 곳 등등으로 분류해가며 마음이 저혼자 계획을 세운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기차여행의 낭만"보다 "주변 여행지"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뒤에 부록으로 실린 '한국 철도 노선도'를 제외하면 기차여행의 맛이 잘 살지 않는다. 여행지에 대한 간략한 정보에서도 교통편의 경우, 간혹 내린 기차역이 아닌 곳을 거점으로 교통편이 소개되어 있는 곳은 여행자를 당황스럽게 한다. 떠나지도 않은 기차역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라고나 할까. 동선을 다시 알아봐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기차타고 떠나는 낭만여행>은 우리나라에 이런 곳이 있구나 마음에 새겨두고, 기차여행을 계획하며 주변에 가볼만한 곳이 궁금할 때 참고하면 좋을 듯 싶다. (특히 실용적인) 여행서로 인기와 신뢰를 쌓고 있는 랜덤하우스의 책이니 계속 업-그레이드 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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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회 - 평등이라는 거짓말
대니얼 리그니 지음, 박슬라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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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언제나 공평한 것은 아니라는 이 당연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이 공평하다고 믿는다"(167).

 
월가 점령 시위가 한달째 지속 되는 것에 맞춰, 인터넷을 중심으로 반금융자본 시위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유럽 금융심장부도 시위대에 '점령' 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한국에서도 소수만을 위한 금융자본의 탐욕과 불의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미리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나쁜 사회>의 저자 대니얼 리그니는 "미국의 경우, 불평등이 심화되는 시기에는 언제나 그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나곤 했다. (...) 앞으로 이런 저항은 국경을 넘어 전 세계로 퍼져나가게 될 것이다"(181)라고 전망했다. 로버트 머튼이 명명한 '마태 효과'를 중심으로 사회적 불평등의 역학을 파헤친 저자는 이 책의 의의를 이렇게 요약한다. "마태 효과와 그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광범위하게 퍼진다면, 우리 시대의 사회과학자들과 정책입안자, 그리고 일반 시민들 사이에 보다 진지하고 수준 높은 논의가 진행될 것이며 그에 따라 21세기에 더욱 심화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에 맞서 올바른 선택과 행동을 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바로 지금이 양극화에 대한 진지하고 수준 높은 논의가 진행되어야 할 시점이며, 우리는 지금 올바른 선택과 행동의 기로, 그 한 가운데에 서 있다. 그러니 지금 우리 손에 <나쁜 사회>가 던져졌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저자는 우리가 처하게 되는 사회적 불평등을 이렇게 비유한다. "어떤 사람들은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3루에서 태어난 주제에 자기가 3루타를 쳤다고 생각하며 산다"(25). 얼마 전, '대기업에 들어가는 방법'이라는 풍자 개그 대로, 10시간씩 시급 4320원을 받고 숨만 쉬고 일하는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30세에 손쉽게 상무가 되는 회장 아들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나쁜 사회>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우위는 더 나은 우위를 가져오고 열위는 더 못한 열위를 가져옴으로써,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차이가 계속해서 커질 수밖에 없다.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이러한 현상을 '마태 효과'라고 불렀는데, 마태복음 13장 12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구절을 빌려온 것이다"(13).

머튼의 연구는 '과학 부문의 보상체제'를 연구하는 데 초점이 있었는데, <나쁜 사회>는 누적 우위 연구를 과학사회학 분야로만 제한했던 장벽을 허물고 거의 모든 학문 분야에서 마태 효과를 연구함으로써 새로운 탐구의 장을 열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고 자평한다(45). 저자는 과학과 기술 분야의 마태 효과, 경제 분야의 마태 효과, 정치와 공공정책 분야의 마태 효과, 교육과 문화 분야의 마태 효과를 분석하며 이러한 시도가 "서로 고립되고 단절되어 있었던 연구 분야들을 연결하여 하나의 담론으로 통합하는 과정의 시작점이 될 것"이라고 자신한다.

<나쁜 사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발현되는 마태 효과의 차이점이 아니라 '공통점'에 주목한다(47). 다른 말로 하면, 마태 효과의 역기능에 보다 중점을 두고 불평등 현상이 진행되는 매커니즘과 심화 과정 탐구이다. 저자는 사회적 불평등의 역할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마태 효과'는 반드시 끼워 맞춰야 할 잃어버린 퍼즐 조각이라고 역설하는데, 마태 효과가 폭노하는 불평등이란 일단 존재하게 되면 영속적이고 자가증식적인 특성을 발휘하게 되고, (외부의 힘이 개입하지 않는 이상) 그 결과 가진 자와 덜 가진 자 사이의 격차가 더 커지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문제는 선취가 우위가 자가증식을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쉽게 '복리'에 비유하여 설명하는데, 이러한 자가증식적 고리를 가진 '우위 누적'은 우위가 다시 우위로 이어져 수혜자들의 기회구조를 확장하고, 그럼으로써 더 많이 가진 자들과 더 적게 가진 자들 사이의 격차를 넓히는 원인이다. <나쁜 사회>는 다양한 분야에서 성공은 보다 큰 성공을 불러오고 실패는 더욱 큰 실패로 이어지는 경향을 분석한다. '성공할 기회가 있다는 것'과 '성공할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차이인지 실감나게 배울 수 있다.

한 가지 재밌는 사실은, "이처럼 초기의 조건 자체가 불평등할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특권이 주어진 조건에서 명백한 우위를 선점한 채 시작하는 사람들이 있음에도, 여전히 많은 미국인들은(미국인들의 의식만 이런 것은 아니리라) 자신이 평등한 기회의 땅에서 살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살고 있는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부자는 부지런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왜 그럴까? (미국인의 경우 그들의 오랜 종교적 신념이 그 기저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비밀'이 폭노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투 스트라이크를 맞은 상태로 인생을 시작하는 사람은 이 '불편한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애초에 이렇게 생겨먹은 사회라는 자각은 희망을 거세하고, 희망을 빼앗긴 마음은 힘 없는 분노에 시달려야 할 테니 말이다. 

이러한 '마태 효과'의 역효과(역기능)를 축소하거나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몇 가지 대항력(마태 효과를 억제할 수 있는 힘)을 설명하는데, 평균으로의 회귀, 천장 효과, 바닥 효과, 세대 간 분산, 낙수 효과, 평등주의운동, 정부의 개입, 이타주의와 계몽된 이기주의 등의 개념을 배우며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어 좋았다. <나쁜 사회>는 대중적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이론적 연구서적에 가깝기 때문에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을 때, 그 재미가 더 하리라 생각된다. 한 가지, 계속해서 지워지지 않는 이 찜찜함은, 더 많이 가진 자와 더 적게 가진 자 사이의 격차가 하나의 사회적 현상을 넘어 세계적으로 조직적으로 글로벌하게 진행되고 있는 음모일지 모른다는 불안한 그림자가 스멀스멀 자리를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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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생활의 발견
와타나베 쇼이치 지음, 김욱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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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지금 반복해서 읽고 있는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는가?"(39)
(이 책의 가르침대로 한다면) 이 한 줄의 질문으로 당신의 지적생활을 진단하는 것이 가능하다.

 
'격변', '급변'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을 만큼 자고 일어나면 달라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 "20여 년간 이론 학계의 격찬을 받은 자기계발의 고전"이라는 문구가 흥미롭다. 그것도 사회 변화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자기계발' 분야의 고전이라니! 이 책이 던지는 질문, "지적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도 흥미를 자극했지만, 스스로 품게 된 의문 즉 "자기계발 분야에서도 고전이라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지적생활의 발견>은 '일본인다운' 기질이 엿보인다. 일본인 출판 관계자에게 들었는데, 일본 사람들은 자기계발서와 같은 경우  "~하는 100가지 법칙", "~하는 70가지 방법" 등과 같이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정리한 책을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방식으로 쓰여진 책은 아니지만 <지적생활의 발견>도 구체적인 행동지침을 쉽게 그려낼 수 있을 만큼 목차가 일목요연하다. 저자는 지적정직(知的正直, Intellectual Honesty)이라는 영어 표현을 소개하며 "진리에 충실한 마음"을 설명하는데, 경험에서 우러한 진솔한 교훈을 충실하게 풀어놓은 <지적생활의 발견> 안에 바로 그처럼 '진리에 충실한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지적생활의 발견>은 지적생활에 호기심을 가진 독자들에게 지적생활에 대한 각오를 다지고, 구체적인 첫발을 내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책이다. 서재는 창문 없는 방이 좋다거나, 지적생활을 위해서는 독신으로 사는 것이 괜찮다거나, 지적(두뇌)활동을 위해서는 맥주보다 와인이 좋다는 등 언뜻 보기에 "참 별 것 아닌 것"까지 챙기는 꼼꼼함이 있다. 그 시시콜콜함 때문에 무엇인가 철학적인 사상이나 학문적 체계, 깊이 있는 이론을 찾는 독자에게는 다소 싱거울 수도 있겠다.

<지적생활의 발견>에서 길어올린 가장 신선한 가르침은 "반복읽기가 독서의 질을 높인다"는 것이다. 한 번 본 영화도 두 번 챙겨 보는 일이 없는 나에게는 한 번 읽은 책을 두 번 정독하는 일이 시간 낭비로 느껴졌었다. 시험 공부를 위한 독서가 아니라면,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다 읽은 책을 뒤적이는 일이 있어도 같은 책을 계속 반복해서 읽는 습관 따위는 없었다. 성경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러나 <지적생활의 발견>은 책을 되풀이하여 읽는 것의 중요함을 강조하며, 이렇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반복해서 읽고 있는 책을 몇 권이나 가지고 있는가?(39) 저자는 "나만의 고전을 만들라"고 조언하는데, '나만의 고전'은 반복하여 읽을 때 만들어진다. 즉, 반복하여 읽을 책을 만나고 그 책을 반복하여 읽을 때 나만의 고전이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책을 여러 번 읽으면서 진정한 재미를 느낄 때 독서는 비로소 진정한 취미가 될 수 있다"(37). "책을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책이 곧 나를 말해주는 것이다. 즉, 나만의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곧 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40). 이 책을 읽고 당장 나의 책장부터 다시 정리를 했다. 가장 넓은 칸을 차지하고 있던 소설을 모두 치우고 빈 공간을 확보했다. 반복해서 읽고 싶은 책, 즉 "나만의 고전"으로 책장을 채우고 싶은 조바심으로 마음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정보 수집의 불필요성"에 대한 조언도 공감이 되는 부분이다. 저자는 정보를 수집한다는 명목으로 신문이나 잡지 등을 오려내는 일을 말리며, 단순히 책 내용을 요약하는 정리노트도 만들지 말 것을 당부한다. 이런 작업을 하면 쓸데없이 시간만 많이 잡아먹게 되기 때문이다. 칼 히티나 로저 키싱 같은 도서의 대가들은 신문을 읽는 시간마저도 아까워했다고 하니, 마음이 후련해진다. 책꽂이에 책이 쌓일 때마다, 정리노트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제때 그걸 하지 못하는 게으름에 대한 자책이 마음을 꽤 무겁게 내리눌렀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아이의 공부방보다 부모의 서재가 먼저"라거나, 자신만의 지적공간(서재)을 갖는 것이 삶 전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닫게 된 것도 큰 수확 중의 하나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은 한 시인의 말을 인용하여 지적생활의 고독을 이야기한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그 시대에 살게 되는 것이지만, 고독한 시간을 가질 때는 모든 시대에 사는 것입니다"(204). 지적생활,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매력적인 삶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지난한 "과정" 속에 있으며, 그 지난한 과정 자체가 바로 지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모두가 한 번쯤은 욕심내는 삶이지만 그 참 맛은 먹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세계, 환상이나 허영 따위는 통하지 않는 참 정직한 세계라는 생각이 든다. 

<지적생활의 발견>은 쉽게 읽힌다. 재밌게 읽으면서, 지적인 만족, 책을 읽으며 보내는 삶에 대해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좋았다. 이 책은 지적생활에 대한 '자극제'는 아니어서, 지적생활을 하고 있거나, 관심이나 호기심을 가진 독자에게 더 의미있게 다가갈 듯하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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