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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돌아왔다
티무르 베르메스 지음, 송경은 옮김, 김태권 부록만화 / 마시멜로 / 2014년 10월
평점 :
절판
"뭔가 잘못되었다.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다"(16).
2011년 8월, 베를린 공원 한복판에서 갑자기 눈이 떠졌습니다. 히틀러, 그가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히틀러는 왜 자신이 독일제국 총통 관저도 아니고 지하벙커도 아닌 곳에서 깨어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1945년이 아니라 66년이나 시간이 흐린 2011년이라니! 히틀러는 되살아나지 않는 기억에 매달리는 대신 현실적인 문제에 집중하기로 합니다. "현재에 대해서는 아는 게 하나도 없다. 대체 독일제국의 아군이 누구이고 누구를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지조차 모른다"(25).
"나는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할까. 내겐 군대도 없고, 사령부도 없고, 무장친위대도 없다"(31).
독일은 전쟁에서 졌으며, 독일제국은 일명 독일연방공화국이 되었고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독일연방공화국 총리란 직함을 맡은 여자이고, 독일 영토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쟁터에 흘린 우리 독일 국민의 피와 땀이 이렇게 배반당하고 말다니!"(34). 히틀러는 자신에게 주어진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고, 1919년 전쟁에서 패한 독일이 끝없는 나락을 향해 미끄러져 내려가던 그때 독일 국민의 힘을 한데 모아 다시금 세상을 바꿔놓은 것처럼 고독한 투쟁의 길을 걸으며 독일 국민을 수렁에서 끄집어내기로 결심합니다.
"이 세상에서 주어진 내 운명의 길을 가려면 나를 만천하에 드러낼 획기적인 뭔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도, 아주 급하다"(58).
독일 시민이 보기에 히틀러보다 더 히틀러 같은 히틀러는 곧 방송관계자의 눈에 들어 정치를 풍자하는 TV쇼에 출연하게 되고, 많은 사람이 그의 완벽한 독재자 코스프레(?)에 열광하게 되면서 그는 일약 유튜브 스타로 떠오르게 됩니다.
만일 히틀러가 2015년 서울 한복판에서 깨어난다면?
<그가 돌아왔다>는 66년만에 다시 깨어난 히틀러가 미디어를 통해 다시 대중을 선동하고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까지의 과정을 통해 독일의 정치와 사회를 풍자하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을 해부한 블랙코미디입니다.
예전에,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이런 풍자유머가 유행을 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여 에디슨, 퀴리 부인, 아인슈타인을 다시 태어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한참 활동할 나이가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자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라고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천사가 세기의 과학자들을 찾아보니,
에디슨은 발명 특허를 내려 했지만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않아서 접수가 되지 않았고,
퀴리 부인은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으나 얼굴이 못생겨서 번번이 면접에서 떨어졌으며,
아인슈타인은 수리영역 외에는 점수가 좋지 않아 대학에 떨어져 논문을 발표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책 말미에는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로 유명한 김태권 작가의 스페셜 만화가 한정판 특별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습니다. 히틀러가 베를린이 아닌 서울에서 깨어난다면 그는 어떤 운명에 처하게 될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당연한 말이겟지만, 이 책이 우리 사회를 풍자한 블랙코미디였다면 훨씬 몰입도가 높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가장 재미있었던 장면은 히틀러가 처음 TV를 접하는 장면입니다. 기대감을 가지고 TV를 켠 히들러는 크게 실망합니다. "이렇게 기술이 발달한 시대에 우스꽝스럽게도 요리사가 나오다니! (...) 하지만 그래도 독일 어디에선가 혹은 세계 어디에선가 요리보다는 뭔가 좀 더 의미 있는 일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화면에서는 어떤 부인이 나와 요리사가 칼로 야채를 써는 동작에 대해 굉장하다는 반응을 보이며 대화를 했다. 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독일 국민은 웅대한 가능성을 하늘로부터 선물 받았는데 요리나 하면서 시간을 낭비하다니"(70).
"지도자의 특별한 재능이란 하나하나의 사건을 처리하는 능력이 아니라 빠르게 결단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떠맡는 것"(102)이라는 신념을 가진 히틀러는 정치인으로서 자기 할 일을 분명히 하기 위해 독일 민족을 관찰하기 시작합니다. 공원에서 개똥을 주워 담고 있는 '미친' 여자에 놀라고, 사소한 규칙으로 뒤덮은 독일식 탁상공론이 독일 국민을 곤경에 빠뜨리고 있는 것에 절망하고, 매년 낙태수술이 훗날 동부전선에 투입할 4개 사단 반큼의 병력 부족 현상을 불러올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하고, 정당의 대표라는 놈은 당원들의 고초보다 자기 스포츠카의 도색이 벗겨질까 봐 더 걱정하고 있는 현실에 한탄하고, 국제적 금융 세력의 대자본이란 독으로 독일 땅이 오염되었음에 분노합니다.
"진정으로 집을 짓는 사람은 바로 독일 국민이오"(326-327).
히틀러는 연설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선동의 대가라는 것입니다. 이 책에서도 히틀러의 그러한 면모가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치운동에 앞장섰던 프리모 레비라는 인물은 "질문 없는 국민이 히틀러라는 괴물을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히틀러라는 괴물보다 더 위험한 것은 국가가 바른 방향으로 가는지 아닌지 묻지 않는 국민들이라는 것입니다. 의문을 품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믿고 행동하는 기계적 인간들이 히틀러라는 괴물보다 더 위험다는 것입니다. 다시 돌아온 히틀러는 미디어의 힘에 눈을 뜨면서, 예전처럼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10만 명 이상의 돌격대원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책을 덮으며, 우리가 가장 경계하고, 감시해야 하고, 의문을 가져야 하는 것은 '미디어'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독재자들이 항상 미디어를 장악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것처럼, 국민 모두가 미디어 지킴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