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을 담은 그림 - 지친 당신의 마음속에 걸어놓다
채운 지음 / 청림출판 / 2015년 1월
평점 :
품절


 

 

비관적인 자기계발서?



철학과 그림의 만남이라는 소재부터 기대가 컸습니다. 고고미술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는 동서양의 철학과 역사를 공부하면서 강의하고 글 쓰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저자의 이력이 기대감을 더 높였습니다. 그런데 <철학을 담은 그림>은 철학책도 아니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 그림을 재해석하는 책도 아니고, 오히려 자기계발서처럼 읽힙니다. 세상은 고통스러운 곳이지만 사는 게 고통스럽더라도 위로와 의지처를 찾아 해매지 말고 내가 나를 구원해야 한다는 저자 개인의 철학이 강하게 녹아 있습니다. 어떤 그림을 보아도 모든 결론이 이 한 곳으로 모아지는 듯한 느낌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매일 저렇게 요동치지는 않겠지만, 어쩌면 인생은 길들이 잇는 육지가 아니라 저처럼 출렁거리는 바다일지 모릅니다. 길이 없는 바다에서 내비가 무용하리란 건 말할 필요도 없지요.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해야 할 일은 바람과 물결의 요동을 느끼면서 순간순간 방향을 잡는 일입니다. 가족을 잃고, 사업이 망하고, 관계가 절단 나고, 원인 모를 두려움과 우울함에 허우적거리며, 그렇게 저마다의 고민을 가득 안은 채 우리는 바다 위를 떠돕니다. 이런 고비나 갈림길마다 인생의 내비가 나를 안내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내비는 없습니다. 폭풍우 휘몰아치는 바다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터너처럼 있는 힘을 다해 중심을 잡는 일뿐입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놓이더라도 흔들거리며 중심을 잡는 것, 폭풍우를 응시하는 것, 그게 전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고, 러다 보면 방향감각도 생기겠지요. (...) 우리의 가장 확실한 내비게이션,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119).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책이 <아프니까 청춘이다>와 같은 책처럼 힘찬 응원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전달하는 메시지와는 모순되게 오히려 생에 대한 깊은 비관에 젖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는 것입니다. 위에 인용한 문장을 읽으며 살짝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난파 당한 사람에게 "폭풍우를 열심히 응시하는 것말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방향감각도 생기겠지요"라는 말보다 무책임한 말이 또 있을까요.



"우리 자신과 이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우리는 다시 아이 되기를 시도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가 믿어온 모든 것들을 다시 의심해야 하는 게 아닐까요? 혹 사는 게 고통스럽다면, 위로와 의지처를 찾아 헤맬 일이 아니라 고통에 대한 다른 감각과 사고를 배워야 하는 게 아닐까요?"(9)



<철학을 담은 그림>은 일단 그림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습니다. 익숙하고 유명한 작품도 많지만 가장 강렬했던 건, 프롤로그에 소개된 "고통에 봉헌된 아이"(파울 클레)라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작품으로 강렬하게 치솟았던 흥미는 책을 읽어갈수록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쩌면, 저자의 철학이 제가 가진 인생관 부딪혔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정확히 똑같은 상황에서 정반대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할까요? 저자가 어찌할 수 없는 위기와 깊은 절망의 끝에서 나 아닌 그 누구도 나를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저는 인간은 누구도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저자는 나 자신에 집중하라고 외치는데(스스로 척도가 되라는!), 제 생각은 정반대입니다. 척도(진리)는 주관적인 내 안에서가 아니라 외부에서 와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철학을 강요하는 것 같은 느낌에 거부감이 들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이 책에 대한 실망은 순전히 저 개인의 감상일 뿐입니다.


우리가 믿어온 모든 것들을 다시 의심하라고 하면서도 철학적 사고가 아니라 정답을 주입하는 듯한 논리, 고통에 대한 다른 감각과 사고를 배워야 한다고 하면서도 잔인한 현실을 긍정해야 한다는 강요가 독자가 스스로 성찰하고 사유할 기회를 앗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저자는 글을 쓰면서 길을 알려 줘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말입니다. 저의 이런 비관적인 감상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충분히 흥미로운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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