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에 가면 쿠바가 된다 - 진동선의 포토에세이
진동선 지음 / 비온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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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며칠 아무도 몰래 ’쿠바’에 다녀왔습니다.
쿠바에 가보셨나요?
저는 처음으로 가 본 쿠바였습니다.
제게는 ’쿠바’라는 발음조차도 낯선, 그렇게 전혀 새로운 세상이었습니다.
신천지, 처녀지라고 불러도 좋을 그런 세상이요.
며칠 밤마다 ’쿠바’, ’쿠바’ 부르며 몰두했더니, 
여행이 끝난 후에도 ’쿠바’라는 음절이 머릿속에서 뱅글뱅글 돌아다닙니다.

여행 후기를 남겨야 하는데 아, 내 안에 충만한 이 느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문.득. 이렇게 편지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행복한 꿈을 꾸었던 쿠바에서 편지를 쓰고 싶어졌습니다.
멋을 부린다고 뭐라 하시지는 않겠죠?
이해해주세요. 편지 쓰기 좋은 봄날이잖아요. 

[비온후]를 좋아하세요?
그 맑고 청명한 느낌, 기억나나요?
나를 쿠바로 데려다 준 고마운 출판사의 이름이 [비온후]입니다.
진동선의 포토에세이라고 되어 있는 [쿠바에 가면 쿠바가 된다]가 딱 그 느낌입니다.
비온후의 느낌이요.
나는 햇살이 쏟아지는 거리에 있었고,
하늘과 바다의 경계를 찾을 수 없는 부두에 있었고,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사람들과 자전거를 타고 가는 형제와 울고 있는 아이를 만났고,
빗방울 보았고, 바람을 맞았고, 불빛을 보았고,
파스텔의 집과 코발트 블루, 노란색, 장미색 자동차를 보았는데,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기억됩니다. 
푸른 새벽 차가운 바다의 색깔로 말입니다.

쿠바에 대한 푸른 새벽의 기억은 첫 장의 이야기가 너무 강렬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쿠바에 대한 설레임으로 첫 발을 딛자마자 내가 맞닥뜨린 풍경은
푸른 새벽, 공중전화기에 대고 하염없이 울고 있는 한 중년 여인이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저자는 그 푸른 필터를 통해 
새벽 강에 눈물짓던 엄마의 뒷모습을 들려주었습니다.
친정에서 쫓겨와 신작로에서 흐느껴 울던 누나의 눈물을 들려주었습니다.

쿠바가 차가운 바다의 색으로 기억되는 것은 
블랙과 붉은 기운의 체 게바라보다, 
바다색을 닮은 헤밍웨이의 파란 이불 때문인 것 같습니다.
헤밍웨이의 삶의 흔적 가운데 내가 오래도록 자리를 떠나지 못했던 곳은
서재도, 그 유명하다는 요트도, ’노인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바닷가도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붉은 벽돌로 묘를 쓴 4개의 무덤 앞이었습니다.
헤밍웨이가 생전에 키웠다는 애완용 고양이들의 묘지.
나는 잠깐 울었던 것 같습니다.

내 기억에 쿠바에서 만난 사람들은 어른이든 아이이든, 남자이든 여자이든 
거의 소매 없는 티를 입거나, 웃통을 벗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모습이 우리의 여름처럼 습하고 끈끈한 느낌이 아니라,
시원하고 차가운 맥주를 막 따라낸 생맥주 잔 같기도 하고,
비 개인 오후의 서늘함 같기도 한 그런 차가움으로 남습니다.

어차피 다 말할 수 없고, 고스란히 전달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갑자기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내가 전하고 싶은 느낌이,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 두려운 마음이 드네요.

사각 프레임에 담긴 진실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담아낼 수 있다는 위험한 진실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포착된 순간은 때로 작가의 연출이기도 합니다.
보여주고 싶은 것만, 아름다운 것만 보았기 때문에 
내가 알게 된 쿠바는 실제 쿠바와 많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작가가 이끄는 대로,
자유로운 그들의 사랑과, 
꿈을 꾸는 쿠바 사람들과 낡은 시간의 삶과, 
세엔푸에코스의 비와 눈물로 쿠바를 기억하고 싶어집니다.
쿠바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이 좋습니다.
그가 말하는 쿠바가 되고 싶습니다.

다음엔 쿠바에 함께 갈 친구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그 거리에서 ’브이’(V)를 함께 그리며 밝게 웃는 나를 담은, 그리고 우리를 담은 
사진 한 장 가져보고 싶습니다.

소박한 삶을 사랑하고,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당신이라면,
(내가 좋았던 동물원의 노래를 담아)
이 예쁜 책을 선물 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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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같은 신화 - 그림에 깃든 신화의 꿈
황경신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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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깃든 신화의 꿈'이라는 부제를 가진 [그림 같은 신화]는
신화를 주제로 한 명화를 중심으로, 다시 신화의 스토리를 역(逆)으로 엮어냈다.

[그림 같은 신화]는 '사랑', '욕망', '슬픔', '외로움'이라는 네 가지 테마로
신화의 스토리를 재구성하는데, 나에게는 이 네 주제가 모두 '사랑'으로 읽힌다.
욕망도, 슬픔도, 외로움도 결국 사랑이 잉태한 결과물이다.
사랑이 욕망을 낳고, 사랑이 슬픔을 낳고, 사랑이 외로움도 낳았다.

아, 그런데 어쩌면 우리의 사랑은 아직도 이렇게 신화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지.
신화가 탄생한 지가 언제인데 
지금 우리가 하는 사랑과 신화의 사랑이 이렇게 같을 수가 있을까.
그것이 신화가 가진 위력일까?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어떤 사랑의 유형에 대입해도 해석이 가능한 것 말이다.

[그림 같은 신화]가 보여주는 사랑을 읽으면, 우리의 사랑은 전혀 진화하지 않았다.
신화는 사랑의 속성과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우리의 사랑은 그 신화 속의 사랑을 복원하는 것 같다.
첫 장에 등장하는 신화부터가 그렇다.
"테세우스를 사랑한 아리아드네."
그녀는 조국과 아버지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테세우스는 도와준 뒤, 함께 배를 타고 떠난다.
그런데 두 사람을 태운 배가 낙소스 섬에 잠시 머물게 되었 때,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가 잠든 사이에 그녀를 섬에 홀로 남겨둔 채, 배를 출항시켜버린다.

비겁하게 그녀가 잠든 사이에 아무 이유도, 설명도 없이 말이다.
작가는 "사랑은 예기치 않은 순간 기척도 없이 떠나간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이렇게 나무란다.
테세우스가 아리아드네를 정말 사랑했다면, 최소한의 책임을 졌어야 한다고.

내가 한참 사랑을 꿈꿀 나이에 사랑을 믿지 않게 된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내 친구들의 사랑이 상대방의 일방적인 변심으로 끝나버렸을 때,
나는 위로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너무나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그들의 사랑에 분노했었다.
최소한 마음의 정리를 할 시간은 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대신 따지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곧 알아버렸다.
에로스의 화살에 맞은 우리의 사랑은 원래가 그렇게 충동적이고,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것이다.
어제까지는 열렬하게 사랑했지만,
오늘 내 마음이 사랑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으로, 정말 그것으로 사랑은 끝인 것이다!

에로스의 사랑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테마 3), 외롭게 하는(테마 4) 이유는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테마 2)의 이중성 때문이다.
사랑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자주 왜곡되고 변형된다.
채워지지 않는 소유욕의 욕망은 
사랑하는 이를 영원한 잠에 빠뜨려버리는 극도의 이기심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엔디미온),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는 질투의 불길로 타오르기도 하고(프로크리스),
거품처럼 허망하게 끝나버리기도 한다(아프로디테).

그래서 디프네는 아폴론이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그가 소유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의 변신을 소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소유하게 되는 그 순간, 그 사랑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그녀는 월계수가 되었고, 아폴론은 시인과 승리자들에게 월계관을 주는 것으로
디프네를 영원히 기억한다.

"조지프 캠벨이 말한 대로, 신화는 '이 세상의 꿈'이고 
'인간의 거대한 문제를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원형적인 꿈'이에요."(p. 145)


[그림 같은 신화]를 한마디로 설명해보라고 한다면,
성경의 한 구절을 빌려
"죽음 같이 강한 사랑과, 음부 같이 잔혹한 투기와, 불 같이 일어나는 질투"를 담은
사랑이야기라고 하고 싶다.

시지푸스의 신화이야기를 들은 뒤로, '신화'에 관한 정말 여러 권의 책을 탐독했는데,
명화를 재해석한 [그림 같은 신화] 이야기가 가장 재밌었고,
그 여운도 가장 강렬하게 마음에 남았음을 널리 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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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델피누스 - 아틀란티스의 돌고래 인간
마를리제 아롤드 지음, 김태성 옮김 / 지양어린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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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에 스며드는 ’루저(loser) 문화’]라는 제목의 신문 기사를 읽었다.
대중문화에도 패배자의 정서를 담은 ’루저(loser) 문화’가 조금씩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루저(loser) 문화’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소수의 승자와 다수의 패자를 양산하는 사회 분위기와,
그 패배자 정서가 젊은이들 사이에 빠르게 스며들고 있다는 것이다.

신문에서는 ’인디계의 서태지’라고 불리며 주목받고 있는 가수 ’장기하’의 노래를 주목한다.
그의 노래가 "현실이 힘들더라도 패자로 인생을 포기하지 말고 
노는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장기하는 
미디어가 20대의 정서를 항상 즐겁게 묘사하는 데 대해 반감을 표시하며,
"우리 팀은 승자의 느낌도 아니고, 패자도 아니다.
승패가 결정 안 된 사람의 불안과 허무라고 본다"고 말했다고 한다.

[호모 델피누스]라는 성장기 아이들을 위한 성장소설을 읽고,
내가 이렇게 거창한 문제의식으로 글을 시작하는 것은 
’88만 원 시대’라고 불리우는 20대의 패배자 정서를 염려함이다.


스펙(specification)에 대한 압박감에 시달리는 20대의 스트레스를 아는가?
스펙(specification)은 원래 제품의 사양을 뜻하는 용어인데,
20대들 사이에서는 자신의 능력을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평가지수로 통한다고 한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토익점수, 전공 관련 자격증, 인턴 경력 등
자신의 스펙을 더 올려야 한다는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 어느 대학의 교수님께 들었던 말이 기억난다.
과제물을 내주면, 과제수행에 필요한 주제 등과 같은 핵심적인 질문이 아니라,
주변적인 질문을 시시콜콜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글자 포인트, 서체, 용지 여백, 줄간격’ 등을 열심히 물어보는 것이다.
이런 것들을 일일이 지정해주지 않고 자유를 주면 오히려 어리둥절해 한다고.
교수님은 이것이 어릴 때부터 숙제를 대신해주는 
엄마들의 교육 때문에 생긴 습관이라고 분석했다.
청소년기의 아이를 둔 많은 엄마의 고민은 자녀가 컴퓨터에 너무 빠져사는 것이라고 한다.

상상력과 모험심, 그리고 도전정신을 잃어버리고, 경쟁에만 내몰린 채 실내에서 지쳐가는 아이들.


[호모 델피누스]를 읽으며, 내가 계속 생각한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읽히고,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꿈을 심어줘야 하는가?

[호모 델피누스]는 어른 세대인 우리에게는 어릴 때부터 익숙했던 ’모험’ 이야기이다.
’호모 델리누스’는 주문을 외우면 돌고래로 변신을 했다가,
다시 주문을 외우면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돌고래 인간을 가리킨다.
이야기 안에서는 이들을 ’바다 산책자’라고 부른다.
[호모 델피누스]는 바로 이 바다 산책자인 ’마리오’라는 소년이 엄마를 위험에서 구하기 위해
역시 바다 산책자인 소녀 ’세일라’의 도움을 받으며 모험을 떠나게 되는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시작은 추리소설의 방식으로 전개된다.
어느날, 갑자기 실종되는 사람들, 그리고 걸려오는 정체 모를 협박 전화.
그 안에서 정의롭고 용감한 두 소년과 소녀가,
아틀란티스 제국을 건설하려는 악당 ’차이돈’과 맞서는 신나는 모험 여행이다.
아이들 소설답게, 선과 악의 대결 구도가 명확하다.
[호모 델피누스]는 돌고래의 습성과 칠대양 자연환경에 대해 
자연스럽게 학습이 되도록 유도하며, 무궁한 상상의 나라 해양세계로 아이들을 안내한다.

상상력을 자극하며, 도전과 용기를 심어주는 ’모험담’이라는 점에서는
다른 성장소설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책의 결론이다.
(* 이후 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호모 델피누스]의 모험담은 의외의 결론으로 끝이 난다.
두 주인공의 용감한 모험 여행이 끝나고,
마리오는 위험에 빠진 엄마를 구출해내고, 세일라는 실종되었던 아버지를 찾는다.

그런데 마리오는 엄마와 함께 돌고래 세상에서 살아가기로 선택을 하고,
세일라는 실종되었던 아빠와 함께 엄마가 있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온다.
저자는 왜 두 주인공의 각기 다른 선택으로 이야기를 결론 맺었을까?

열심히 생각해본 끝에 나는 의미심장한 해석을 하나 얻었다.
저자가 결론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교훈은,
혹시 아이들에게 스스로 인생의 방향을 결정해야 하는 것과,
 그 결정에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자 함이 아니었을까?

주인공들의 여행은 마법의 돌을 찾고, 악당을 무찌른 것으로 끝나는 꿈이 아니다.
그들의 꿈은 이제부터이다.
그들이 모험을 통해 찾은 것은 보물도 아니고, 신비한 능력이나, 절대 권력이 아니다.
아틀란스 제국과 같은 신천지도 아니다.
그들은 지혜와 용기로 문제를 풀어내고, 스스로 그들이 살아갈 세상을 선택한다.
그리고 인생의 방향을 선택할 때, 그들이 보여준 기준은 바로 ’가족’이고, ’가족애’이다.
더구나 그들은 부모님의 희생이나 도움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지혜와 도전으로 엄마와 아빠를 구출해내지 않았는가!

패배자 의식이 우리 사회와 젊은이들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것은 일반적인 젊은이의 불안과 허무와는 구별되는 정서이다.
자녀에게 무엇을 읽히고, 가르쳐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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