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구약편 1부 - 주전 3300~1050년, 고대 근동~사사기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 1
류모세 지음 / 두란노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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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경은 구약을 역사서(17권), 시가서(5권), 예언서(17권) 순으로 배열하고 있다. 이것은 70인역을 따른 것으로, 구약성경 목록을 문학 양식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성경을 몇 번씩 통독한 사람들도 구약 역사를 이야기(줄거리)로 꿰보라고 하면 잘 하지 못한다. 개론적인 지식이 없이는 역사서도 이야기로 읽기가 힘들고, 특히 예언서의 경우는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글로 써있는 책을 읽는데도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알 수가 없다는 한탄을 자주 듣는다. 다시 말해, 단순한 통독만으로는 하나의 이야기로 통합하기 어려운 책이 바로 성경이다. 그러다 보니 신앙생활을 오래 해도 성경은 정복하기 어려운 책으로 남아 있다.

 

이러한 난제를 해결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성경 파노라마', '성경 탐구 40일', '성경의 맥 잡기', '성경 1독 학교'(어, 성경이 읽어지네)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도되고 있다. 모든 프로그램(교재)이 저마다의 장단점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번에 류모세 선교사님이 집필한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은 이 모든 프로그램의 장점을 모은 책이 아닌가 생각된다.

 

성경을 하나의 이야기로, 대하 드라마로 읽자는 것이다. 성경에는 지루할 만큼 지명과 인명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성경이 '역사적' 사실임을 강력히 증명한다. 그러나 읽는 우리에게는 이것만큼 넘긴 힘든 벽도 없다. 이스라엘 땅에 대한 그림이 전혀 없는 가운데 무수히 등장하는 지명들은 뜻을 알 수 없는 기호같고, 일반 역사와 연결되지 않는 성경의 역사는 '이스라엘'을 하나의 유형 국가로 이해하기 보다 영적인 개념의 나라로 바꿔버린다. 이런 장벽에 맞서, 전체 3권으로 이루어져 있는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은 역사 + 지리 + 성경을 하나로 통합하여 성경을 입체적으로 읽어낸다. 그동안 류모세 선교사님이 집필한 '열린다 성경' 시리즈도 그러했지만, 책을 읽다 보면 앞 못보던 사람이 갑자기 눈을 번쩍 뜨게 되는 것과 같은 쾌감이 느껴진다. 뿌옇던 머릿속이 환해지고, 성경 이야기들이 하나로 꿰어지며 입체적으로 살아나는 경험, 직접 체험해보시라!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은 한국 교계를 이끌어가는 굵직한 분들이 추천을 하는 책이다. 그중에서도 '성경 1독 학교'로 유명한 이애실 사모님의 추천사가 마음에 깊은 감동을 주었다. "이런 좋은 책이 자꾸 나오는 것을 보니 진리로 승부하는 강한 계절이 도래할 것 같다"는 한마디가 마치 계시처럼 마음에 울리고 있다.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게으르지 말자! 성경을 하나의 이야기로 읽어내는데 가장 강력한 바람을 일으키고, 큰 영향력을 끼친 책이 이애실 사모님의 <어, 성경이 읽어지네>가 아닐까 한다. 이 프로그램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류모세 선교사님의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은 그것을 보완하고, 확장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애실 사모님의 것은 '강의'를 직접 들을 때 더 생생하게 전달된다고 한다면, 류모세 선교사님의 것은 책을 읽으며 공부하기에 좋은 교재이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가 느끼는 생소함을 무엇보다 지리적 감각의 결여에서 기인한다. (...) 성경을 친근하고 가깝게 읽으려면 반드시 성서 리지를 정복해야 한다"(33-34).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은 먼저 이스라엘 지도부터 정복한다. 지도의 터 위에 성경을 읽어나가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성경의 이야기들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펼쳐지며, 보다 생생하게 전달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을 읽다 보면, 다소 복잡해 보이는 지도가 차근 차근 머릿속에 그려진다. 지도 위의 지명과 조각 조각 알고 있는 성경 지식이 하나로 연결되면 전에는 미쳐 깨닫지 못했던 영적인 교훈이 저절로 깨달아지는 역사가 일어난다. 지도를 공부해보면, "그 단순한 지명에 이렇게 깊은 뜻이 있었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나오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 드라마로 읽는 성경>은 먼저 성경 역사가 펼쳐지는 동시대의 일반 역사부터 탐구해나간다. 이러한 작업은 성경의 역사를 더욱 실제적인 것으로 인식하게 도와주는데, 성경을 공부하면서 더불어 공부하게 되는 인류 일반 역사(세계사)도 새로운 각도에서 다가온다. 세계사 시간이 그렇게 지루하기만 했는데, 성경 역사와 연결되니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다.

 

 

 

역사 + 지리 + 성경을 하나로 통합하여 성경을 읽어내는 작업이 이토록 재미 있고, 흥미진진해지는 것은, 무엇보다 성경에 담긴 깊은 진리가 비로소 눈에 들어오는 "깨달음"의 기쁨에 있을 것이다. 하나 하나 깨달아질 때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3개 대륙, 즉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가 교차하는 대륙의 간지"라는 이스라엘 땅에서 펼쳐진 하나님의 나라의 역사가, 그 비밀의 문이 비로소 열리는 듯한 흥분을 느끼게 된다. 부르심을 받는 아브람(아브라함)의 경우를 보자. 아브람이 떠났던 갈대아 우르는 "수메르인의 마지막 부흥기인 우르 3왕조의 수도인 우르"였을 것이라고 한다. 수메르 문명이 꽃피던 우르, 그곳의 "예술가들은 재능이 있었고, 건축가는 능숙했으며, 사업 또한 왕성했다"(126). 아브람은 이렇게 "문화적 수준이 높은 곳에서 훨씬 낮은 곳으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삶의 터전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지시할 땅으로 가라는 명령은 "결코 쉽지 않은 결단력을 요구했을 것이다." 지리와 역사 안에 성경의 무궁한 진리가 숨겨져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성경 이야기를 도표로 정리해주는 것도 이 책의 장점이다. 성경 이야기를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다. 물론, 암기하기도 훨씬 쉽다! 내용을 다시 확인해야 할 때, 보충 공부를 할 때, 지도와 도표를 통해 내용을 빠르게 정리할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매 단원마다 "단원 평가 문제"가 있다. 공부한 내용을 얼마나 숙지했는지 정리해볼 수 있도록 도와주며, 놓치지 말아야 할 핵심이 무엇인지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다.

 

성경은 읽기 어려운 책이라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전세계적으로 우리나라 성도만큼 성경을 사랑하는 민족도 없다고 하는데, 좋은 교재를 통해 성경 말씀을 더욱 풍성히 알게 하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다시 한 번 강력한 말씀의 부흥이 이 땅에 일어나기를 기도하며, 말씀을 아는 일에 게으르지 말자고, 이제 핑계할 수 없다고 나 스스로에게도 몇 번을 말해본다. 성경만큼 인류 역사, 모든 분야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책도 없다고 한다. 신앙이 아니라 '교양'을 위해서라도 성경을 읽어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길잡이 삼으라고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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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강해 - 오스왈드 챔버스의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21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스데반 황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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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인 성경 읽기!

 

성경 읽기에도 유행이 있는 듯하다. 사회학적 성경 읽기, 역사적 성경 읽기, 경영학적 성경 읽기, 심리학적 성경 읽기, 교육학적 성경 읽기 등등. 인간 이성이 발달하고, 학문이 발달하고, 학문 간 통섭이 일어나면서 성경도 새로운 시각, 새로운 각도에서 읽고 해석하려는 움직이 있다. 그런 성경 읽기가 새로운 인사이트를 제공하며,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기도 한다.

 

그러나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를 읽으며, 그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 것은 바로 '영적인 성경 읽기'이다. 새로운 것, 독특한 것, 심오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의 심성이 어느새 성경을 읽는 영적인 관점을 낡은 것으로 만들어버렸고, 그것을 등한히 여기게 만들어버렸구나 하는 자각이 생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창세기 강해>는 성경의 영적 주해라고 이름붙이고 싶다. 창세기 전체를 다루고 있지만 '아브라함의 생애'를 읽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지금 이 세대 속에서 믿음의 길을 걷고자 하는 주의 백성들에게, 아브라함의 삶은 믿음의 선구자 역할"을 한다.

 

"믿음으로 걷는 삶", 새로울 것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주제이지만, 신앙생활에 있어서 이 주제만큼 근본적인 질문도 없을 것이다. 소위 '믿는 자'를 가장 괴롭히는 질문이기도 하니 말이다. 하나님을 섬기고(예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은 '믿음'을 필요로 한다. 자연의 세계에 살지만 우리는 은혜(믿음)의 세계에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

 

창조와 타락,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이라는 큰 주제로 이끌어지는 <창세기 강해>를 읽으며, 나에게 가장 큰 도전과 깨달음, 그리고 고민을 던져준 주제를 한마디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비전과 현실 연결하기'라고 정리하고 싶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에게 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삶 속에 나타내는 것'이라 이해된다. 그리고 이때 믿는 자들이 빠질 수 있는 함정은 이것이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말씀을 하신 하나님께 집중하기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에 광적으로 집중하는 위험이 있다"(53).

 

창세기를 통해, 그리고 아브라함의 생애를 통해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진리 한 가지는 이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인간적으로 열광하는 자들마다 언제나 비참한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 영적 진리를 설명하기 위해 예수님의 생애를 모범으로 제시한다. "우리 주 예수님의 삶 가운데 놀라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라고 하신 일 외에는 뭔가 더 아버지의 뜻을 이루겠노라고 먼저 앞서지 않았다는 점이다"(89). 이 세상의 주세주였으며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었는데 주님은 30년을 평범하게 사셨음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앞서가지 않으셨다. "우리 주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을 보이는 것이었지 그 뜻을 '행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비전을 품은 자에게는 열정이 생기고, 열심으로 응답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우리는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경고를 들어야 한다. "유혹은 이기적인 욕망으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는 정열적인 욕구로부터 온다"(139). 하나님의 비전을 보게 되면, 우리는 열광적으로 일하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되는데, 이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기다리라.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면 주님께서는 주께서 친히 주신 비전이 이루어지는 자리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137).

 

 

"당신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가?" 그렇다면 아무것도 차지 말라. 바보스러울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라"(145).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죄인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열심을 품은 자들이 문제였던 것처럼,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의 교훈은 주를 위해 열심을 내려는 자들에게 때로는 예상치 못한 채찍처럼 내리치는 매서움이 있다. 그 매서움은 우리가 내는 열심에 걸림돌이 되기도 하고, 무거운 짐처럼 마음을 내리누르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 가르침이 깊이 내 영혼을 파고들면 정말이지 처절하리만치 깨지고 깨뜨려지는 그 절망 속에서 이전에는 맛보지 못한 평안와 참된 자유가 빛처럼 우리의 모든 것을 감싸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믿음은 오직 살아 있는 순종을 통하여 조용히 역사한다." "믿음의 자세는 우리가 순종하면 어떤 일이 생길지에 대해 관계하지 않는다." 우리가 할 일은 정말 바보스러울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말씀을 붙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말씀 안에 있는 생명이 우리를 붙든다"(17).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우리는 현실적으로 완벽한 삶이 아니라 철저하게 현실적인 삶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철저하게 현실적인 삶'은 어느 새 우리에게 은혜의 삶과 반대말이 되어가고 있다. '실제'하시는 하나님을 현실 속에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리라. "하나님은 현실이 아니라 실제이시다." '현실'이라는 명분으로 자꾸만 말씀과 타협하려고 하는 나에게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다시 한 번 단호하게 말씀한다. 믿음으로 걷는 삶, 그것은 어떤 타협도 허락하지 않는 철저한 순종의 삶이며, 그것이 우리가 싸워야 할 믿음의 싸움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경쟁 시스템에 의해 문명을 이루어간다. 우리의 머릿속에 경쟁과 투쟁은 문명의 삶을 계속 이루어가는 데 필수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 속에 있는 자들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거칠고 우스꽝스럽게 들린다. 예를 들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지키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지키려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임에 틀림없다. 누가 그 어리석은 자인가? 하늘로부터 거듭나 감히 하나님의 교훈대로 살아가는 자이다"(36).

 

<창세기 강해>는 쉽지 않다. 철학이 아니지만 어떤 철학책보다 날카로우며, 현대적이지 않지만 어떤 가르침보다 실제적이고, 유행을 따르지는 않지만 진리는 영원하다는 명제를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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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의 예수 평전
폴 존슨 지음, 이종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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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나님이면서 인간인 분이 이 지상에 나타났다는 독특한 사건은 그리스도교 본질이다.

이 특이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21)

 

 

예수를 예배하는 사람들은 이 땅에 발 딛고 살았던 그의 '인간적인 모습'도 신성시 하여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를 종교가 만들어낸 허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가 역사적 실제라는 사실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예수를 한 사람의 성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신성을 제거하고 그의 가르침을 윤리적 차원에서 생각하고 싶어 한다. 편견의 눈으로 "예수를 읽는 것"이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을 읽으면서 '신선하다'는 느낌이 압도적이었던 것은 내게도 그런 편견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오랜 신앙생활 동안 예수를 '교리적'으로 읽는 습관이 어느 새 자리하고 있었나 보다.

 

어릴 때 위인전 읽기를 끝으로 '평전' 읽기를 즐겨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 예수의 평전이라는 책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저자 폴 존슨이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는 역사가요, 저널리스트이며, 저술가라는 것에 믿음이 갔는데, 무엇보다 역사학을 전공한 저술가라는 사실이 더욱 좋았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의 역시 세계적인 명성가의 저력을 확인하게 해주었다. 믿을 만한 자료와 증거를 근거로 한 설득력 있는 해석이 역사에 실존했던 예수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되살리고 있다. 소설을 읽는 듯한 재미를 주면서도, 전문적인 학술서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마치 예수님이 심오한 진리를 "누구도" 이해할 수 있도록 쉽게 풀이해주신 것처럼, 높은 수준의 이야기를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탁월한 교사같다.

 

다만,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이고, 신비적이면서도 실제인 예수를 한 권의 책으로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 성경 읽기를 거대한 건물으로 들어가는 출입구에 비유하신 분이 있다. 성경을 읽어내는 접근 방법이 다양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관점으로만 예수를 다 이해했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신학적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 이 책에 실린 몇 가지 해석들도 학술적인 논쟁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고 싶다. 그럼에도,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이렇게도 예수를 읽을 수 있구나" 하는 신선함이 우리의 굳은 생각(교리적 도그마)을 환기시켜 주고, 신뢰할 만한 자료를 근거로 2000년 전 유대 땅에 발 딛고 살았던 예수를 생생하게, 그리고 아주 매력적인 인물로 되살려 냈다는 점에서 이 책의 일독을 꼭 권하고 싶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4복음서의 기록에 의존하고 있는데, 그는 먼저 예수의 행적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 4복음서의 기록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자료인지 밝힌다. 그러면서 "예수의 생애를 집필할 때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자료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다는 것이며, 텍스트에 나와 있는 말씀과 에피소드의 온전한 의미에 도달하기가 엄청 까다롭다는 것"을 이해시킨다.

 

 

"역사상 이처럼 오랜 세월 동안 이처럼 다양한 문제들에서

이처럼 강력한 영향을 끼친 다른 인물은 찾아보기 어렵다"(201).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내게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예수'처럼 짧은 전기를 남긴 위인도 없는데, 그 짧은 전기가 인류 역사에 어떠한 빛을 던져 주었고,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생각할수록 벅차 오르는 감동이 있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은 예수가 탄생한 세계는 가혹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이고, 불안정한 세계였다는 시대적 배경을 시작으로 그의 생애를 주제별로 탐구해 나가며, 입체적으로 요약한다.

 

그의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예수가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 아니라, "성공한 목수"의 아들이었다는 주장이다. 요셉이 목수로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의 가족은 비교적 풍요롭게 살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가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이라고 확신할 수 있다. 사실, 사정이 허락하는 한 모든 똑똑한 유대인 아이들은 훌륭한 교육을 받았으며 예수는 안락한 가정 출신이었다"(47). 저자는 성경이 말하고 있지 않은 예수의 생애를 "예수의 잃어버린 18년"이라고 표현하며, 그 잃어버린 18년을 상당히 설득력 있게 재구성한다. 저자의 해석을 받아들인다면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의 이미지와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도 일부분 수정되어야 할 듯하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을 읽으며, 가장 궁금했던 장면은 예수가 그의 제자들을 부르는 장면이었다. 4복음서가 다르게 증거하고 있는 이 부분에서 저자는 어떤 결론을 얻었을지가 궁금했다. 저자의 해석은 내가 받아들이고 있는 주장과 다르지 않았다. 간단히 기술되고 있지만, 저자는 2번의 부르심이 있다고 본다. 첫 번째 부르심에서 4명의 제자들(시몬, 안드레아, 세베대오의 두 아들)이 파트타임 사역자로 일했다면, 두 번째 부르심은 종일 사역자로 부르신 것으로 해석된다. "안드레아가 세례자의 제자였다는 사실"은, "이 네 명의 어부들이 이미 종교적 부흥 사업에 관심이 많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안드레아는 세례자 요한을 짬짬이 따라다니는 사람이었뿐이다."  "예수는 그 네 명에게 하루 종일 따라 다니라고 명했고 그들은 복종했다"(69). 이 외에도 저자는 4복음서에 각각 다르게 기술된 증언의 차이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본질에 있어서는 차이가 없다는 것이 역사 전문가인 그의 결론이다.

 

<폴 존슨의 예수 평전>이 보여주는 예수는, "사회 각계각층의 남녀노소와 자연스럽게 어울렸으며, 기도할 때를 제외하고는 혼자 있는 것을 피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연회를 갖는 것을 좋아했고 늘 새로운 친구와 동무를 찾아"다니는 인물이다. 예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은 "사람들을 독특한 개인으로 사랑했다는 것"이며,열등한 존재, 일종의 재산으로 취급한 여성을 "남성과 동일한 지위에 올려놓으려 애쓴 세계 역사상 최초의 교사"였다. 또 하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그의 치유 기적이 많은 어린아이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173).

 

동시에 예수는 "유대의 종교적 체제를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바꾸어놓은 혁명가"였으며, 하나님을 "저 먼 산 위에 있는 보이지 않는 신성이 아니라, 단란한 가정의 아버지"로 처음 소개한 인물이다. "예수 가르침의 본질은 하나 됨의 추구"였는데, 그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새로운 것, 다시 말해 "구약성경이나 근동의 다른 지혜 문서에서도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없는 가르침"이었다. "인류 전체를 사랑한다는 사상은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생각하지 못한 사상이었다." 특히 요한복음에 기록된 '진리'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은 "아주 심오한 철학적 명제이지만, 동시에 시적인 주장이기 때문에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도 직감적으로 이해하는 명제이다"(126).

 

 

"그가 말한 것은 언제나 진리인데,

이승의 시간 속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영원 속에서도 그러하다.

그것은 서기 1세기 전반기에

로마제국의 조그마한 변방 속주에서 사람들 앞에 제시되었으나,

그 진리는 역사와 지리를 바꾸어놓으며 모든 시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다"(177).

 

자기(자아)에 대한 사랑을 인류 전체에 대한 사랑으로 바꾸어놓으려는 예수의 새로운 생활 방식은 오늘날 우리의 세계에서도 하나의 거대한 혁명이며 역설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늘날 '예수 운동은 실패한 역사'라고 결론짓는 사람들이 있다.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따라 사는 제자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나 G. K. 체스터튼의 말을 빌어 폴 존슨도 말하듯이, "예수가 남겨놓은 그리스도교는 시도해본 결과 실패로 끝난 종교"가 아니라, "너무 어렵다고 판정되어 시도조차 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다." 예수님의 가르침(진리)은 어떤 규칙으로 따를 수 있는 생활 지침이 아니라, "내면의 강력한 충동을 필요로 한다." 마음이 변화를 받지 않으면 결코 따를 수 없는 생활 방식인 것이다.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내려오신 하나님으로서의 예수, 그리고 우리 죄의 짐을 지고 십자가에서 모진 고통을 당하신 예수의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춰 서게 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는가? 오른뺨을 치면 왼뺨을 돌려대며, 속옷을 가지고자 하면 겉옷까지 벗어주며,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면 십 리를 동행하고, 내 것을 달라 하면 손해볼 줄 알면서도 거저 주는 삶. 다시 한 번 내 안에도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자 하는 강력한 충동이 일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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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를 지배한 여인들 - 천하는 황제가 다스리고, 황제는 여인이 지배한다
시앙쓰 지음, 강성애 옮김 / 미다스북스 / 2012년 2월
평점 :
품절


 

 

"황실의 은밀한 성 이야기는 권력의 속성은 물론이거니와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면 인간의 내면적 본성이나 본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6-7).

 

 

인간은 제 입으로 자기들의 세상이 약육강식의 세계라고 한다. 인류 문명이 시작된 이래, 이 세상의 통치자는 힘 있는 사람이었고, 힘 있는 자들은 천하통일이라는 제국의 꿈을 가지고 역사를 이끌어나갔다. 중국인들은 자신의 역사를 '제국'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 '황제'가 있었고, 그 황제의 권력은 신과 같은 권능의 자리였다고. 그런데 천하를 호령하는 그 황제를 '지배한' 숨은 존재가 있었다. 권력의 절대자를 지배할 수 있었던 인물은 누구일까? 그 존재는 너무나 역설적이게도 힘이 없는 여인이었다.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은 그 역설의 속살을 노출시키는 책이다.

 

권력이 있는 곳에 여인이 있고, 권력을 가지면 여인을 품고 싶은 것이 권력자들의 인지상정이라 했는가. 황제가 사는 궁궐 속의 '힘 없는' 여인들은 "모두 황제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으니 황제가 마음만 먹는다면 누구든 그 품에 품을 수 있었다. "누구든" 품을 수 있다는 사실과, 권력자가 가지는 당연한 "정욕", 그리하여 권력자에게 수많은 여인의 성은 짓밟히고 짓이겨지는 희롱의 대상, 소비의 대상,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누구든"이라는 절대 권력을 기회로 삼고, "정욕"이라는 덫을 역으로 이용한 새로운 권력자가 있었으니 그들이 바로 '밤의 중국사'를 지배한 여인들이었다.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은 황제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는 여인들이 어떻게 그들의 성을 도구화하고, 권력화했는지를 보여주는 섹슈얼리티(sexuality) 보고서라 할 만하다. 힘 없는 여인들이 자신의 성을 도구화하고, 권력화할 수 있었던 것은 '대 잇기', 다시 말해 국가의 안정과 권력의 안정화를 위해 종족 번식이라는 역사적 사명이 황제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치국평천하"의 전제 조건은 "수신제가"였으며, 가족을 떠받드는 요체는 요인데, "효의 시작은 바로 대 잇기를 통한 자손 번창"이었다. 인류가 만들어낸 모든 종교의 뿌리라는 풍요와 다산, 그리고 그것을 기원하는 쾌락(의식)이 또 다른 방식으로 권력의 핵심부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황태자들은 "사춘기에 접어들기도 전에" "황궁의 은밀한 장소에서 개인교습(성교육)"을 따로 받았으며, "중국황실에는 성교를 통해 쾌락을 극대화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소설처럼 풀어놓은 방중서"들이 많았음을 주목하라고 저자는 말한다.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은 '은밀하게' 이루어진 역사의 검은 보따리를 풀어젖힌다. 그것을 저자는 "중국황실의 치명적이면서도 잔혹한 쾌락 혹은 암투의 역사"라 한다. 혹시 여성 독자들 중에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이라고 해서 은밀하고도 통쾌한 승리감을 기대했다면, 그 기대감을 거두라고 말하고 싶다. 여기 등장하는 여주인공들은 오로지 '간택'을 위해 '몸'부림치며, 권력을 거머쥐는 것말고는 달리 어떤 목표도 없는 '무뇌아'로 보인다. 사랑으로 치장된 부분도 있지만, 참 거시기하다. <황제를 지배한 여인들>은 '밤의 역사를 지배한 여인'이라는 이름으로 여성을 다시 성 상품화하고 있다. 그래서 불쾌했다.

 

 

네이버 북카페를 통해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된 서평입니다.

본 서평은 작성자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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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예술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이며,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본 적이 없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148).

 

 

도스또예프스끼, 그의 작품을 읽을 때에 몰입하기까지 약간의 인내(?)가 필요했던 것에 비하면, 이 책은 술술 읽히는 편이다. 소설은 허구이고, 소설을 작가의 이야기(경험)로 읽는 것은 초보적인 글읽기 또는 잘못된 소설 읽기라는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작가의 삶과 연결시키곤 하는 내 버릇을 들킨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내 마음에 박힌 못을 어느 정도 빼내어주었다.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대 문호의 삶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흔적을 남겼는지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예술)은 그 자신의 삶의 여정, 그 자신의 고뇌를 오롯이 담아낸 또 다른 그의 삶이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시절부터 그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것이 그의 예술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추적한다. 그가 이 땅에 살다간 자취는 희미해져가지만, 그의 작품과 그 안에 새겨진 그의 삶의 흔적은 영원하리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책을 덮었을 때, 내 마음에 강렬한 이미지 하나가 남았다. 그것은 내 마음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이 천재적인 작가가 10년간이나 도박에 빠져 살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아니었고, <죄와 벌>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빚쟁이들에게 쫓겨 유럽으로 도주했을 때 탄생했다는 비화도 아니었고, 사랑으로 그를 구원해준 두 번째 아내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는 끔찍한 광경 한 조각이다. 그의 운명, 그의 문학을 결정짓게 한, 잔인한 장면 하나가 선명하게 남는다. 그가 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전량 한 사람이 커다란 주먹으로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마부는 주먹을 맞으면서 반사적으로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장면이다. <이런 광경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표도르는 "이 혐오스러운 광경은 일생 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전령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민중 속에 존재하는 저열하고 잔인한 성격을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했다>(36-37). 저자는 이 장면이 <죄와 벌>에서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지를 밝힌다. 폭력은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사디즘을 성적 쾌락에만 한정하지 않고, 폭력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가학증으로 이해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정신적 질병을 사디즘이라고 이해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죄와 벌>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살인, 폭력, 고문, 경멸, 학대(아동학대), 전쟁 등 약자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주 다루었다"(40).

 

힘으로 다스려지는 폭력 사회, 현재 그것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돈'이고, 돈의 힘을 겨루는 인간의 전쟁은 빈부 격차로 나타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이해하는 주요한 표지 중 하는 도시의 막장에서 그가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도시 뒷골목을 전전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인 것은 작가로서 그의 운명이었다"(43). 그런데 한평생 그 자신이 가난하게 살았고, 아버지는 농도들에게 살해당하는 경험을 하고, 음모에 희생양이 되고, 정신 발작으로 간질을 앓았고, 불행한 결혼과 귀여운 딸이 죽는 모습까지 목격해야 했던 이 작가가 이 비참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225)라니!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스또예프스끼가 언급하는 "아름다운 인간"은 외형적 아름다움(끄라시비)이 아니라, 외형적, 내면적 아름다움(쁘레끄라스니) 모두를 뜻한다(229).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무정형의 아름다움은 선한 정신에 의해 평정을 되찾을 때만 세상에 구원의 빛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231).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의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곳을 추적하며 재밌는 공통점을 하나 발견해냈다. "그가 살았던 집들이 대부분 길모퉁이에 있다는 사실"(63)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모퉁이 집에 유달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왜 하필 모퉁이 집만 골라 살았던 것일까." 저자의 풀이는 이렇다. "모퉁이 집은 모든 것이 교차하는 광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러시아 민중의 삶이었고,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였다. 그에게 모퉁이 방은 이런 운명의 교차점을 관찰할 수 있는 확대경이었던 셈이다." 그 모퉁이 방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는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들의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그것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끄레스뜨', 즉 교회의 십자가였다"(67).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작가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관심이 없던 독자들도 그의 작품을 읽게 만들 힘을 가졌다. 잔인한 시대의 정신을 정밀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곳에 구원의 빛을 던져주기 원했던 한 작가의 삶과 고뇌를 깊이 알아가는 작업은, 고스란히 우리 시대를 반성하고 나의 삶을 성찰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을 붙들고 싶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보았던 잔인함 속에 살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그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우리 영혼을 깨우는 소리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와 문학작품이라는 배를 타고 함께한 이 특별한 러시아 여행을 잊지 못할 듯하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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