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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예술은 항상 동시대적이고 현실적이며,
그 외의 다른 방식으로 존재해본 적이 없고,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방식으로는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148).
도스또예프스끼, 그의 작품을 읽을 때에 몰입하기까지 약간의 인내(?)가 필요했던 것에 비하면, 이 책은 술술 읽히는 편이다. 소설은 허구이고, 소설을 작가의 이야기(경험)로 읽는 것은 초보적인 글읽기 또는 잘못된 소설 읽기라는 누군가의 말이 가슴에 못처럼 박혀 있다.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작가의 삶과 연결시키곤 하는 내 버릇을 들킨 듯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내 마음에 박힌 못을 어느 정도 빼내어주었다. '도스또예프스끼'라는 대 문호의 삶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흔적을 남겼는지 세밀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도스또예프스끼의 문학(예술)은 그 자신의 삶의 여정, 그 자신의 고뇌를 오롯이 담아낸 또 다른 그의 삶이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도스또예프스끼의 유년시절부터 그의 삶의 자취를 따라가며 그것이 그의 예술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고,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추적한다. 그가 이 땅에 살다간 자취는 희미해져가지만, 그의 작품과 그 안에 새겨진 그의 삶의 흔적은 영원하리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책을 덮었을 때, 내 마음에 강렬한 이미지 하나가 남았다. 그것은 내 마음의 고전으로 남아 있는 <까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 관한 이야기도 아니었고, 이 천재적인 작가가 10년간이나 도박에 빠져 살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도 아니었고, <죄와 벌>이라는 불후의 명작이 빚쟁이들에게 쫓겨 유럽으로 도주했을 때 탄생했다는 비화도 아니었고, 사랑으로 그를 구원해준 두 번째 아내 이야기도 아니었다.
그것은 도스또예프스끼도 죽을 때까지 잊지 못했다는 끔찍한 광경 한 조각이다. 그의 운명, 그의 문학을 결정짓게 한, 잔인한 장면 하나가 선명하게 남는다. 그가 본 것은 "건장한 체격의 전량 한 사람이 커다란 주먹으로 마부의 뒤통수를 후려치고, 마부는 주먹을 맞으면서 반사적으로 말에게 채찍질을" 하는 장면이다. <이런 광경이 반복되는 것을 보고 표도르는 "이 혐오스러운 광경은 일생 동안 내 기억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그 전령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러시아 민중 속에 존재하는 저열하고 잔인한 성격을 나도 모르게 지나치게 일방적으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갖게 되었다"고 술회했다>(36-37). 저자는 이 장면이 <죄와 벌>에서 어떻게 문학적으로 재현되고 있는지를 밝힌다. 폭력은 도스또예프스끼가 평생 잊을 수 없었던 주제 중 하나였다고 한다. "사디즘을 성적 쾌락에만 한정하지 않고, 폭력을 통해 쾌감을 느끼는 가학증으로 이해한다면 도스또예프스끼는 현대사회의 가장 심각한 정신적 질병을 사디즘이라고 이해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죄와 벌>뿐만 아니라, 여러 작품에서 살인, 폭력, 고문, 경멸, 학대(아동학대), 전쟁 등 약자를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인간의 본성을 자주 다루었다"(40).
힘으로 다스려지는 폭력 사회, 현재 그것을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돈'이고, 돈의 힘을 겨루는 인간의 전쟁은 빈부 격차로 나타난다. 도스또예프스끼의 작품을 이해하는 주요한 표지 중 하는 도시의 막장에서 그가 목격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도스또예프스끼가 도시 뒷골목을 전전하며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인 것은 작가로서 그의 운명이었다"(43). 그런데 한평생 그 자신이 가난하게 살았고, 아버지는 농도들에게 살해당하는 경험을 하고, 음모에 희생양이 되고, 정신 발작으로 간질을 앓았고, 불행한 결혼과 귀여운 딸이 죽는 모습까지 목격해야 했던 이 작가가 이 비참한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225)라니! 도스또예프스끼는 "아름다움에 대한 두 가지 기준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도스또예프스끼가 언급하는 "아름다운 인간"은 외형적 아름다움(끄라시비)이 아니라, 외형적, 내면적 아름다움(쁘레끄라스니) 모두를 뜻한다(229). "도스또예프스끼는 지상의 아름다움을 선과 악의 경계선 위에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무정형의 아름다움은 선한 정신에 의해 평정을 되찾을 때만 세상에 구원의 빛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이다"(231).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의 저자는 도스또예프스끼가 살았던 곳을 추적하며 재밌는 공통점을 하나 발견해냈다. "그가 살았던 집들이 대부분 길모퉁이에 있다는 사실"(63)이다. 도스또예프스끼는 모퉁이 집에 유달리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왜 하필 모퉁이 집만 골라 살았던 것일까." 저자의 풀이는 이렇다. "모퉁이 집은 모든 것이 교차하는 광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장소이다. (...) 거기서 그가 본 것은 러시아 민중의 삶이었고, 급변하는 러시아 사회였다. 그에게 모퉁이 방은 이런 운명의 교차점을 관찰할 수 있는 확대경이었던 셈이다." 그 모퉁이 방에서 도스또예프스끼는 "그는 너무 끔찍해서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것을 외면해서는 어떤 출구도 찾을 수 없는, 민중들의 가난하고 미래가 없는 삶을 목격했다. 그래서 그는 모퉁이 방에 앉아 이 모든 것을 구원할 수 있는 새로운 교차점을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현실의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으며, 길거리에서 고통받고 있는 민중의 삶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그는 그것을 현실 너머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푸른 하늘 아래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교차로의 '끄레스뜨', 즉 교회의 십자가였다"(67).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작가 도스또예프스끼에게 관심이 없던 독자들도 그의 작품을 읽게 만들 힘을 가졌다. 잔인한 시대의 정신을 정밀하게 보여주면서도, 동시에 그곳에 구원의 빛을 던져주기 원했던 한 작가의 삶과 고뇌를 깊이 알아가는 작업은, 고스란히 우리 시대를 반성하고 나의 삶을 성찰하는 작업으로 이어진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라는 그의 예언을 붙들고 싶어진다. 우리는 여전히 그가 보았던 잔인함 속에 살고 있지만, 그의 작품은 그 참혹함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아름다움으로 우리 영혼을 깨우는 소리가 되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작가와 문학작품이라는 배를 타고 함께한 이 특별한 러시아 여행을 잊지 못할 듯하다.
해당 서평은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를 읽고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