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놀로지의 종말 - 인간은 똑똑한 기계를 원하지 않는다
마티아스 호르크스 지음, 배명자 옮김 / 21세기북스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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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인류는 오늘날의 인류보다 더 인간적일 것이다(p. 288).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인간이 되겠다는 목적 하나로 ’은하철도 999’를 타고 온갖 위험을 무릎쓰며 우주 여행을 했던 철이. 그러나 드디어 기계인간의 몸을 주는 별에 도착한 주인공 철이는 결국 기계인간이 되지 않기로 선택한다. 영원히 죽지 않는 기계인간보다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으로 남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는 늦어도 10년 후면 인조인간 로봇이 노인 수발을 책임지고 집안 정리뿐 아니라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도 할 것이라고 공언한다"(p. 83). 인류는 아직 ’은하철도 999’를 타고 기계인간의 몸으로 만들어주는 ’프로메슘 별’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은하철도 999’의 작가처럼 <테크놀로지의 종말>을 쓴 유럽 최고의 미래 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인류는 결국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으로 남기를 원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편리’를 추구하는 인간 사회는 발전하는 과학 기술과 더불어 ’자동화에 대한 집념’을 불태우고 있다. 자동으로 안마를 해주는 기계에서부터 새로 분양되는 아파트마다 조금씩 더 업그레이드 되는 ’무인 자동화 시스템’을 자랑하고, ’전격 Z작전’의 키트처럼 운전이 필요 없는 전자동 자동차를 만들기 위한 연구와 투자가 계속되고 있다. 애완용 로봇은 물론, 인간의 모든 노동을 대신해줄 인조인간의 발명까지 나날이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이미 오래전부터 생명체도 기계로 대체하려 하고 있다. 우리는 테크놀로지가 발전할수록 인간 사회도 더욱 발전하고 있다고 ’믿으며’, 미래 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상상할 때, 최첨단 기기들로 가득찬 세상을 이상적이고 발전된 라이프스타일로 자연스레 떠올린다.

그러나 테크놀로지의 본질과 의미를 통찰하는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테크놀로지의 종말>이라는 다소 도발적인 이론을 주장하고 나섰다. 한마디로 그는 "기술의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상실이다"(p. 38)고 단언한다. 과연 그러한가? 화상전화를 통한 저자의 설명이 마음에 깊이 와닿는다.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선진 문화에서 통신은 결코 가까움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거리 유지에 봉사한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화상 전화를 가로막는 근본적인 훼방꾼이다"(p. 50). 

진화생물학과 사회생물학을 넘나들며 기술의 진보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저자는 <테크놀로지의 종말>을 예고한다. 저자는 우리가 기대하는 완벽한 전자동화의 테크놀로지 세계가 몰락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한마디로 말한다. 테크놀로지는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테크놀로지는 저절로 다가오는 필연적인 미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테크놀로지는 인간의 행동과 타협의 결과이며 소망, 꿈, 희망, 보상, 두려움의 결과다. 따라서 테크놀로지는 인간을 소외시키지도 파괴하지도 않으며 인간성을 없애지도 않고, 오히려 그 반대로 인간 본질로 한 걸음 더 다가서게 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테크놀로지의 종말>은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미래사회의 라이프스타일을 예측하는 거시적 시각을 가지고 있다. 기술과 상품의 통찰은 이 책이 경영서적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저자는 "사람들이 진정 원하는 미래는 사람의 선택을 막거나 지배하는 완벽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따르는 기술의 세상"이라고 말한다. 전자 북(BOOK)의 발전이 종이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향수를 느낄 수 있는 종이 책의 발전을 가져올 것인가?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따르는 기술의 세상"에 대한 통찰은, 발전하는 과학기술을 삶에 직접적으로 연결하고 적용하는 산업계와 경영진들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설정해준다.

앞으로 얼마나 더 발전된 기술을 목격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지 모르지만, 날마다 쏟아져나오는 최첨단 기기를 볼 때마다 다음 세대를 향한 부러움과 함께 두려움도 느낀다. 새로운 기기의 사용법을 익혀야 할 때마다, 아무리 그 사용법이 간편화되고 이용이 쉬워진다고 해도 언젠가 기계로부터 소외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미래의 인류는 오늘날의 인류보다 더 인간적일 것이다"(p. 288)는 저자의 예측에 안심이 되는 측면도 있다. 미래는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다. 마지막 순간에 따뜻한 심장을 가진 인간이기를 선택했던 철이 처럼, <테크놀로지의 종말>을 읽으며 완벽함이 아니라, 언제까지나 소망, 꿈, 희망, 두려움, 한계를 간직한 소박한 ’인간성’이 살아있는 미래 사회에 우리의 진정한 행복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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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게 서라 -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
존 맥아더 지음, 김애정 엮음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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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적에 맞서는 법


언젠가 기독교 안티 카페에 들어가 게시글을 읽어본 적이 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부모님을 둔 어느 학생의 글이었는데, 이렇게 토로하고 있었다. "우리 부모님은 일요일에 교회에 가지 않고 낮잠을 자고 있는 저에게 ’마귀’라고 합니다. 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자기 자식을 ’마귀’라고 부르는 부모가 제정신입니까?" 이 게시글 밑으로 많은 회원의 위로와 격려의 덧글이 이어지면서, 기독교 신앙인들에 대한 욕설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성경적 진리에 대한 오해 또는 이해의 부족으로 신앙인들의 언행에 실수나 잘못이 있을 때, 그것이 얼마나 기독교 신앙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게 되는지 보았다. 신앙생활을 하는 본인에게 뿐만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오해를 불러일으켜 결국 구원에서 멀어지게 되는 결과까지 초래할 수 있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문제 중에 하나가 바로 ’영적 전쟁’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계에 속한 일이기 때문에, 더욱 성경의 가르침을 바로 알고 바르게 분별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정확한 용어 사용과 성경적 대응을 위한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하겠다. 성경은 ’악한 영’이 실재함을 말한다. 그런데 <굳게 서라>의 저자 존 맥아더 목사님이 C.S. 루이스의 말을 빌려 설명한 것처럼, 악한 영들에 대해 인간이 빠질 수 있는 두 가지 오류가 있다. 하나는, 악한 영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을 믿는데 지나치게 건강하지 못한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렇다. 무관심도 잘못이지만, 지나치게 관심을 갖고 두려워하는 것도 잘못이다.

<굳게 서라>는 탁월한 성경 해석가라는 존 맥아더 목사님의 명성 그대로, 영적 전쟁에 관한 전반적인 성경의 가르침을 전하여 준다. 성경적 근거와 권위 있는 해석들, 그리고 사례까지 제시하며 체계적이고 세부적으로 연구한 구체적이고 선명한 가르침이라 더욱 신뢰가 갔다. 사탄의 정체와 활동 등에서부터 신자들의 구체적인 대응 방법까지 세밀하게 다루어진다.

그런데 나는 한 가지 설명에 큰 충격을 받았다. "어느 경우이든 바울의 지시는 확실히 오늘날 영적 전쟁 운동에서 하고 있는 일들과는 다르다. 그는 사탄으로부터 사람들을 데려오기보다 오히려 교회가 때때로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줘야 할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는 축사 사역의 한 형태이다"(p. 63). 솔직히 이 설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리둥절하다. 전체적인 맥락과 문맥 안에서 의미를 파악하고, 번역서이기 때문에 원서를 읽어봐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교회가 사람을 사탄에게 넘겨줘야 할 책임이 있다’는 문장은 상징을 포함한 표현이 아니라 문자적인 표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상당한 논란이 예상된다.

<굳게 서라>는 삶의 현장에서 소위 말하는 ’귀신 들림’ 현상을 직접, 간접적으로 목격하게 되는 사역자에게 굉장히 실제적인 도전과 중요한 가이드가 되어준다. 특별히 악한 영들과 대적하는 ’전투 기도’, 즉 꾸짖는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는 날카로운 성찰은 영적 전쟁의 현장에 있는 사역자들이 반드시 진지하고 심각하게 검토하고 수용해서 축귀 사역에 수정이 있어야 한다고 본다. 영적 전쟁은 전체적인 통찰 안에서 세부적인 적용을 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니, 교회의 지도자 그룹이 먼저 책을 정독한 후에 부록을 활용하여 함께 스터디를 하면 유용하리라 생각된다.

성경의 진리와 함께 하나님의 전신 갑주로 믿는 자들을 단단히 무장해주는 <굳게 서라>는 지엽적인 영적 전투가 아니라, 신앙인들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동안 내내 싸워야 할 싸움을 가르쳐주며, 그 전투에서 승리하도록 이끌어준다. 모든 신앙인의 필독서로 추천하고 싶다.

"십자가의 병사로서 우리의 의무는 다만 고난을 견디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전투에서 굳게 서는 것이다"(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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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비 Young Author Series 2
크리스 클리브 지음, 오수원 옮김 / 에이지21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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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오만함과 탐욕의 잔혹성, 그리고 짓밟히는 약자의 삶을 읽다.


<리틀 비>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화자는 두 명이다. 나아지리아 난민 소녀인 ’리틀 비’와 영국의 한 잡지사의 잘 나가는 편집장인 ’새라’, 이렇게 두 명의 화자가 서로 한 번씩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니콜 기드먼 주연의 영화화가 결정되었다고 하니 ’새라’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상상해볼 수 있었는데, 나이지리아 소녀인 ’리틀 비’의 모습은 전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영국과 나이지리아, 둘 다 먼 이국 땅의 사람들이지만, ’새라’는 거리감을 느낄 수 없는 가까운 이웃으로, ’리틀 비’는 전혀 낯선 타인으로 다가왔다.

"그날, 그곳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되는 거였어."

도대체 2년 전, 그날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영국의 이민자 수용소에서 시작되는 <리틀 비>의 이야기는 전체의 그림을 맞춰가는 조각 퍼즐처럼, 이야기의 윤곽을 서서히 드러낸다. 도대체 2년 전 그날에 리틀 비와 새라, 그리고 그녀의 남편 앤드루 사이에 무슨 일이 일었던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앤드루는 리틀 비가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전화를 받고 느닷없이 자살을 해버린 것일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새라는 한쪽 손가락이 잘린 것일까? 책을 읽을수록 오히려 궁금증이 더해갔다.

잘못 놓인 물건처럼 영국 땅에 불법 체류자의 신분으로 놓여진 ’리틀 비’, 그녀가 덤덤하게 들려주는 사연은 잔혹했다. 유전에 대한 이권 타툼으로 그녀의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짓밟혀 버렸다. 리틀 비와 그녀의 언니는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사냥개들과 추격자들에게 쫓긴다. 먼 옛날 이야기 같은 이들 자매의 삶에 갑자기 새라와 앤드루가 끼어들게 된 것은 그들이 나이지리아 해변으로 휴가를 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리틀 비 자매가 추격자들에게 막 잡혀 죽기 일보직전인 그 순간에, 새라와 앤드루는 호텔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있었다. 

배트맨 옷을 입고 배트맨 놀이에 열중인 아들 찰리, 멋진 칼럼니스트인 남편, 매달 잡지에 어떤 기사를 실을 것인지 하는 고민, 그리고 남편이 아닌 로렌스와 나누는 은밀한 사생활. 어느 날, 앤드루에게 걸려온 리틀 비의 전화 한 통, 그리고 앤드루의 장례식에 갑자기 나타난 리틀 비로 인해 새라의 모든 일상이 한 순간 흐트러지면서 새라는 지독한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어느 날, 리틀 비의 삶에 끼어들었던 석유 전쟁은 어떠한가? 마을 전체를 폐허로 만들어버리는 살인이 자행되고, 리틀 비는 집을 잃고, 부모를 잃고, 이름을 잃고, 너무도 잔혹하게 언니를 잃고, 일상을 잃고, 꿈을 잃고, 삶을 잃어버렸다. 새라의 것이 ’혼란’이라면, 리틀 비의 것은 ’잔혹함’이다. 새라의 삶에 끼어든 리틀 비의 존재가 거추장스러운 혹이라면, 리틀 비의 삶에 끼어든 석유 전쟁은 암덩어리보다 더 파괴적이고 치명적인 침입자이다. 

’난민’이 되어 영국 땅으로 도망쳐 온 리틀 비, 그러나 문명의 오만함은 리틀 비를 이웃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바로 그 오만한 사람들의 탐욕이 불러일으킨 불의 혀바닥이 리틀 비를 핥고 지나가 난민이 되었는데도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 없다. 귀찮아 하고, 무관심하고, 쫓아내고, 없애버리려는 사람은 있어도, 누구도 보호해주고 옹호해줄 자가 없는 리틀 비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새라에게 기대해보지만, 마지막 리틀 비의 웃음이 희망인지, 절망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앤드루를 자살로 몰고간 것은 리틀 비의 존재인가, 앤드루의 양심인가? 이런 질문이 마음속에 맴돌면서 <리틀 비>는 내게 고통스러운 기억으로 남는다. 리틀 비의 한마디 한마디가 우리의 오만함을 비웃는 촌철살인으로 읽히는 것은, 내게도 존재하는 양심이 진정한 부끄러움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알려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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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의자 - 숨겨진 나와 마주하는 정신분석 이야기
정도언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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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상담을 공부한 친구가 보여준 영화가 있다. 제목은 기억나지 않지만, 줄거리가 충격적으로 기억된다. 성인이 된 딸이 시끄럽게 짖는 개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하자 그녀의 엄마는 그 개를 죽여 버린다. 그리고 그 일을 계기로 일이 꼬여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엄마는 딸을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그 시체를 우물(저수지였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에 숨겨둔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우물 공사를 해야 한다며 인부들이 찾아오면서 또다른 위기에 몰린다는 내용이다.

친구는 시체를 우물에 숨겨두는 행위가 우리의 무의식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살인을 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마음 깊은 곳에 문제를 묻어두고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마음이 엉클어지는 상황에 처하면 깊이 묻어두었던 시체가 떠오른다고. 이 영화를 보고, 내가 해결하지 못한 채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고 있는 문제는 없을까 밤새 뒤척였던 기억이 난다.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기가 조금 두려웠다. 무의식에 묻어둔 것이라면 분명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상처이거나 불쾌한 기억일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그것들이 다시 들춰지는 것이 주저되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자연스레 들려주는 저자의 손에 이끌려 편안한 마음으로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았다.  의사 선생님으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고 있는 듯한 부드러운 어투 때문인지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아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프로이트는 내 안에 이드(Id), 초자아(Superego), 자아(Ego)라는 세 사람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공부할수록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프로이트가 천재 중에 천재로 생각된다). <프로이트의 의자>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토대로 나도 모르는 내 마음, 즉 무의식의 세계로 가는 길을 내어준다.

<프로이트의 의자>에 앉아 살펴보니 ’마음’이라는 것이 굉장히 상처받기 쉬운 연약하고 얇은 유리조각처럼 느껴졌다. 우리 마음은 왜 이리 자주 다치는지, 긁히고 깨어진 상처 투성이다. 그러나 뾰족하게 조각난 마음으로 만나서 관계를 만들어가고, 삶을 만들어가는 우리의 위태로운 일상의 역학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한편으로는 나와 너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은 듯한 안도감도 든다. 사실, 자아와 무의식의 경계에서 ’진짜 나’와 상처난 마음이 만들어낸 ’가짜 나’ 모두 그저 ’나’가 아닐까 하는 자조적인 푸념도 나오지만, 가짜 나가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에너지를 제어할 힘을 얻은 듯 건강한 자신감도 생긴다.

내 마음을 이해하는 작업은 곧 타인을 이해하는 지평까지 열어주는 효과와 유익이 있다. 나를 이해함과 동시에 "아, 그래서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는구나" 하는 이해와 포용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곧잘하는 실수이지만, 마치 상대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듯한 시선으로 짧은 이론을 상대방의 행동에 단편적으로 마구 적용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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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버드의 어리석음 - 세상을 바꾸지 않은 열세 사람 이야기
폴 콜린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양철북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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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황되지만 꿈을 꾸었고, 무모했지만 도전했고, 실패했지만 시도했던 이들.


몇 해 전, 베이징 올림픽 때 방송매체가 평소 관행대로 방송을 했다가 시청자들과 네티즌들에게 호되게 질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비록 메달은 따지 못했지만, 쓰러지면서도 역도 바벨을 끝까지 놓지 못했던 한 선수의 투혼에 감동을 받은 국민들이 이러한 선수들을 외면한 채 금메달을 딴 선수만을 집중적으로 보도하는 방송의 관행을 질책한 것이다. 이후로 올림픽을 보도하는 방송의 태도가 확 달라졌다. 감동적이고 훈훈한 선수들의 사연이나 소외된 경기까지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밴버드의 어리석음>의 작가 폴 콜린스는 '잊힌 것들에 대한 따뜻한 기록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다소 엉뚱한 이 작가는 역사를 들여다 보는 새로운 필터를 제시한다. 그는 역사적인 승자가 아니라, 역사로부터 잊혀진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역사가 가차없이 잊어버린 사람들의 잊혀진 삶을 추척한다. 위인들을 배우고 기억하기에도 과부화가 거릴 지경인데 역사가 잊어버린 사람들을 구태여 추척할 필요가 있을까? '신선한 의도'이기는 하나, 그렇게 추척하여 그들의 삶을 복원해낸다 하여도 그들의 이야기는 그저 읽고 지나가는 작은 에피소드나 가십에 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는 역사가 잊은 열세 사람의 삶을 추적하여 <밴버드의 어리석음>이라는 한 권의 책에 담았다. 이 책에 수록된 열세 사람은 어떠한 기준으로 선발된 사람인가? 한마디로 말하면 '작가 마음대로'이다. 사기꾼, 예술가, 과학자, 언어학자, 농부, 사업가, 시인, 군인, 작가 등 직업도 다양하다. 한가지 공통점을 찾으라면 처음부터 어처구니 없는 시도였거나, 아니면 시도는 좋았으나 다소 어처구니 없는 이유(더러는 안타까운 이유)로 실패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허황되지만 꿈을 꾸었고, 무모했지만 도전했고, 실패했지만 시도했던 이들. 이미 지나버린 역사이니 부질없는 가정(If)이지만, 안타까움에 나는 자꾸만 "만약 이랬다면"이라는 '가정'(If)을 하며 책을 읽었다. 오로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겠다는 목적 하나로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통째로 위조했던 윌리엄 헨리 아일랜드, 만약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고 지지해주었다면? 도레미파솔라시도 일곱 음만으로 세계 최로의 공용어를 만들고자 했던 프랑수아 수드르의 연구가 성공했다면? 포도 품종 개발에 성공한 이프레임 불이 특허를 딸 수 있었다면?(포도 쥬스로 유명한 웰치가 나와서 특히 재밌게 읽었다.)  엄숙함이 지배하던 시대에 컬트적인 연기를 하고, 기이한 복장을 하고 다녔던 로버트 코츠가 현대에 태어났다면? 셰익스피어의 작품에 최초로 의문을 제시했던 딜리아 베이컨이 함께 연구할 동료 학자를 만날 수 있었다면?

<밴버드의 어리석음>이 소개하는 열세 사람의 기이한 삶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결국 '운'의 차이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성공과 실패의 경계에서 원대했던 시도에 비해 너무 아쉽게 끝나버린 사람들. 따지고 보면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모든 것이 원인이 된다는 측면에서, 결과를 가르는 그 미묘한 차이는 결국 '운'의 차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가 '운'에 달린 것이라고 생각하니 성공과 실패에 두었던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듯하다. 내 안에 불꽃이 있다면 성공이나 실패에 그리 연연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충분히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단조롭기 그지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지금의 안타까움을 생각하면, 불꽃을 품은 그 자체로 행복할 듯하니 말이다.

배우려는 의지만 있다면, 우리는 누구에게서든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실패로 끝나고, 과거 속으로 사라지며, 역사로부터 잊혀졌지만, 여기 열세 사람에게서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은 '불꽃처럼' 살라지는 삶이다. 그들은 적어도 폴 콜린스가 관심을 가지고, 문화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읽혀질 정도로 시시하게 살다가지 않았다. 이들처럼 성공이냐, 실패냐를 떠나서 나의 모든 것을 불사를 만큼 나도 '열정적인 불꽃'으로 타오르고 싶다. 내 전 생애와 남은 생명을 다 태우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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