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기독교 역사 - 악당인가 성자인가, 회복을 위해 마주해야 할 역사 속 기독교
존 딕슨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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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교회사에 대해 지킬과 하이드 같은

상반된 두 얼굴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오히려 의연하게 고통을 견디는

겸손한 종의 얼굴과

의로움이라는 명분 아래 사회를 괴롭히려고 안달하는

도덕 경찰의 얼굴이다(95).

'여성학' 수업을 들었을 때의 일입니다.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하는 분이 계셨는데, 제가 교회 안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고 얼마나 적대적으로 대하는지 몹시 당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분의 주장에 의하면, 모든 가부장적인 여성 차별은, 에덴동산에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인류가 타락했다고 가르치는 교회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시간이 있다면), 이 세상에 만연한 '인간관'과 비교해볼 때, 예수님의 가르침이 얼마나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것인지, 예수님의 제자들이 로마의 인간관을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설명해보고 싶었지만, 입도 떼어보지 못했습니다. (외부 세계에 대한 악영향은 둘째치고) 교회의 조직 안에서조차 어떻게 여성 차별이 자행되어 왔는지 나름의 증거(?)를 끊임없이 제시하는 그분을 말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분께 존 딕슨의 이 책,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를 함께 읽고, 제대로 된 토론을 해보자고 제안하고 싶습니다.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사람들은 선하게 행할 수 있고 악한 사람들은 악을 행할 수 있다. 그러나 선한 사람들이 악을 행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종교다(465).

코로나19 펜데믹 이후, '교회'를 사회악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공공연합니다. 악플러들의 주장처럼, 종교가 없으면 세상은 더 좋아질까요?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이 문제에 답하고자 2천 년간 교회가 걸어온 길을 추적합니다. 기독교가 인류에 기여한 부분도 크지만, 사실 기독교인들이 기독교인답게 사는 데 꾸준히 실패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직시합니다. 역사 속에서 십자군 원정, 종교재판소, 노예제 옹호와 같은 끔찍한 일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행되었음을 시인합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의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마 7:3-5)입니다. 그러나 공정한 평가를 하려면, 어두운 면을 가려서는 안 되겠지만, 어두운 면만 보아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름다운 곡을 썼는데 때로 교회는 그 곡을 잘 연주했고, 때로는 엉망으로 연주했다"(25).

존 딕슨의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교회의 자기비판과 같은 책입니다. 그리고 그 솔직한 자기비판을 통해 '작품'(원곡)과 '연주'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존 딕슨은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어두운 측면에 대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예수님은 더없이 아름다운 작품을 작곡하셨는데, 기독교인들이 그 곡을 항상 잘 연주한 것은 아니었다"(63).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아름다운 작품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릴 때도 있었고, 전혀 다른 곡으로 연주할 때도 분명 있었지만, 그 원 곡조를 제대로 연주할 때는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도 놓치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교회는 그 설립 문서들에 담긴 이 두 멜로디 라인을 연주할 때

역사 속에서 최고의 모습을 보였고,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82).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그리스도의 가장 독특한 두 멜로디 라인을 짚어주는데, 하나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산상설교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하는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평등한 존재로 생각하는 혁명을 가져온 장본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존 딕슨은 이 두 멜로디 라인이야말로 예수님이 세상에 남기신 특별한 유산이며, 인류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가르침이라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공정하게 역사를 해석하고자 한다면, 이것이 세상을 급진적으로 바꿔놓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이미 승리했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기독교인들은 훌륭한 패배자, 심지어 즐거운 패배자가 될 수 있었다(107).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슴 뜨거워지는 교훈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힘센 근육질의 기독교"가 아니라, "즐거운 패배자"가 되었을 때, 예수님이 남겨주신 아름다운 원곡을 원곡답게 연주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죽은 사람들의 시선을 묻어 주고, 자선 단체와 교육 기관과 병원을 세우고, 노예들을 해방시킬 수 있었던 것은, 힘센 근육질을 가졌을 때가 아니라, 기꺼이 훌륭한 패배자가 되기로 선택했을 때라는 것입니다. 그 뜨겁고 훌륭한 패배의 순간들을 통해 예수님의 아름다운 멜로디 라인은 세상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인들이 모든 개인의 평등성 개념을 도입하는 데 많은 역할을 했지만, 그 개념의 발전을 방해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다"(73).

예수 그리스도께서 더없이 아름다운 곡조를 지으셨다는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기독교인들이 그 곡조를 잘 연주하지 못했다는 것 또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특징이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그 특징이 증오와 편견과 폭력일 때가 많았다는 사실을 가감 없이 보여줍니다. 문제는 기독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은 연주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곡조는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폭력은 인류사에서 보편적 요소였지만,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는 점에서 독보적입니다. 인간에 대한 구분과 차별은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모든 인간의 존엄성을 주장하는 윤리는 찾아볼 수 없다는 점에서 기독교 윤리야말로 인류 역사에 독보적인 자산임이 분명합니다. 만인에 대한 사랑과 평등 개념이 '예루살렘'에서 나온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안다면, "곧 많은 이방 사람들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올라가서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도를 가지고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니라 우리가 그의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라"(마가 4:2) 예언한 선지자의 노래에 절로 가슴이 뜨거워질 것입니다.

거룩한 교회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는가?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기독교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기꺼이 들여다보며 공정한 설명을 제시합니다. 교회 역사 속에 뒤얽힌 수치와 영광, 즉 교회가 보여준 최고의 모습과 최악의 모습을 동시에 다루며, 교회가 먼저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들여다보고 인정하도록 인도합니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종교나, 비종교가 아니라, (잘못된 열정에 사로잡힌) 인간의 마음이라는 사실을 직시하게 해줍니다(471). 결국 우리 모두의 눈 속에 들보가 있음을 인정하고, 남의 눈 속에 있는 티가 아니라, 자기 눈 속에 있는 들보에 초점을 맞출 때, 세상은 변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 있다면, 죄인이라는 사실에 겸손히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으나,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에 우리의 자존감이 훼손되지 않는 것처럼,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는 예수님의 원곡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하는 교회의 부끄러운 실력에 애통할 수밖에 없으나, 교회가 가진 원곡의 독보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거룩한 교회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을 수 있도록 뜨거운 소망을 불어넣어줍니다.

존 딕슨의 <벌거벗은 기독교 역사>를 읽으며, 진정한 교양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안 믿든, 종교인이든 무신론자이든, 기독교 신앙의 옹호자이든 비판자이든, 인류가 정직하게 가르쳐야 할 역사요, 지식이라 확신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힘센 근육질의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훌륭한 패배자가 되기를 선택하는 길임을 아는 것은, (예수를 따르는 자이든, 따르지 않는 자이든), 모두에게 가장 숭고한 지식이면서, 동시에 가장 위험한 지식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떨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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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영어 필사 낭독 BOOK 1 : The Way to Be Wise 솔로몬 영어 필사 낭독 BOOK 1
박광희 지음 / 가나북스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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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머리 중심의 영어 공부를 과감히 버리세요.

그리고 그 빈자리에 입과 손 중심의 영어 공부를 가득 채워 넣으세요(10).

가수 '소향'을 좋아하는 친구가 소향이 부른 외국곡으로 영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아하는 노래를 매일 듣다 보니, 가사가 외워지고, 가사가 외워지다 보니 영어 공부도 저절로 된다며 기뻐하는 친구에게 도전을 받고, 저도 좋아하는 것을 루틴으로 만들어 영어 공부를 해보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솔로몬 필사 낭독>을 가까이 하는 목표는 '영어 벙어리 탈출'입니다!

<솔로몬 필사 낭독>은 필사와 낭독을 꾸준히 실천하여 영어 말문이 열리도록 도와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단순히 영어 말문이 열리도록 돕는 다른 교재와는 다른 유익이 존재합니다. 바로 지혜의 말씀으로 잘 알려진 솔로몬의 <잠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서 길러지는 삶의 지혜까지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매일 아침 <잠언>은 1장씩 읽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그렇게 매달 잠언을 1독하면, 하나님의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권면해주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필사 낭독>은 여기서 한 발 더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잠언>을 영어 성경으로 소리내어 읽으며 필사를 하면, 실용영어 + 믿음 + 지혜라는 세 마리의 토끼를 쫓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Just do it!

영어 학습 뿐 아니라 삶의 최고의 지혜는 실천입니다(11).

<솔로몬 필사 낭독>이 교재로 삼는 영어 성경 버전은 'NIrV'(New International Reader's Versing) 성경입니다. NIV Bible이 '성인용'이라면, NIrV Bible은 '어린용', 즉 NIV 키즈 버전에 해당한다고 합니다(9). <솔로몬 필사 낭독>은 현대 감각에 맞는 영어로 번역된 NIrV 버전을 이용하여 일상 대화에서도 쓸 수 있는 실용영어를 익히도록 돕습니다.

이 책의 강점은, 먼저, 다양한 남여 원어민 음성으로 낭독을 연습할 수 있도록 돕는다는 것입니다. QR 코드를 사용하여 편리하게 음원을 다운받을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에, 하루 종일 시간 날 때마다 어디 서나 쉽게 낭독을 연습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뮤직플레이를 사용하여 재생 속도를 0.8 정도로 맞춰서 낭독을 연습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강점은, 매일의 연습 분량이 적당하다는 것입니다. 끈기가 부족한 사람들도 이 정도 분량이면 큰 부담 없이 연습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격언 형식으로 이루어진 <잠언> 문장이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암송(암기)하기에도 크게 어렵지 않다는 것입니다.

또 혼자서 훈련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도록 매우 실질적인 '영어낭독실천' 가이드도 제공합니다. 낭독을 연습하며 내 목소리로 녹음을 한 뒤, 카페에 올려 서로 서로 응원과 격려를 받을 수 있으니, '스터디 그룹'이 필요한 분들은 온라인에서 좋은 친구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이든 좋은 습관을 가지고 싶은 분들에게 <솔로몬 필사 낭독>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매일 아침이나, 잠들기 전, 나만의 루틴으로 만들어놓으면, 어느 새 나의 입에 하나님의 말씀이 영어로 새겨지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전문가들이 세상은 점점 더 살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하고, 힘든 세상이 다가올 것이라고 전망합니다. 이처럼 혼란하고 어려운 때에,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지혜를 얻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영어로 말할 수 있다면 이보다 좋은 공부도 없을 것 같습니다. 믿음의 청년들에게 이 책을 강추합니다. 뿐만 아니라, '영어 벙어리 탈출'이 오랜 소원이었던 분들께도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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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강해 세계기독교고전 22
알렉산더 화이트 지음, 박문재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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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문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구속주는 누구십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의 유일한 구속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는데,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두 구별되는 본성과 한 인격이셨고, 영원토록 그러하십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손과 발에 십자가에 달리신 못 자국, 그러니까 상처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신 것이 다소 의아했습니다. 옆구리에도 창에 찔린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으니까요. 우리가 부활체가 될 때에는 모든 것이 '회복'되어 온전해지리라 믿었기(?) 때문에 좀 당황스러웠습니다. '천국에 가면 우리의 상처 자국은 말끔히 지워지는 것이 아니었나? 왜 예수님은 상처 자국을 그대로 가지고 부활하신 것일까?' 이런 의문이 생겼던 것입니다. 그러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예수님의 상처 자국은 하늘의 상급이요, 우리를 향한 영원한 사랑의 증표라는 것이 깨달아져서 십자가 앞에 엎드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새겨진 상처 자국처럼,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배울 때, 또 하나 저의 믿음(?)을 당황스럽게 하는 교리가 있었습니다. 바로 21문,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구속주는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유일한 구속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는데,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두 구별되는 본성과 한 인격이셨고, 영원토록 그러하십니다!"

이 대답이 충격이었던 것은, 예수님이 가지고 계신 '인성'은, 이 땅에 오실 때, 즉 성육신하셨을 때에만 가지셨던 본성이고, 성육신 하셔서 우리의 죄를 다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온전한 신성을 지니신 본래의(?) 하나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실 것이라는 그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막연히 그러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의문은 남았습니다. 어째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의 한 위격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로서 사람이 되셨는데", 대속을 다 완성하신 후에도 왜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두 구별되는 본성과 한 인격"으로 영원히 남아계실까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CH북스에서 발간한 <알렉산더 화이트의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강해>를 만났습니다. 이 책은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을 '해설'해주는 책입니다.

알렉산더 화이트의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강해>는 이 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합니다. "두 본성이 우리 구속주 안에서 만났다. 각자의 속성은 유지되었지만, 각각의 본질로부터 아주 완벽한 하나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복된 동정녀의 모태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된 이후로 우리는 그를 인성 없는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도 없고, 신성 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도 없다"(98). 그리고 파스카시우스의 말을 빌어, "그리스도 안에는 두 인격이 아니라 신성과 인성이라는 두 본성이 존재하는데, 한 인격은 다른 인격을 소멸시키는 반면에, 한 본성은 다른 본성 안에서 소멸될 수 없다"(98-99) 설명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난 하나님과 사람이라는 두 본성은 최초로 결합된 순간부터 영원토록 분리될 수 없었고, 분리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나는 소교리문답이 '두 구별되는 본성과 한 인격이셨고, 계속해서 영원토록 그러하십니다'라는 진리를 지금까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 어떤 진리와도 바꿀 마음이 없다. 나는 교회의 가장 위대한 개혁자, 언약의 시조, 영국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 되기보다는 가장 미천한 자로서 네 번의 교회 공의회에 참석해 이 진리를 옹호하는 자가 되고 싶다"(에드워드 어빙, 99).

우리의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비인 듯 합니다! 그런데 이 번에 다시 한 번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강해>를 읽으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의 생각 속에 온 우주보다 크신 '하나님'을 가두고 있는가 하는 것이 충격적으로 깨달아졌습니다. 저도 오래(?) 신앙생활을 했는데도,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성은 한시적이며, 구속이 완성되고 부활하실 때, 원래의 신성으로 되돌아가실 것이라는 '선입견' 속에 갇혀 있었으니 말입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바가 무엇인지 더 분명하게 알기를 원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웨스트민스터 소교리문답 강해>를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처음 배우는 사람들보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정리하기 원하는 분들에게 더 잘 읽히고 이해되겠지만, 정복하지 못할 산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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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연결 - 나와 교회를 든든하게 세우는 행복한 공동체
최성은 지음 / 두란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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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혼자 달리시지 않았습니다.

혼자 교회를 세우시지도 않았습니다.

주님은 12명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진정한 사귐이 무엇인지, 연결됨이 무엇인지,

공동체됨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들을 통해 교회를 세우셨습니다(15).

교회 개척을 시작하고 나서 특히 더 주목하여 보게 되는 교회가 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했던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를 묵상할 때마다 당황스러운 것은, 하나님께서 이 공동체에 놀라운 선물들을 많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비롯하여 언변이 뛰어난 아볼로, 베드로까지 성령 하나님은 고린도교회에 탁월한 사역자들을 보내 주셨는데, 고린도 교인들은 서로 "나는 바울파이다", "나는 아볼로파다" 하면서 이 선물에 '분열'로 반응했다고 전합니다. 더 당황스러운 것은, 영적 은사에도 부족함이 없이 성령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에 온갖 은사를 풍성하게 부어주셨는데, 고린도 교회는 은사를 은사답게 사용하지 못한 채, 오히려 그 어떤 교회보다도 문제 많은 교회라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무엇이 문제였기에 고린도교회는 미성숙한 못된 아이처럼 굴었을까요?

고린도 교회에 대한 사도 바울의 처방전은 "더욱 큰 은사", "가장 좋은 길"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우리가 사랑의 실력을 갖춘 교회로 성장해가려면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성령 하나님은 그 해답이 '소그룹'에 있다고 대답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온전한 연결>에서 최성은 목사님은 인류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문제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고독, 죄, 영적 성장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바로 '교회'라는 공동체라고 가르쳐줍니다. "저는 예수님께서 12제자를 부르시고, 함께 먹고, 자고, 울고, 웃고, 가르치고, 배우고, 그들을 공동체의 리더로 세우시며, 함께 살아가신 거기에 우리의 질문이 있고 답이 있다고 확신합니다"(14). 죄로 관계가 파괴되고, 그 파괴된 관계 속에서 신음하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예수님이 오셨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답게 영적으로 자라가야 할 선한 싸움이 사명으로 주어져 있습니다. <온전한 연결>은 여기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하나님의 대안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가는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거센 핍박을 받고도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어마어마한 복음 전도 때문이었을까요?

멋들어진 성전도 없었고 잘 만들어진 프로그램이나 신학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소그룹에 임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엄청난 일들이 이루어졌습니다.

그 비결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부흥의 원인과 동일합니다.

바로 '소그룹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자기신의 삶을 나누는 것',

이 짧은 명제는 기독교 2천년 역사 가운데 핍박이 있던 곳에서

어김없이 발견되는 사실입니다(33).

<온전한 연결>이 오늘날 한국 교회를 향하여 던지는 소망은 '12제자 비전'입니다. 왜 12제자 비전이 이 시대에 필요한 답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일에 고작 열두 명을 부르셨습니다.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만든다면서 예수님은 왜 열두 명만 부르셨을까요?"(51) 이 질문에 대한 답 속에 부흥의 키가 있다고 믿습니다.

"예수님은 이 열두 명으로 소그룹 공동체를 만드시고, 소속감, 존재감, 사명감에 관해 훈련시키셨습니다. … 그래야 서로가 친밀하게 교제하고 관심을 가지며 리더 죈 자도 효과적으로디러십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그룹의 첫 번째 키는 '친밀함'이빈다. 그리고 이 친밀함을 통하여 신뢰가 생기고 그 신뢰를 바탕으로 나눔이 일어납니다. 이 나눔의 단계는 자신의 삶을 오픈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자신의 삶 가운데 드러난 죄와 허물을 나누는 것이죠. 그렇게 치부를 드러내도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며 함께 성정해갑니다"(52).

<온전한 연결>을 읽으며, 한국 교회는 고린도교회와 같이 성령의 열기로 뜨거웠으나 '서로 연결되는 일'에 힘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온 힘을 쏟아부으며 온전히 몰두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의 비결, 즉 우리 교회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증거되고, 죄 가운에서 신음하던 영혼들이 해방되며, 소외된 영혼들에게 깊숙이 다가가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공동체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야 하며, 그 비결은 바로 소그룹 나눔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내는 가장 중요한 실제다. 우리는 교회의 의미를 기억하면서 세속 사회에 대한 대안적 공동체를 만든다. 하나님 나라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는 이 새로운 공동체는 사람들을 믿음 안에서 성장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 가운데 있는 교회의 존재는 새로운 변증이 될 것이다"(로버트 웨버, 13).

한국 교회도 이제 제법 역사가 생기다 보니, 어느 덧, 교회 안에서 상처받았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미성숙이 문제겠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적 성장은 교회 안에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서로 부대끼고, 씨름하며,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돌볼 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다시 기억하려고 합니다.

이제 우리는 교회가 단순히 숫적으로 불어나고 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성경적 대안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온전한 연결>은 그 시작이 소그룹 안에서 우리 삶을 오픈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안적 공동체를 만들어나갈 것인가 그 실제적인 성경적 방법이 궁금한 분들에게 이 책을 추천합니다. 교회가 쉽게 적용할 수 있는 실천 방안들뿐 아니라, 현재 우리 교회(소그룹)의 공동체성을 진단할 수 있는 질문들도 제시하기 때문에, '12제자 비전'을 함께 품고, 이 책을 교재로 사용하여 소그룹에서 함께 토의해보아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당신은 연결되어 있나요?" 이 단순한 질문이 엄청난 무게로 우리 가슴에 심겨지는 느낌이 들 때, 그때가 바로 성령께서 우리 가운데서 일하고 계시는 때임을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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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청 신약 - 들음에서 앎으로, 앎에서 삶으로 이어지는 성경 공부
박영호 지음 / 두란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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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쏙 빠져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해 본 적이 언제인가?

'쾌청'(快聽)이라는 말은 그런 마음으로 듣자는 것이다.

"듣기는 속히 하라"는 야고보서 말씀에서 나왔다(약 1:19).

'속히 한다'는 말은 기쁘게, 반갑고 설레는 마음으로 한다는 뜻이다(7).

얼마 전, 친구가 주식창을 들여다 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이것은 사탄의 무서운 전략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숫자가 빠르게 오르고 내리는 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며, 사탄이 우리의 시선을 어떻게 빼앗아 가고 있는지가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고정시켜야 할 우리의 시선, 하나님께 드려야 할 우리의 시선을 이런 식으로 빼앗아 붙들어두고 있구나 싶었던 것입니다.

요즘 '교회도 현실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인들을 종종 보는데, 성도의 영적 감각이 얼마나 죽어 있고, 잠들어 있는지를 생각하면, 아득할 지경입니다. 말씀으로 나의 오늘을 해석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다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세상에 빼앗기고 있는 우리의 시선을 말씀 앞으로 도로 찾아오고 싶은데, 그것이 참 어렵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일에 도무지 흥미를 느끼지 못하거나, 아예 관심이 없거나, 한 두번 시도하다 멀어지는 성도들을 어떻게 도와야 하는지가 늘 고민인데, <쾌청 신약>에서 한 가지 힌트를 얻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읽고 듣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하는 것입니다! 시편 1편에,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하는 것은, 의무가 아니라, 큰 즐거움이라는 것을 <쾌청 신약>이 다시 한 번 일깨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이 책 한 권을 다 읽어가는 내내, 말씀을 듣고 알아가는 즐거움이 충만했습니다!



"우주는 원자가 아니라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The Universe is made of stories, not of atoms).

미국의 시인 뮤리엘 루카이저의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야기로 다가온다(15).

<쾌청 신약>은 4복음서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신약성경의 구조와 주제를 큰그림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부담스럽지 않은 분량에, 시각적인 자료(모형)까지 사용하여, 한눈에 "쏙" 이해되도록 가르쳐주는, 매우 탁월한 강의입니다! <쾌청 신약>을 읽으며 깊이 반성하게 된 것은, 성경을 재미없게 가르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잘못인가(어쩌면 죄) 하는 점이었습니다. <쾌청 신약>은 이미 알고 있는 성경 지식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는데, 핵심을 짚어주는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들입니다.

아기 예수님이 어디에서 태어나셨는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로부터’는 알고 있어야 사도가 될 수 있었다(31).

성탄절 없는 교회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난과 부활을 모르는 교회는 불가능하다(33).

도마복음에서는 도마는 예외적으로 탁월하게, 다른 제자들은 모두 어리석게 묘사된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이는 것이 그리스도의 제자의 품격이라 한다면,

자신에게 관심을 집중시킨다는 점에서 도마복음은 격이 떨어지는 책이라 할 수 있다(91).

<쾌청 신약>에서 가장 즐거이 들었던 가르침은,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의 차이였습니다. 사도행전의 바울은, 달변가 헤르메스로 불릴 정도로 설득력 있고 유려한 설교를 전하며, 상당한 능력을 가진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비범한 힘과 언변을 가진,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기는 인물로 소개한다"(129). 그러나 바울이라는 동일 인물에 대해 바울서신과 사도행전의 묘사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바울이 정말 많은 고민과 갈등에 휩싸여 있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지 못할 때가 많았으며, 그런 자신의 모습 때문에 불안하기도 했음을 알게 된다"(129).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울은 달변가이지만, 바울 스스로는 말을 잘 못하라는 사람이어서 사역자로서 부족하다는 생각을 무척 많이 하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진실일까요?

"사도행전의 바울"과 "서신서의 바울"의 차이를 묵상하며, 적잖이 위로를 받았습니다. 스스로 부족한 사역자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고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운 심정으로 분투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통해서도 보배로운 복음의 씨앗을 뿌리며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열매를 거두실 수 있다는 믿음이 더 확고해졌기 때문입니다!

<쾌청 신약>을 읽으며, 탁월한 설교는 탁월한 성경 해석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뻔한) 진리를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하는데, 그 힘써 여호와를 아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를 생각하면, 우리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이 많으시고 멋진 하나님이신가 절로 감탄하게 됩니다! 저자 박영호 강사님은 "즐거이 듣는다면, 그것은 필히 담대한 실천으로 이어질 것이다"라고 확신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이 듣는 것 자체가 이미 담대한 실천이었습니다! <쾌청 신약>은 말씀이 우리 안에서 일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잘 가르쳐주는 책입니다. 정말 재미있게 잘 들었다고 저자 선생님께 꼭 감사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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