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마르티 레임바흐 지음, 최유나 옮김 / 현대문화센터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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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지 않는 사랑

<꼭 다문 입술이 미소로 바뀔 때>라는 책이 있다. 자폐 진단을 받은 아들을 헌신적인 사랑과 노력으로 대학에 입학시킨 어머니의 실화이다. 저자 이숙형님과 그 아들 윤서와 나는 같은 교회에 다닌다. 저자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하는 <다니엘>을 읽으며, 나는 저자에게 '윤서'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 윤서는 지금 대학원까지 졸업하고 예쁜 아가씨와 결혼도 하여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다니엘>의 주인공 '멜라니'는 완변학 영국 신사와 결혼한 미국 여성이다. 남편 스티븐과 사랑에 빠져 영국에 정착했고, 사랑스러운 딸 '에밀리'와 귀여운 아들 '다니엘'도 낳았다. 그런데 멜라니는 정체 모를 두려움 때문에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무엇이 문제일까?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인가? 아들? 언제부터인가 아들 다니엘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다니엘이 자폐증이라는 진단을 받기 전까지 절대 그런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다니엘'이 자폐증 진단을 받으면서부터 모든 것이 엉망이 되기 시작한다. '학교'를 신뢰하지 않는 멜라니는 아들을 치료하기 위한 방법을 스스로 찾아 나선다.

<다니엘> 원작이 발간된 연도가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다니엘의 자폐증 진단이 내려질 때, 자폐증이 유전적인 원인이 있다는 진단이 나온다(내가 알기로 자폐증의 선천적인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것으로 안다). 엄마 에밀리는 자신의 집안 내력에 자폐증을 앓는 가족은 없었다고 저항해보지만, 아버지의 자살과 엄마의 죽음, 그리고 남자친구의 교통사고로 자신이 겪었던 우울증이 아들 다니엘에게 영향을 주었는지 죄책감에 시달린다. 또 어렸을 때 접종한 백신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은 의심을 떨쳐버릴 수가 없어 괴로워한다. 멜라니가 아들 다니엘의 치료에 집착하면 할수록 남편과의 사이는 더욱 소원해진다. 남편은 결국 집을 나가버린다.

자신의 두 아이를 바라보는 엄마 '멜라니'의 감정선이 너무나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되어 책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투명한 살갗을 가진 양 그녀의 내면이 그대로 들여다 보인다. 섬세하면서도 위태로운 이 여인은 금방이라도 지쳐 무너져내릴 것 같은데 아슬아슬 잘 버텨낸다. 

나는 자폐증을 앓는 아이들과 그 아이들을 돌보는 어머니들, 그리고 그들이 받는 특수교육을 오랫동안 옆에서 지켜봤다. 보통의 경우 자녀에게 장애가 있으면 그것은 온전히 '엄마'의 몫이 된다. 마치 그런 자녀를 낳은 것이 엄마의 잘못이라도 되는냥 죄인처럼 살아가는 엄마가 많다. 사회적 안전기반을 전적으로 '가족'(가정)에게 의지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이 경우에도 모든 것을 가족이 떠안아야 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떠안게 된다. 아이가 중증 장애인으로 판명받는 순간 엄마의 시간, 엄마의 사생활, 아니 엄마의 인생은 사라진다. 장애아를 키우는 엄마들에게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정기적인 휴식이 얼마나 간절한지를 옆에서 지켜봐서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멜라니의 남편의 태도나 김수연 작가의 <부모님전상서>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다른 가족에게는 소원한 채 한 아이에게만 집중하는 엄마는 가족 안에서 또다른 불만의 대상이 되어버리곤 한다.  

어머니들과 대화를 나눠보면, 가장 견디기 힘든 것이 사람들의 시선이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어머니들은 별 의미없는 시선에도 곧잘 상처를 받곤 한다. 우리의 의미 없는 시선, 무심한 말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심장을 짓밟는 상처가 될 수도 있다.

특수교육으로 호전되던 아이에게 퇴행이 나타나자 모든 것이 끝장난 듯한 절망으로 몹시 울던 한 어머니의 눈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그 어머니가 포기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문제가 생겼다고 포기해버리는 것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니엘>을 통해 '멜라니'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엄마의 광기어린 집착이 아니라, 바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이다. 지켜주고 싶은 사랑,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에게 일어난 문제를 함께 열심히 싸워 주는 것!

멜라니가 남편 스티브에게 하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만약 다니엘이 아니고 당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도 
난 지금처럼 열심히 싸웠을 거야.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린다 해도."

 (...)

"하지만 당신은 나를 위해 그만큼 열심히 싸우진 않겠지. 
만약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말이야"(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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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수국水國 프로젝트 - 경제를 일으켜 조선을 구하다 한국사를 바꾼 인물 2
장한식 글, 조창배 그림 / 행복한나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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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 안이 ’수국’(水國)을 건설하여, 경제전쟁에서 승리하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는 최후의 한마디를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한 충무공 이순신. 그는 갔지만, 우리의 가슴에, 그리고 전 세계인의 가슴에 위대한 영웅으로 아직도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순신의 죽음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왠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음을 제기하는 학자와 가설이 많다.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경제를 일으켜 조선을 구하다>의 저자 장한식도 그런 의문을 가지고 밝히는 바에 따르면, 조정의 공식문서인 <실록>은 이순신이 ’적환’(적의 탄환)을 맞았다고 적고 있지만,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쓴 <행록>에는 ’비환’(날아든 탄환)에 맞았다고 적혀있다. ’홀중비환’(忽中飛丸), 즉 ’문득 날아든 탄환에 맞았다’는 것이다(366-374). 적환이라는 말 대신 굳이 비환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뭔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한가지 더 재밌는 것은 이순신의 ’사망’을 처음 보고 받던 날, 선조의 반응이다. 선조 임금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반응을 보였다. 이순신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임금의 답변은 "알았다"이다. 조선 최고의 무훈을 세우고, 풍전등화 같았던 왕조를 지켜낸 제일가는 충신이 죽었는데도 "알았다"는 무미건조한 한마디뿐이다. 이순신에 대한 임금의 심기가 불편해보인다. 그러나 충무공이 전사한지 엿새 후에는 완전히 대조적인 반응을 보인다. 임금의 태도가 크게 바뀌어 이순신에게 극도의 호의를 표시한다. 살아있는 이순신은 두렵고도 미운 존재지만 죽은 이순신은 그럴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375-383).

선조는 충신 이순신을 왜 그리도 두려워하고 또 미워했을까?

장한식의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경제를 일으켜 조선을 구하다>는 이순신이 한 나라의 군주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바다를 버린 나라’ 조선을 대신하여,  조선 안이 또다른 나라 ’수국’(水國)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수국’(水國)이라는 표현은 이순신이 한산도 군영을 ’수국’에 비유한 한시에서 따온 말이다.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경제를 일으켜 조선을 구하다>는 바로 이 수국에 초점을 맞추어, CEO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재구성하고, 그가 세운 수국의 위용을 복원했다. 

이 책은 이순신이 7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 ’군(軍), 산(産), 정(政)’ 복합체라고 할 수 있는 수국 건설로, 전쟁의 물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그동안 이순신은 탁월한 전략가로, 백성을 진정으로 사랑한 지도자로, 거북선이라는 획기적인 상품을 만들어낸 발명가로, 정직하고 소신있는 정치가로, 또한 기적같은 불패 신화를 이룩한 리더십과 리더로 다양한 각도에서 재조명되고 그 위대함이 칭송되어 왔는데, 이번엔 경제전문가이다! 장한식은 이순신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즉 버려진 해변의 빈 땅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세운 대 경제인이자 건국영웅으로 이순신을 재탄생시켰다.

이순신에 관한 글을 읽을 때마다, 이렇게 완벽한 인물도 드물다 싶을 정도인데, 이 책을 읽으니 그의 ’주도면밀’함이 무서울 정도이다. 해전의 승패는 육상기지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알았던 이순신은 해변을 개간하여 영역을 확보하고, 경제적 자립을 도모한다. 해변의 땅을 일궈 벼와 보리를 경작하고, 바다에 나가 물고기를 잡고, 소금을 굽고, 칡을 캐고, 나아가 국내외 해상무역까지 추진해 군량미를 확충하고, 전투에 소요될 재원을 마련하며, 전선과 무기 제조를 위한 군수공업의 진흥에까지 착수했다. 한산수국에 잉여생산물이 생기면 오로지 군수물자 생산에 투입했다. 그는 해전만이 아니라, 경제전쟁의 중요성을 간파하고 그것을 직접 진두진휘하였으며, 전쟁비용까지 그의 수국에서 직접 조달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조정의 군수지원 없이도 스스로 백성을 불러모아 산업을 일으키고, 자립한 경제로 군사를 먹이고 입히고 또 무장하였다. 삼도수군이 보유한 여러 농장과 어장, 조선소와 공작소들의 총제적인 규모는 참으로 웅장하였다. 이 같은 군산복합 경영체야말로 한산수국을 뒷받침하는 튼튼한 물적 토대였고, 전란으로 결딴난 조선국이 그나마 형체를 유지할 수 있는 근본 동력이었다고 하겠다"(174).

이 책을 통해 새롭게 알게 된 의외의 사실은 이순신의 인사정책이다. 이순신은 강력한 인재풀을 갖추었는데, 거기에는 세 가지 원칙이 있었다. "삼남의 해변을 통제사의 배타적 영역으로 확보해가는 동시에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강력한 인적기반을 마련하였다. 그 첫째는 수군의 독자적인 무과를 실시하는 것이었고, 둘째는 유능한 인재는 반드시 휘하로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또 무능, 부패 관리는 조정의 권위를 빌어서라도 교체하거나 벌칙을 안김으로써 해변의 인사권을 자신의 의지대로 행사하였다"(178).

이순신에게 충성하는 세력은 점점 강해져가는 반면 그의 눈밖에 난 인물은 수군에서 견딜 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그리는 장군 이순신의 이미지는 부하의 실수에도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으며, 인자한 모습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무능하거나 자신의 지시를 이행하지 않는 인물들은 가차 없이 대하였다. 본인에게 교체권한이 없을 경우에는 조정에 장계를 해서라도 그 직을 갈았다"(198)고 한다. 실로 의외의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직경영을 배울 때, 리더가 해야 할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가 무임승차자를 가려 내고, 상벌을 명확히 하는 것이라는 이론을 배웠다. 자신의 명령을 불이행하거나 무능하고 부패한 인물들에게 가차 없었다는 대목은 전쟁에 나선 장군으로서의 위용과 함께, 무조건 용서하고 포용적인 사람이 좋은 인격이고 좋은 리더라는 착한아이컴플렉스적인 단편적인 사고를 시원하게 깨준다.

제아무리 임금이지만 선조가 신하 이순신을 꺼리고 경계하는 마음도 이해가 간다. 이순신이 아무리 충성을 맹세한다 해도 스스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최고 리더라 할 수 있는 임금으로서 아마 그의 모든 것을 못견디게 질투했을 것이다. 역사는 가정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선조가 자신의 권좌보다 나라와 백성을 더욱 위하는 임금이었다면, 더 필요한 인물이 누구인지 스스로 비켜설 줄 아는 인물이었다면, 아니 적어도 충성을 맹세하는 신하를 믿어줄 배포라도 가진 임금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장한식의 <이순신 수국 프로젝트, 경제를 일으켜 조선을 구하다>은 드라마를 ’읽는 듯’한 재미를 준다. 직접 인용하고 있는 풍부한 사료는 마치 사극의 해설자의 목소리 같다. 7년 전쟁의 시작에서 끝까지를 추적하며, 이순신의 여러 가지 면모 중에서 집중적인 관심을 받지 못했던 수국의 건설과 경제전쟁, 그리고 국토의 중요한 영역으로서 해양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는 유익하고 의미 있는 책 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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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너프 : 불만족의 심리학
존 네이시 지음, 강미경 옮김 / 예담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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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간의 타락은 만족할 줄 모르는 ’욕심’ 때문이었다.
태초에 인간은 모든 것이 풍족한 에덴동산에서 부족함이 없이 살았다.
그러나 딱 한 가지!  
모든 것을 가졌고, 모든 것을 누릴 수 있었고, 모든 것이 가했는데,
단 하나 금지된 것,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하나가 문제였다.
인간은 충족하게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열매를 외면하고,
금지된 그 나무열매 하나를 탐하다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이것은 성경의 이야기이지만, 
신앙을 떠나 아주 오랜 세월 인류가 간직해온 신화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존 네이시의 <이너프>(불만족의 심리학)은 
"모든 것이 넘쳐나는 오버홀릭(overholic) 세상"에 살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그 위험성을 경고하는 책이다.
저자는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할 줄 모르는 문화를 창조해낸 인류에게
이제 ’만족의 철학’ 또는 ’만족주의’(enoughism)라는 새로운 개념의 개발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렇게 경고한다.
"현대인들은 전례 없는 풍요를 누리고 있으면서도 
심한 스트레스, 우울증, 신경쇠약 등과 같은 증세를 보이고 있다. 
’더 많이’에서 ’충분해’로 바뀌어야 한다. 만족이 곧 ’티핑 포인트’다.
이 한계를 넘어서서 더 많은 것을 원한다면, 우리의 삶은 더 나빠질 것이다"(8).


저자는 이 불만족의 심리학이 "원시본능"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궁핍과 위협으로 점철된 몇천 년의 세월을 극복해오면서 터득한 생존 전략이,
이제는 오히려 주어진 풍요를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가고 있다.
저 먼 옛날 대초원에 살았던 우리 조상은,
마치 삶 전체가 달려 있기라도 한 듯 모든 상황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했다.
사실 그래야 생존할 수 있었다"(24).

저자는 이러한 원시본능 때문에 정보도, 음식도, 일과 소유도 
계속해서 모아놓고 쌓아두려는 심리가 작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저자와 의견을 달리한다.
원시적인 삶의 양식을 지금도 보존하고 있는 아프리카 부족을 보면,
오히려 현대인들보다 여가 시간도 많고, 삶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부시팬도 배가 고플 때 사냥을 나가고,
칼라하리 사막의 쿵!족 여성 이야기 <니사>도 초원에 널린 열매를 따먹으며,
현대인들보다 더 여유롭게 살아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옛조상들이 원시본능으로 일중독에 시달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생존과 미래에 대한 불안심리는 오히려 현대인들에게 더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는 듯 하다.
나는 문제의 원인이 ’성장’과 ’성공’에 대한 과도한 가치집약과 집착,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성장이 미덕이고, 성공이 행복이라는 잘못된 믿음이 탐욕과 만난 결과가,
모든 것이 넘쳐나는 오버홀릭 세상에 살면서도 만족함을 모르게 하는 것이다.

<이너프>가 제시하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들로 인해 바쁜 일상을 살다 보니,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삶의 태도가 얼마나 위험한지를 충분히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과도하게 차고 넘쳐서 오히려 ’다이어트’가 필요한 지경인데,
현대인들이 여전히 ’더 많이’를 외치며,
집착과 욕심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일곱 가지 대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정보중독, 폭식, 물질적 탐욕, 일중독, 선택의 고문, 
지나친 행복 추구, 과속성장"이다.

계속 이렇게 살다간 인류는 자멸을 자초하고,
저자의 말대로 결국 지구에는 바퀴벌레만 살아남게 되는 날이 닥쳐오고야 말 것이다.

저자는 이제 "정지 매커니즘", 즉 "충분해"라고 느끼고 말하고 실천하는
"만족주의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의 결론이 다소 엉뚱하다.
만족한 삶을 위해 저자가 강력하게 강조하는 실천전략은 ’명상’이다.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조바심을 버리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종교적 영성 훈련과 같은 ’명상’의 시간을 권한다.
(이 대목에서 뉴에이지 운동의 냄새가 살짝 풍긴다.)

"더 많이"와 "충분해"의 싸움,
노예처럼 매여 있는 불만족한 생활에서 탈출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나눔’에 해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눔, 이것이 가장 강력한 실천전략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원론적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참된 만족은 내 것을 나누는 마음 안에 있다고 생각한다.
더 가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보다,
내가 가진 것을 누군가와 나누는 적극적인 마음과 습관이 
과도한 소유욕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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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적용하는 구약 - 김중기 교수의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396가지 성경 이야기
김중기 지음 / 두란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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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늘 여기, 내 삶의 자리에서 읽는 구약성경

구약성경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생경한 느낌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성경’, 즉 생전 처음 ’경전’을 대하면서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최대한 경건한 자세를 유지하며,
마음 가득 경외심을 가지고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나갔다.
그런데 곧 시들해졌다.
흥미로운 내용들도 있었지만 경전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좀 미심쩍은
사사롭고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많았고, 
또 어떤 부분은 통째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 계속 되기도 했다.
나중에 배워게 알게 되었지만, 언어의 장벽, 역사의 장벽, 문화의 장벽, 지리의 장벽 등
구약성경에는 뛰어넘어야 할 벽이, 제거해야 할 장벽이 너무 많았다.
구약성경의 삶의 자리는 ’오늘’ 내가 서 있는 곳과 너무나 먼 곳에 있었다.
그리고 신앙생활이 계속되고, 신앙이 성장하면서부터는
통독을 목표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은 그냥 음독만 하면서 그렇게 쭉쭉 읽어나갔다.
이후로 꽤 오랜 시간을 성경과 함께하며 신앙생활을 해오고 있는데,
일부러 찾아 공부하지 않으면 지금도 여전히 모른 채로 남아 있는 성경 본문이 있다.
한 권의 책을 이렇게 오랜 세월 반복해서 읽었는데,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깨달아지고,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기도 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많은 것이 참 신기하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고, 어려운 것 같으면서도 쉽고, 
성경은 정말 신비로운 책이다.

구약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두란노를 통해 내가 만난 반가운 책, 
<삶에 적용하는 구약>은 김중기 교수님이 들려주시는 "구약 이야기"이다.
이 책은 김중기 교수님이 ’입’으로 들려주었던 구약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교수님은 구약성경은 이야기이고, 그러니 우리도 구약을 이야기로 읽자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세상을 이야기(말씀)로 창조하시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시는 것 같습니다.
성경은 온통 이야기로 꽉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끝나지요"(6).

구약전체를 여섯 등분하여 주제별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삶에 적용하는 구약>은
"그때 거기서" 말씀하신 하나님과 "오늘 여기서" 다시 만나며,
"그때 그들에게" 들려주신 하나님의 이야기(말씀)가 
그때 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오늘 나에게" 살아 움직이는 말씀이 되도록 해준다.
이 한 권에 우주가 있고, 역사가 있고, 인생이 있고, 그리고 내가 있고, 미래가 있다.

1부 <창조의 경륜>은 전우주적인 창조를 시작으로, 
그 창조주와 한 사람과의 만남이 시작되는 이야기이다.
성경의 첫 단어 "태초에"는 "삶의 태초"와 연결되며,
하나님의 음성이 우주와 시간를 뚫고 나의 삶으로, 나의 영혼으로 밀착해들어온다.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만남, 다시 말해 신앙 사건들의 모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사건들이 대부분 병들고 가난하고 억눌림 당한 ’약자들을 통해’ 일어났다"(54).

김중기 교수님은 패미니스트가 틀림없다.
김중기 교수님이 패미니스트인 것은, 바로 성경 자체가 패미니즘적이기 때문이다!
<삶에 적용하는 구약>은 하나님과 여성의 만남, 여성의 신앙에 특별하게 주목한다.
 "약자들의 신앙 사건을 깊이 들여다보면 약자들 중의 약자는 
역시 가부장제도 속에서 억눌림 당한 여성들이었으며, 
그들의 고통이 컸던 만큼 그들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역사 또한 
크게 일어났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55).


우리가 믿음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일컫지만 맨 처음의 신앙 사건과 더불어
신앙고백을 했던 사람은 아브라함이 아닌 여종 하갈(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여종)이었고,
이 세상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여인, 
그들이 바로 히브리 여인들이었다고 증언한다. 
구약성경은 히브리 여인들의 믿음을 증거하는 많은 이야기를 유산으로 간직하고 있다.
(다말, 십보라, 드보라, 룻, 한나, 밧세바, 수넴의 귀한 연인, 에스더 등)

한 개인의 신앙체험은 종종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온 백성이 함께 신앙체험을 하기는 쉽지 않다. 
2부 <이스라엘 공동체의 신앙 사건>은 하나님과 한 사람과의 만남이
어떻게 개인과 가족을 넘어 공동체로 이어지는지 공동체가 공유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3부 <삶 속에 함께하시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만난 개인과 공동체가 
하나님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삶’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앙의 의식화 못지 않게 신앙의 생활화가 중요하다(263).

4부 <네게 새 힘을 주리라>는 역사와 민족의 지도자로 쓰임 받은 인물들을 통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와 통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5부 <네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하나님과 믿는 자의 소통에 관한 이야기이다.
인생의 의미는 하나님을 알 때 찾아진다.
"인간의 삶은 그것이 고난이든 기쁨이든, 
하나님과 더불어 살아갈 때에만 의미가 있다"(384).


6부 <네 영을 네게 부어주리라>는 장차 이루어질 일에 관한 우주적인 선포이다. 

익숙하지만 또 전혀 새로운 이야기로 다가오는 <삶에 적용하는 구약>을 읽다 보니,
총 여섯 가지 주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삶에 적용하는 구약>의 핵심은,
구약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메시지가 "임마누엘"이라고 말해주는 듯 하다.
책은 축복의 핵심적인 요소가 임마누엘이라고 해석하고 적용한다.
개인 신앙이든, 공동체 신앙이든, 과거, 현재, 미래까지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면 불가능한 일이 없다.
하나님과 함께 일하면 반드시 승리한다. 이 믿음이 성공의 열쇠이다.
"임마누엘"의 축복은 하나님의 직접 개입하셔서 나의 삶을 바꾸시는,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다.

구약의 이야기(말씀)을 오늘 나의 삶에 끌어다 적용해주는 <삶에 적용하는 구약>을 통해
공간적으로는 우주적이고, 시간적으로는 시작과 끝이 되시는 하나님의 역사,
그 광대하고 위대하신 분이 그때 거기서 말씀하셨듯이, 
오늘 여기 나에게도 이야기(말씀)으로 찾아오신다.
그 이야기는 우주와 시간 안에 작은 먼지와 같은 나와 내 삶에 개입해 들어오고, 
나의 삶을 바꾸는 놀라운 힘이요, 능력이요, 생명이다.
그리고 이 작은 변화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스리고, 변화시키며, 완성시키는 동력이 된다는 것에 감격한다.
책을 덮으며 이렇게 신앙고백을 해본다.
"내 삶의 의미이시며, 나의 전부이시며, 나의 모든 것 되시는 하나님,
하나님과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은혜!
그 은혜로 나의 영혼이 만족하고 만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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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밭에 달 뜨면
백동호 지음 / 밝은세상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진실 규명.
요즘 이 말처럼 맥 없이 느껴지는 말도 없다.
거대한 권력 앞에 힘 없는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나는 
아닌 것을 보고도 아니라고 말 못하고,
옳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옳지 않다고 말 못하고,
옳은 것도 옳다고 말하지 못한다.
미친 사람처럼 크게 떠든다 해도 들어줄 사람도 없지만 말이다.

그러나 귀하게 태어났든 천하게 태어났든 제 한 목숨 귀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힘이 있든 없든 이유없이 짓밟히고 무고하게 죽임을 당했다면 
억울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가해자를 찾아내어 똑같은 고통을 안겨 주는 것?
아니면 잘못을 시인하게 하고 사과를 받아내는 것?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비록 하찮게 여겨진 목숨이지만,
억울하게 죽어간 목숨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주고,
역사 속에서 은밀하게 자행된 만행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사실 그대로 
온 천하가, 아니 누구라도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을까.

<보리밭에 달 뜨면>은 일제치하 시절 "소록도에서 자행된 한센인 생체실험"을 고발하는,
역사의 진실을 파헤치는 소설이다.
1만 이상이 생체실험으로 끔찍하고 참혹하게 죽어갔는데도,
그 진실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아니, 관심조차 갖는 사람이 없다.
저자 백동호는 영화 <실미도>의 원작자이다.
백동호는 <실미도>만큼이나, 아니 <실미도> 이상으로 불쾌하고 끔찍한,
그리고 누군가가 역사에 묻어버린 그 어둡고 불편한 진실을 캐내기 위해 
10년의 세월을 흘려보냈다고 한다.

잠깐 딴소리를 하면 저자의 이력이 독특하다.
문교부(학교)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법무부(교도소)에서 3천 권이 넘는 책을 독파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공 한상혁이 살인으로 교도소에 수감되는 장면이 나오는데,
교도소 안에서 생활하는 캐릭터들의 그 리얼하면서 풍자적인 대사가 압권이다.
"참고 살다보면 시어머니 죽는 날도 있더라고, 
징역을 오래 살다보니 너 같은 놈도 만나는구나."(그중 가장 점잖은 표현으로 골랐다.)
비유와 직유가 하도 기발해서 참혹한 내용이지만, 
웃음으로 독자를 흡입하는 힘도 함께 지녔다.

저자는 <보리밭에 달 뜨면>에 인용된 신문기사, 잡지기사, 여러 참고문헌,
관련자 증언, 시대 상황 등을 치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하여 사실 그대로 옮겼다고 밝힌다.
그래서 우리가 마주해야 하는 진실은 고통스럽다.

주인공 한상혁은 부잣집 외아들로 태어나 귀하디 귀하게 자랐다.
그러나 소학교 5학년에 천형이라고 하는 한센병이 발명하여 
이후로 그의 삶은 좁고 어두운 ’다락방’이 전부가 된다.

나환자에 대한 두려움과 적대적인 거부반응은 일본과 한국이 유난하다고 한다.
그 주된 이유는 두 나라에만 나병에 인육이 특효라는 민간 속설이 전해져 왔고,
실제로 나환자들의 식인사건이 종종 발생했기 때문이란다(66).
일본의 정치인들이 나환자 강제격리 수용을 고집한 배경이 이것이다.
일제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서도 나환자 강제수용소를 건설한 장소가 물색 되었는데,
그때 낙점된 곳이 바로 소록도이다.
소록도가 낙점된 표면적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직접적인 이유는 나환자들이 도망치기 어려운 ’섬’이라는 데 있었다.

다랑방에 갇혀 살았으나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한상혁은
’나환자들의 낙원’이라고 하는 소록도로 스스로 찾아간다.
나병 발병 이후 처음으로 자유를 맛보고, 그곳에서 사랑도 하게 되는 한상혁.
그 짧은 행복과 사랑이 아프고 눈물겹다.
그들은 어떤 돌팔매질을 당하고, 천대를 받아도,
그렇게 어울려 ’인간’으로 살기를 꿈꿨으나 세상은 이미 그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신축된 감금실, 그곳에서 벌어진 생체실험은 
너무나 처참해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고 싶다.
슬프거나, 분노하거나, 무관심하거나, 다시 묻어두거나, ... 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한상혁은 소록도를 탈출했지만,
나병 환자에 대한 저주와 무조건식 적대감에서는 끝내 탈출하지 못했다.

형 가인에게 억울한 죽음을 당한 아벨의 핏소리가 땅에서 호소한다고 했던가.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꽃처럼 붉은 울음이 밤새,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만 같다.
한국 사람만의 단어라는 그 한(恨)으로 썩어 문드러진 온 몸과 마음으로 말이다.

해하는 자와 당하는 자보다 지켜보는 자의 고통이 더 크다고 하면 오만일까.
영화 <실미도>를 보고 며칠 잠을 자지 못했던 것처럼,
세상에는 이런 삶도, 이런 생명도, 이렇게 서러운 사실도 존재하는 구나, 
그리고 그것을 캐내고 알리는 사람도,
그리고 그것을 지켜보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나도 존재하는 구나,
그렇게 며칠을 생각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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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은 2009-06-28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서평 잘 보고 갑니다. 저도 이 책을 접하고는 한참을 먹먹하게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