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이라고 할 만큼 기이한 시대를 만들어내고 붕괴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그 장본인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들 세대는 아니다.
그런데 취직도 못 하고 온갖 손해를 보는 것은 그들 세대다.
p.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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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겪는 고통에 자부심을 가지렴. 그 고통이 너를 다른사람보다 더 강하게 만들어 준단다."
p.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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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어법과 양식이 곧 음악은 아니다. 그것은 언어일 뿐이다.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것은 언어가 아니라 그 언어에 담긴 작곡가의 음악혼이다. 그것이 절절해서 감동하는 것이다.
p.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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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전달자 블루픽션 (비룡소 청소년 문학선) 20
로이스 로리 지음, 장은수 옮김 / 비룡소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것이 항상 같아야 하는 통제된 사회

모든 기초가족은 남편, 아내, 아들, 딸 네 명이다. 해마다 50명씩 태어나고 아이들은 '산모'가 낳는다. 아이는 친어머니인 산모가 키우지 않고 기초 가족으로 배정된다. 아이들은 매월 12월에 한꺼번에 나이를 먹고 한 살이 늘어날 때마다 똑같은 사회적 역할과 권리가 주어진다. 아홉 살이 되면 유일한 교통 수단인 자전거를 받고, 열두 살이 되면 직위(직업)을 배정받는다.


날씨는 항상 쾌적하다. 언덕도 없고 모든 땅은 평지다. 음악도 없고 색깔도 없다. 가족들은 아침에 일어나면 전날 꾸었던 꿈을 나누는 시간을 갖는다. 모든 행동은 규칙에 따라야 한다. 심지어 서로 나누는 대화에도 규칙이 있다. 규칙을 세 번 어기면 '임무 해제'당한다. 감정과 본능은 철저히 통제되고 개성은 억압된다.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규칙위반이며 거울을 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회색의 세계. 이 심심할 것같은 세계에 평범하게 살던 조너스가 열두 살이 되었고, 직위를 받는다. 그런데 조너스가 받은 직위는 '기억 보관자'. 단 한 명만 받을 수 있는 영예로운 자리라고 한다. 하지만 기억보관자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조너스는 모른다. 조너스 뿐만 아니다. 누구도 모른다. 오로지 기억보관자만이 알 뿐이다. 조너스는 두려운 마음으로 자신에게 기억을 전달해 줄 전대 기억보관자에게 훈련을 받는다. 도대체 기억보관자가 하는 일은 뭘까?


로이스 로리 Lois Lowry 1937 ~ . 미국의 작가. 올해 나이 82세인데 여전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형적인 디스토피아를 그린 미래 SF 소설

책의 표지가 상당히 인상적이다. 기억보관자인 듯한 사람이 먼 곳을 응시하고 찢어진 한 귀퉁이 틈으로 붉은 빛 숲이 보인다. 생경한 책이고 작가도 처음 보는 사람인데 '청소년을 위한'이라고 씌여져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다. 근미래라고 하기엔 꽤 먼 미래를 그린 소설인데 디스토피아를 표현한다면 흔하게 볼 수 있는 통제된 전체사회이다. 꽤 먼 미래라고 생각한 이유는 사람들의 감정과 욕구를 완벽하게 통제할 뿐만 아니라 시각과 청각까지 통제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억보관자는 수십년씩 활동하는데 언제부터 그랬는지 표시되지 않으니 최소한 몇 백년 이후의 세계다. 성적 욕구까지 통제할 정도로 감정을 통제하는 것은 감정의 급격한 변화에 의해서 생길 수 있는 전쟁을 포함한 분쟁을 없애기 위함이다. 하지만 고통을 제거하니 행복감까지 함께 제거되어 버린다. 진정한 고통에서 벗어난 대신에 사랑, 행복 등의 감정까지 제거됐다. 누가 그렇게까지 했는지는 모른다. 그냥 그런 사회이다.


조너선이 기억을 전달받기 전에는 모든 세상이 회색빛으로만 보인다. 음악도 들을 수 없다. 예쁜 여자친구가 있어도 예쁜 줄도 모른다.

기억보관자와 기억전달자

다른 디스토피아 소설에 비해 특이한 점은 장로들, 즉 권력자들마저도 이 규칙과 통제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 모든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딱 한 사람이 바로 기억보유자. 기억보유자는 여러 대를 거쳐서 제거되기 전의 모든 기억과 감정, 경험을 보관하고 있다. 기억보관자가 되는 것은 '사물 너머를 보는 능력'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사물 너머를 보는 능력'이 있는 조너스는 회색으로만 보이는 세상을 색깔로 구별할 수 있고, 전대 기억보유자(이제는 조너스에게 기억을 물려 줘야 하기 때문에 기억전달자가 되었다)는 음악을 느낄 수 있다. 기억보관자는 세계에서 결정할 수 없는 일이 발생했을 때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적절한 조언을 한다. 모든 사람의 감정을 없애서 자유의지와 책임을 빼앗은 대신 그 모든 자유와 책임을 기억보관자에게 담당하도록 한다. 영예로운 자리지만 두려운 자리이며, 행복하면서 고통스러운 자리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기억'을 친구들과 나눌 수도 없다. 그래서 끝없이 고독한 자리이기도 하다.


조너선은 기억전달자(전대 기억보유자)에게 기억을 전달받는다. 기억을 전달받으면 그 기억의 감정을 그대로 경험하게 되어서 행복, 기쁨, 고통, 괴로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기억전달자가 전달한 기억은 기억전달자에게서는 사라진다. 그런데 제목이 기억보관자가 아니다.

흔하지만 독창적인 디스토피아

전체주의를 보여주는 디스토피아 미래는 너무 흔한 소재이다. '또야?'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 생활모습을 굉장히 상세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설득력이 있다. 도대체 이런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단서도 없어서 설득력이 없어 보이지만 충분히 즐길 수 있을만큼 설명한다. 흔한 소재 속에서 빛을 발하는 요소가 대대로 기억을 보관하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다. 이미 수세대를 거친 유일한 감정노동자. 조너스는 어떤 한 동네 또는 도시에 살고 있는데 이 도시는 사회 전체가 아니다. 총 인구는 아무리 많아 봐야 50 명X100 세 = 5,000 명을 넘지 않을 것이다. 아무런 말썽이 없었던 기억보관자 계승과정에서 우리의 주인공 조너선은 말썽을 부리고 마을을 탈출한다. 그리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원래 살던 도시와 다른 모습을 가진 지형이 나온다. 아마도 이 도시를 벗어나면 다른 모습을 가진 도시가 있는 것 같다.


열린 결말이다. '임무 해제'에 처한 가브리엘을 자전거에 태우고 탈출한 조너스가 어떤 곳에도 도착하지 못하고 소설이 끝난다. 완전한 한 편의 이야기인 줄 알았던 소설에 후속편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살짝 짜증난다. 내가 미리 알지 못했던 것이니까 소설가가 잘못한 건 아니다. 로이스 로리의 미래 4부작 소설 중 한 편이라고 한다. 그런데 직접 연결이 되는 건지 나중에 조너스가 카메오 출현하는 것지는 잘 모르겠다. 재미가 없었으면 집어던지고 말겠는데 꽤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아마도 다음 편도 읽을 것 같다. 떡밥회수는 제대로 해 주려나?


같은 이름으로 영화가 개봉되었다는 건 책을 읽고나서야 알았다. 국내 개봉 관람자 수는 약 10만 명. 흥행에 성공한 것 같지는 않은데 찾아서 보고 싶다. 출연진을 보니 엄청난 초호화 캐스팅.


★★★★

청소년용 SF소설이라고 하면 왠지 유치하다거나 단순할 것 같아서 읽기 꺼려질 수 있다. 청소년용 소설이라는 기준을 누가 만드는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진입장벽을 높이기만 하는게 아닌가 싶다. 청소년용 소설이라고 하는 많은 작품들, 예를 들자면 <어린 왕자>, <나의 라임오렌지 나무>, <모모>같은 소설들도 청소년용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두고두고 읽으면서 감동을 받기도 한다. 《기억전달자》 역시 어른이 읽어도 충분히 재미있고 내용도 어렵지 않아서 몰입해서 읽을 수 있고 페이지도 빨리 넘어간다. 다른 연작이 있긴 한데 아무래도 세계관이 같은 다른 주인공을 내세운 작품이지 싶다.


열린 결말이나 작품내 떡밥이 회수되지 않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은 불만이 있을테지만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으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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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딱 한 개만 더 현대문학 가가 형사 시리즈 개정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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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 것도 많고 읽을 것도 많다

올 한 해는 아무래도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을 가장 많이 읽었다. 펴내는 책마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작가,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듯 상식적이지 않은 속도로 소설을 발표하는 작가, 대체로 단편소설집보다는 장편소설이 더 좋은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한 나의 인상은 이렇다. 게이고의 소설은 몰입도가 좋고, 길지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다. 대체로 재미있는 편이라 좀 어렵거나 재미없는 책을 읽은 후에 읽으면 머리를 식힐 수 있어서 좋다. 머리가 복잡할 때 아무 생각없이 읽으면 복잡한 일을 잊을 수 있어서 좋다. 길어야 2~3일이면 한 권 읽을 수 있으니 책을 읽었다는 만족감도 얻을 수 있다. 효용성이 굉장히 좋다는 느낌?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아마도 올해 마지막으로 읽는 것 같은 게이고의 소설이다. (아직 사 놓고 읽지 않은 책이 많아 내년에도 게이고 소설을 몇 권 더 읽을 것 같다.)


히가시노 게이고. 東野圭吾 (1958 ~ ) 일본의 소설가. 가장 인기있는 소설가 중 한 명.


가가 형사가 주인공인 5편의 소설, 단편집이라니..

게이고의 유명한 시리즈 중에 하나인 '가가형사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아.. 첫 편을 읽기 시작하면서 살짝 탄식을 내뱉었다. 게이고가 쓴 소설 중 단편집도 몇 권 읽었지만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부분 재미없었고 설정도 무리가 많았다. 책에 대한 정보를 좀 알고 샀다면 이 책을 고르지는 않았을텐데.. 책이든 영화든 줄거리가 있는건 미리 정보를 확인하지 않는게 보통이라 이번에도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이전에 《악의》에서 한 번 만난 적이 있다. 《악의》는 내가 읽은 게이고가 쓴 소설 중에서도 가장 높은 평가를 하는 작품 중에 하나로 마치 형사 콜롬보같은 모습에 인상이 깊었다. 큰 키와 덩치, 냉정한 표정, 그리고 피의자에게 반복되는 끈질긴 질문, 사건 해결. 피의자일 때 만나면 뿌리치기 힘든 귀찮은 스타일을 가진 형사다. 물론 모든 형사가 끈질긴 추적을 하고 있겠지만..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에서도 가가 형사가 가진 캐릭터가 여지없이 드러난다.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은 불안한 마음으로 가가 형사에게 조사를 받는다. 조금씩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좁혀 들어오는 가가 형사. 애써서 막으려 하지만 결국 진실은 밝혀진다. 다섯 편이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이런 식으로 사건이 풀린다.


일본 배우 아베 히로시. 가가 형사 캐릭터를 많이 맡아 연기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본 배우.


가가 형사는 이러하다..

게이고는 가가 형사의 속내를 전혀 표현하지 않는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작가의 시점으로 쓴 소설이지만 작가는 오로지 범인(또는 그에 상당하는 조사받는 사람)이 불안해하는 심리만을 표현한다. 범인의 갈등, 불안감은 자세히 표현하면서 가가 형사는 냉정해 보이는 겉모습과 불쑥 튀어나오는 행동, 그리고 엉뚱해 보이는 질문만을 보여주기 때문에 범인과 가가 형사가 뚜렷하게 대비된다. 그래서 범인은 더 불안해 보이고 가가 형사는 더욱 더 냉정해 보인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은 심리트릭(이라고 하는게 맞는 건지는 모르겠지만)을 사용해서 독자를 더 헷갈리게 만든다. 게이고는 계속해서 범인의 속마음을 보여 주면서도 마치 범인이 아닌 것처럼 표현을 한다. 범인의 속마음을 볼 수 있는 독자는 이 사람이 범인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음을 속이지는 않을테니까. 하지만 가가 형사가 추리하는 과정을 보면서 '어?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큰 반전없이 그 사람이 범인이다. 첫 편을 읽고 나면 다음편부터는 이 수법이 눈에 보이지만 게이고는 세 번째 단편부터는 변화구를 날려서 독자에게 반전이 주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본격 추리소설이긴 하지만 범행을 밝히는 과정이 중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물론 이 과정도 흥미진진하게 진행이 되기는 한다. 하지만 읽다 보면 범인이 누군인지 비교적 빨리 알 수 있고 가장 중요한 단서는 각 소설의 마지막 즈음에 등장한다. 그러니까 상황을 주욱 보여주고 범인이 누구인지 맞춰보라는 것이 아니고 '범인은 이 사람인데 얼마나 불안해 하는지 보여줄께.'라고 말하는 소설이다. 게이고의 소설들이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높이는 것이 많은데 가가형사시리즈는 그 특성이 가장 잘 드러나 있다.


최근에 7권짜리 가가형사 시리즈 전면개정판 세트가 나온 것 같다. 탐은 나지만 이러다가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만 읽게 될 것 같아서 묻어 두었다. 그런데 이후에 가가형사 시리즈가 또 나왔다. 너무 작품이 많아서 따라 읽을 수가 없다. 게이고 소설만 읽을 수는 없으니..

의외로 좋은 단편소설집

처음에 밝혔듯이 게이고가 쓴 소설은 대체로 단편소설이 장편소설에 비해 떨어지는 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되도록 단편집은 잘 선택하지 않는다. 《거짓말, 딱 한 개만 더》는 그런 면에서 예상을 많이 벗어나는 책이다. 다른 단편집에 비해서 훨씬 낫다. 다섯 편이 모두 깔끔하게 끝이 나고 앞의 두 단편 이후 사건 전개가 익숙해 졌을 때 슬쩍 던져주는 3~5편의 반전도 좋다. 역시 쉽게 읽을 수 있고 몰입감이 뛰어난 것이야 정평이 나 있으니 두말할 필요도 없다.


★★★★

지금까지 읽어 본 게이고의 단편집 중에서 제일 낫고 좀 떨어지는 장편보다도 낫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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