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비에 이른 다음 계속해서 이발소를 향해 걸음을 옮기려던 백작의 눈길은 호텔 문을 통해 안으로 걸어 들어오는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인에게 끌렸다. 그러나 실은 백작의 눈길뿐 아니라 로비 안의모든 사람의 눈길이 그녀에게 끌렸다. - P177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경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 P194

"삶을 새롭게 시작한다는 생각에는 확실히 매력적인 게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어떻게 집과 여동생과 학창 시절의 기억들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백작이 탁자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 기억을 포기할 수 있겠어요?"
안나 우르바노바가 냅킨을 접시에 내려놓고 의자를 뒤로 밀치면서 일어나더니, 탁자를 돌아서 백작에게 다가가 백작의 옷깃을 잡고 그에게 키스했다. - P196

"로스토프 백작이라는 사람, 자기가 뭐나 되는 줄 아나 보지? 의자를 뒤로 빼주질 않나, 개를 향해 휘파람을 불질 않나. 그건 점잔빼며 상대를 깔보는 행동에 가까운 거야. 자기가 무슨 권리로? 누가 그에게 블라우스를 집어서 옷걸이에 거는 걸 허락했어? 내가 바닥에 내 블라우스를 떨어뜨렸다 해도, 그게 뭐 어때서? 그건 내 옷이니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거야!" - P208

백작이 그 여자 마법사와 함께 그녀의 스위트룸에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던 그 운명의 밤에 아마도 그녀에게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를 투명 인간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하는 대신에 그의 마음의 평화를 농락하려고 마법이 1년에 걸쳐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도록 주문을 걸었다. - P212

순간적으로 백작은 그를 보내버리고 자리를 바꾸어 달라고 요청할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로스토프 가문은 상대가 너그럽지 못하게 행동하는 경우에도 그걸 용인하고 받아들여주는 것을 늘 자랑으로 여겨왔다. - P227

할머니는 곧잘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곤 했었다. 인내라는 것은 그토록 쉽게 시험당하기 때문에 우린 인내를 미덕으로 여기는 거야…………. - P228

"와인 목록이 존재하는 것은 혁명의 이상에 어긋난다고 주장하며 식품부 인민위원 테오도로프 동무에게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귀족의 특권과 인텔리겐치아(지식층)의 나약함과 투기꾼의 약탈적 가격 책정을 보여주는 표지 같은 것이라는 거죠." - P231

1926년 6월 22일-옐레나 사망 10주기가 되는 날-에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누이를 추모하며 그 와인을 마실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목숨을 버리고 생을 끝낼 작정이었다. - P235

백작의 경우, 그의 철학적 성향은 근본적으로 늘 기상학적이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온화하거나 궂은 날씨가 초래하는 필연적인 영향을 믿었다. 이른 서리와 늦게까지 물러가지 않는 여름, 불길한 구름과 가늘게 내리는 비, 안개와 햇빛과 강설량의 영향을 믿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온도계의 미세한 변화에 의해 운명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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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모두 백작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옐레나와 백작 부인과 대공이 말이다. ‘알렉산드르, 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니?‘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세 가지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 P135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딱 알맞은 때에 딱 알맞은 장소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태가 전개될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는 너무 생경해 보이던 양식과 태도가 갑자기 깡그리 무시되고,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의 정서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양식과 태도로 대체되는 것이다. - P142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이 갑자기 나타나서 백작을 깨워 미래의 모습을 그에게 얼핏 보여주었다면, 백작은 자신의 행복감이 너무 섣부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리라. 왜냐하면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는 4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번, 하루에 두번 울리는 시계가 열두 번을 치는 것을 조심스럽게 세고 난 뒤 가장 좋은 재킷을 입은 차림새로 메트로폴 호텔의 지붕을 기어 올라가서 난간을 향해 용감하게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래 길바닥에 몸을 던지기 위해서 말이다. - P167

"당신 책이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예." 그가 말한다. "어렸을 때 아카데미에 다녔습니다."
책임자가 책을 편다. 맨 앞 페이지에 늠름하고 현명해 보이는 인물의 사진이 실려 있다. 니콜라이 2세의 사진이다. 그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범죄다. 공작은 헛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방에서 모든 초상화와 문장과 황실의 휘장을 다 없애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기 때문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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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은 다소 아쉬운 듯한 어조로, 자신은 그 집회를 보면서 사회적 관습과 그걸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경향이 무척이나 완고하다고 생각했는데, 반면에 니나는 그 집회의 활기와 목적의식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 P117

"시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할레키 씨. 그리고 신사가 해야 할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 - P122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진 공들여 만든 물건들, 백작은 생각했다. 그럼 혹시……….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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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고지식하지 않다고 전적으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야. 장담하면 고지식한 사람이 되니까 말이다." - P106

대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들을 가장 새로운 명칭을 붙여 요란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 P107

‘돕는다‘를 ‘가능케 하고 확실히 한다‘로 대체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은 만장일치의 박수와 대다수가 발을 구르는 소리로 채택되었다. 발코니에 있는 동안 백작은 정치적 담론이 언제나 따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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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친구들." 백작이 말했다. "여러분은 당연히 오늘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면담을 위해 크렘린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거기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현 정권의 당국자 몇 사람이 나는 귀족으로 태어난 죄로 여생을 한 장소에서 보내는 형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이 호텔입니다." - P33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상상하는 것은 미쳐가는 확실한 길일 뿐이었다. - P38

나이 많은 그리스인은 문을 막 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각하…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그리스인은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대공의 책상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백작님의 시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백작은 고맙다는 뜻으로 빙긋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콘스탄틴, 시를 쓰던 나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로스토프 백작님, 시인으로서 백작님의 시절이 지나갔다고 한다면 유감스러운 사람은 우리입니다." - P47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P52

그러나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 P53

오랫동안 백작은 신사란 불신감을 가지고 거울을 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미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각도에 맞추려고 30도쯤 몸을 돌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 P65

"아빠가 얘기하길, 공주는 패배자들이 군림하던 시대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래요."
백작은 깜짝 놀랐다.
"몇몇은 그랬을 수도 있겠지." 백작이 수긍했다. "그러나 다 그런건 아니야.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 P73

"원칙적으로 말해서 새 세대는 이전 세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단다. 우리의 나이 많은 분들이 밭을 경작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어. 그분들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일반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한 거야. 그러한 노력을 해왔으니, 설령 그 노력이 변변찮다 할지라도, 그분들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란다." - P84

니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흔들면서 백작의 말을 잘랐다.
"아저씨는 방금 전에 실은 아주 젊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젊고말고."
"그렇다면 아저씨는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이라는 말을 하기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요."
잘났어, 정말. 백작은 생각했다. 이 차만큼이나 명징하고 야무지군. - P88

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 P90

메트로폴 호텔에서 4년을 살아온 백작은 자신을 이 호텔에 관해 꽤 많이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의 이름을 알고 이곳의 서비스를 직접 겪어서 알고 여러 스위트룸의 장식 스타일을 쉬이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니나에게서 교육을 받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풋내기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 P92

화려함은 끈질긴 힘이니까 말이다. 영악함도 끈질긴 힘이다.
황제가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거리에 던져질 때 화려함은 얼마나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는가. 그러고 나서 화려함은 조용히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새로 임명된 지도자의 복장에 관해 조언해준다. - P98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커피 탁자 위, 접힌 신문 옆에 놓여 있던 스푼과 찻잔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작은 그림은, 그동안 백작의 영혼을 짓누른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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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백작이 스위트룸 317호에서 본 것은 단순히 오후의 차 한 잔이 아니라 자유인인 한 신사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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