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난 방금 말을 잘못 했습니다. 화재는 우리 모두의 것이 아니라 화재는 오로지 화재 자신의 것입니다. 화재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난 화재에 흥미가 없습니다. 김형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P278

5월 어느 토요일 열한시경, 해산물 수출로써 요즘 한창 번영일로에 있는 영일무역주식회사의 사원들 서른다섯 명에게 하얀 사각봉투 하나씩이 배부되었다. 이름이 주식회사일 뿐, 윤영일사장의 개인회사라고 하는 편이 정확하다. - P288

가뭄이 계속되는 날씨 때문인지 가로수의 나뭇잎들은 유난히 먼지를 둘러쓰고 있었고 거리를 이루고 있는 높은 건물들은 색소를 어디엔가 흡수당해버리고 어슷비슷한 차림으로 선과 면만을 겨우 유지하고 있었고 토요일 오후를 장식하기 위하여 거리를 메우고 있는 사람들의 걸음걸이조차도 물기가 필요한 듯 시들시들했다. - P299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집에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 P312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집에는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때때로 홍수의 꿈을 꾼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홍수의 꿈을 꾸었다. - P313

나는 어머니와 누나를 깨끗하고 조용한 곳으로 보내드리고 싶다. 그러나 나는 깨끗하고 조용한 곳이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내가 알고있는 곳으로서 깨끗하고 조용한 곳은 우리 학급 반장네 집의 변소뿐이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나를 남의 집 변소로 보내드릴 수는 없다. - P314

염소는 힘이 세다. 그러나 염소는 오늘 아침에 죽었다. 이제 우리집에는 힘센 것은 하나도 없다. 나는 염소가 죽는 순간까지도 힘이 세었던 것을 보았다. - P315

현주는 자기 몸에 늘어붙고 있는 사내의 시선을 느꼈다. 확인해보나마나 알지 못하는 술 취한 어떤 사내겠지. 그 사내가 자기를 향하여 다가오고 있는 것을 현주는 돌아보지 않고도 느낌으로써 알 수 있었다. - P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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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여기에 관계를 갖고 있던 그 동안 타인들로 하여금 자기를 볼 때에 몇 점 더 놓고 보게 해주던 그 회색 괴물을. 이 회색빛 괴물의 덕분으로 그는 생전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도 긴 설명이 필요 없이 자기를 신용해 버리게 할 수 있었다. 만일 이 괴물이 없었다면 평생을 두고 설명해도 신용해줄지 말지 모를 사람들로 하여금 말이다. - P237

1964년 겨울을 서울에서 지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겠지만, 밤이 되면 거리에 나타나는 선술집 - 오뎅과 군참새와 세 가지 종류의 술 등을 팔고 있고, 얼어붙은 거리를 휩쓸며 부는 차가운 바람이 펄럭거리게 하는 포장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서게 되어 있고, 그 안에 들어서면 카바이트 불의 길쭉한 불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고, 염색한 군용 잠바를 입고 있는 중년사내가 술을 따르고 안주를 구워주고 있는 그러한 선술집에서, 그날 밤, 우리 세 사람은 우연히 만났다.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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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에게는 책을 싸게 사는 비결이 있다. K는 사고 싶은 책에서 몇 페이지를 곰보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찢어낸다. 그리고 다음날이나 며칠 후에 가서 그 책을 흥정한다. 그리고 페이지가 많이 찢겨져나간 책을 누가 사느냐고 배짱을 내밀어본다. 곰보는 대개 별수 없이 양보하고 만다. 집에 돌아와서 찢어낸 페이지를 다시 그 자리에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면서 K는 기분이 좋다. - P209

오늘 아침에도 그는 설사기 때문에 일찍 잠이 깨었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싫어서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배가 뒤끓으면서 벌써 항문이 옴찔거려서 견디어낼 수가 없었다. - P213

버스에 흔들거리며 신문사로 가면서, 그는 영감의 의견과 같이 정부측의 압력 때문에 만화 연재를 중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것은 필화사건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만 된다면 그는 영웅이 될 수도 있다. - 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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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의 설명을 보자. 모든 분야, 심지어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도 타인의 판단은 무자비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비판을 두려워하면 자발성은 죽는다. 자신의 본모습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 - 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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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사이에 진주해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 P159

찾아가서 말로써 오늘 제가 먼저 가는것을 알리고 싶었습니다만 대화란 항상 의외의 방향으로 나가버리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이렇게 글로써 알리는 것입니다. - P193

사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 자신이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어렴풋이나마 사랑하고 있는 옛날의 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옛날의 저를 오늘의 저로 끌어다 놓기 위하여 갖은 노력을 다하였듯이 당신을 햇볕 속으로 끌어 놓기 위하여 힘을 다할 작정입니다. - P193

토요일 오후, 제기랄, 괜히 마음이 느긋해진다. 내일 오후가 되면 이 빚을 갚아야 한다. 일요일 오후엔 별수 없이 초조해지거든. 그러니 이 토요일 오후를 실컷 이용해야 한다. - 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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