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모두 백작에게 그 질문을 던졌다. 옐레나와 백작 부인과 대공이 말이다. ‘알렉산드르, 넌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니?‘ 그러나 그들의 질문은 세 가지 다른 면을 지니고 있었다. - P135

시대와 어울리지 못하던 사람이 하룻밤 사이에 자신이 딱 알맞은 때에 딱 알맞은 장소에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사태가 전개될 수도 있다. 그 사람에게는 너무 생경해 보이던 양식과 태도가 갑자기 깡그리 무시되고, 그 사람의 내면 깊은 곳의 정서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양식과 태도로 대체되는 것이다. - P142

미래의 크리스마스 유령이 갑자기 나타나서 백작을 깨워 미래의 모습을 그에게 얼핏 보여주었다면, 백작은 자신의 행복감이 너무 섣부른 것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리라. 왜냐하면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는 4년이 채 지나지 않아서 또 한 번, 하루에 두번 울리는 시계가 열두 번을 치는 것을 조심스럽게 세고 난 뒤 가장 좋은 재킷을 입은 차림새로 메트로폴 호텔의 지붕을 기어 올라가서 난간을 향해 용감하게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래 길바닥에 몸을 던지기 위해서 말이다. - P167

"당신 책이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
"예." 그가 말한다. "어렸을 때 아카데미에 다녔습니다."
책임자가 책을 편다. 맨 앞 페이지에 늠름하고 현명해 보이는 인물의 사진이 실려 있다. 니콜라이 2세의 사진이다. 그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범죄다. 공작은 헛웃음이 나온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방에서 모든 초상화와 문장과 황실의 휘장을 다 없애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썼기 때문이다.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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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작은 다소 아쉬운 듯한 어조로, 자신은 그 집회를 보면서 사회적 관습과 그걸 고지식하게 받아들이는 인간의 경향이 무척이나 완고하다고 생각했는데, 반면에 니나는 그 집회의 활기와 목적의식에 흠뻑 빠져들었다는 점을 지적했다. - P117

"시대가 해야 할 일은 변화하는 것입니다, 할레키 씨. 그리고 신사가 해야 할 일은 시대와 함께 변화하는 것이지요." - P122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진 공들여 만든 물건들, 백작은 생각했다. 그럼 혹시……….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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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가 고지식하지 않다고 전적으로 장담할 수는 없는 법이야. 장담하면 고지식한 사람이 되니까 말이다." - P106

대개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문제들을 가장 새로운 명칭을 붙여 요란하게 요구하는 것이었다. - P107

‘돕는다‘를 ‘가능케 하고 확실히 한다‘로 대체한다는 내용의 결의안은 만장일치의 박수와 대다수가 발을 구르는 소리로 채택되었다. 발코니에 있는 동안 백작은 정치적 담론이 언제나 따분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는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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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친구들." 백작이 말했다. "여러분은 당연히 오늘 일에 대해 궁금해하고 있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나는 면담을 위해 크렘린으로 초대받았습니다. 거기서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현 정권의 당국자 몇 사람이 나는 귀족으로 태어난 죄로 여생을 한 장소에서 보내는 형을 받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곳은 바로………… 이 호텔입니다." - P33

자신의 상황이 다르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상상하는 것은 미쳐가는 확실한 길일 뿐이었다. - P38

나이 많은 그리스인은 문을 막 나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각하… 개인적인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그리스인은 수줍어하는 모습으로 대공의 책상을 가리켰다.
"앞으로도 백작님의 시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백작은 고맙다는 뜻으로 빙긋 미소 지었다.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입니다만, 콘스탄틴, 시를 쓰던 나의 시절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로스토프 백작님, 시인으로서 백작님의 시절이 지나갔다고 한다면 유감스러운 사람은 우리입니다." - P47

인간은 자신의 환경을 지배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그 환경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한편으로 백작은 평생을 연금 상태로 지내야 하는 형을 선고받은 사람이 이 목표를 이루려면 어떻게 하는 게 가장 가능성이 높은지 궁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 P52

그러나 백작에게는 복수의 기질이 없었다. 장대한 작품을 구상할 상상력도 없었다. 제국을 복원하겠다는 꿈을 꿀 정도의 공상적인 자아도 없는 게 확실했다. 그는 그런 것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 P53

오랫동안 백작은 신사란 불신감을 가지고 거울을 보아야 한다고 믿어왔다. 거울은 자기 발견의 도구이기보다는 자기기만의 도구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미인이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이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각도에 맞추려고 30도쯤 몸을 돌려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을 그는 얼마나 자주 보았던가? - P65

"아빠가 얘기하길, 공주는 패배자들이 군림하던 시대의 타락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래요."
백작은 깜짝 놀랐다.
"몇몇은 그랬을 수도 있겠지." 백작이 수긍했다. "그러나 다 그런건 아니야. 그건 확실히 말할 수 있어." - P73

"원칙적으로 말해서 새 세대는 이전 세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어느 정도 고마움의 빚을 지고 있단다. 우리의 나이 많은 분들이 밭을 경작하고 전쟁에 나가 싸웠어. 그분들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고, 일반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희생한 거야. 그러한 노력을 해왔으니, 설령 그 노력이 변변찮다 할지라도, 그분들은 마땅히 우리의 감사와 존경을 받아야 하는 거란다." - P84

니나는 집게손가락을 세워 흔들면서 백작의 말을 잘랐다.
"아저씨는 방금 전에 실은 아주 젊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젊고말고."
"그렇다면 아저씨는 ‘이제까지 살아온 경험‘이라는 말을 하기엔 아직은 좀 이른 것 같아요."
잘났어, 정말. 백작은 생각했다. 이 차만큼이나 명징하고 야무지군. - P88

할 일은 너무 없고, 할 일 없이 때우기엔 시간이 너무너무 많아서 인간 감정의 공포스러운 수렁이라 할 수 있는 권태감이 계속해서 백작의 마음의 평화를 위협했다. - P90

메트로폴 호텔에서 4년을 살아온 백작은 자신을 이 호텔에 관해 꽤 많이 아는 전문가라고 생각했다. 직원들의 이름을 알고 이곳의 서비스를 직접 겪어서 알고 여러 스위트룸의 장식 스타일을 쉬이 머리에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일단 니나에게서 교육을 받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풋내기였는지 깨닫게 되었다. - P92

화려함은 끈질긴 힘이니까 말이다. 영악함도 끈질긴 힘이다.
황제가 계단 아래로 끌려 내려와 거리에 던져질 때 화려함은 얼마나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는가. 그러고 나서 화려함은 조용히 알맞은 때를 기다리며 새로 임명된 지도자의 복장에 관해 조언해준다. - P98

그의 마음속을 떠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커피 탁자 위, 접힌 신문 옆에 놓여 있던 스푼과 찻잔의 모습이었다.
그것들에게 죄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 작은 그림은, 그동안 백작의 영혼을 짓누른 게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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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백작이 스위트룸 317호에서 본 것은 단순히 오후의 차 한 잔이 아니라 자유인인 한 신사의 일상생활의 한 단면이었던 것이다. -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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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21일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내무인민위원회 소속 긴급위원회에 출두함

주재: V. A. 이그나토프, M. S. 자콥스키, A. N. 코사레프
검사: A. Y. 비신스키 - P13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당신의 증언을 모두 고려해보면 우린 그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를 썼던 명민한 영혼이 자기 계급의 부패에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굴복했으며, 지금은 한때 자신이 지지했던 바로 그 이상에 위협이 되고 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소. 이를 근거로 한다면 우리로서는 당신을 이 방에서 내보내 수감하는 게 온당할 것이오. 하지만 당의 고위직 중에는 혁명 이전 단계 영웅의 범주에 당신을 넣는 사람들이 있소. 그래서 위원회의 의견은, 당신은 당신이 그리도 좋아하는 그 호텔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마시오. 만약 당신이 한 걸음이라도 메트로폴 호텔 바깥으로 나간다면 당신은 총살될 테니까. 다음 사건. - P17

1922년 6월 21일 오후 6시 30분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이 에스코트를 받으며 크렘린 궁전 문을 나와 ‘붉은광장‘에 들어섰을 때 날은 눈부시게 아름답고 시원했다. - P21

위층으로 올라가는 방식조차 결정하지 못하는 군인에게 어떻게 전쟁터에서 승리하기를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백작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 P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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